주간동아 897

2013.07.22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 조성식 월간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3-07-22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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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칠성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 지역.

    7월 9일 오전 7시. 취재진은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 화천행 버스에 올랐다. 아침식사는 차 안에서 햄버거로 때웠다. 육군 7사단 측에서 잡은 취재 일정이 빠듯한 탓이었다. 다행히 전날까지 엄청나게 쏟아지던 장맛비가 멈췄다. 하지만 날은 여전히 흐리고 간간히 빗방울이 흩뿌렸다.

    산천어 축제로 유명한 화천은 생각보다 멀었다. 버스가 곳곳에서 서고 국도 구간이 길어 직선거리로 훨씬 먼 속초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화천터미널에서 기다리던 7사단 공보장교 박재현 중위의 차에 올라타 사단 본부로 가니 정훈참모 전수우 소령이 반갑게 맞는다. 우리 일행을 태운 군용차량은 곧바로 칠성전망대를 향해 내달렸다.

    3층 전망대에 오르니 입이 떡 벌어진다. 사방에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병풍처럼 펼쳐진 산과 언덕 사이로 금성천이 휘돌아 나가는 모양이 겸재 정선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마땅히 흉물스럽게 비쳐야 할 철책선조차 공간예술작품처럼 운치가 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곳에선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GP(Guard Post·경계초소)들이 바로 눈앞에 선명하게 보인다. 적 GP와 아군 GP 간 거리가 가장 가까운 곳은 830m다. 이곳 지형은 남고북저(南高北低)로 아군 초소들이 북한군 초소들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해 경계와 방어에 유리하다. 6·25전쟁 때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 박정희 前 대통령과 원빈

    칠성전망대 입구에는 425고지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425고지 전투는 6·25전쟁 최후의 전투로 알려졌다. 영화 ‘고지전’의 실제 배경이라고 한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7월 북한은 중요한 전력자원인 화천발전소를 탈환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7월 20일부터 휴전 당일인 27일까지 8일간 국군 7사단과 중공군 135사단 간 혈전이 벌어졌다. 7사단은 이 전투에서 최종 승리함으로써 화천발전소 확보와 함께 휴전선을 38선 북쪽으로 35km 밀어 올리는 전과를 올렸다. 7사단은 또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로도 유명하다.



    7사단의 별칭은 상승칠성(常勝七星) 부대. 12대 사단장을 지낸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붙인 이름이다. 북두칠성을 뜻하는 별 7개가 부대 마크인데, 북두칠성은 조선시대 지휘기의 상징이라고 한다.

    점심식사 후 7사단 8연대 GOP(General Outpost·일반 전방초소)로 향했다. 소백암검문소를 지나 2시 20분께 네발계단 OP (Observation Post·관측소)에 도착했다. 네발계단은 7사단 철책 구간 중 가장 힘든 구간이다. 배우 원빈 씨가 이곳에서 2개월 근무한 뒤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의가사제대(依家事除隊)했다.

    검문소에서 합류한 대대장 박삼용 중령의 안내에 따라 네발계단 구간 꼭대기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경사가 수직에 가까운 철제계단으로 계단 수가 270개다. 계단 옆으로 철제봉이 설치돼 있다. 소초 병사들은 하루 평균 3차례 이 계단을 오르내린다. 대대장에 따르면 원빈 씨는 원래 무릎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입대했다고 한다.

    비 그친 뒤의 햇살이라 그런지 더 무덥게 느껴졌다. 촬영하기엔 좋은 날씨지만 철모를 쓰고 총을 메고 철책구간을 오르내리는 병사들은 여간 고통스럽지 않다. 계단 아래쪽에서 초병들이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올라온다. 땀에 전 군복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지난해 12월 배치됐다는 황교선 일병에게 “힘드냐”고 묻자 말하기조차 힘든 듯 묵묵히 안경만 닦는다. 문기현 일병은 “1~2주 지나면 네 발로 기어 다닐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중간에 대기초소가 있다. 병사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이다. 안에 들어가 보니 작은 냉장고, 산소호흡기 따위가 비치돼 있다. 뱀 퇴치도구도 눈에 띈다. 초소 병사들이 대대장에게 경례를 붙이면서 구호를 외치는데, 내용이 특이하고 저마다 다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저를 뚫을 수 있는 북한군은 없습니다.”

    “철수하기 전 적 한 명을 꼭 잡겠습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겠습니다.”

    네발계단에서 내려온 뒤 소초에 들렀다. 컴퓨터가 있는 사이버지식방은 독서실 분위기다. 지난해 대대에서 병사 8명이 대학 입학자격 검정고시에 응시해 7명이 합격했다고 한다. 시험 일주일을 앞두고는 근무시간을 줄여주는 등 특별 배려를 했다고 한다.

    인터뷰 | 육군 7사단장 구홍모 소장 인터뷰

    “웃음체조로 인화단결…도발엔 즉각 분쇄”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검은 머리카락과 숯처럼 진한 눈썹. 부리부리한 눈매와 건장한 체구. 전형적인 무골 이미지인 7사단장 구홍모(육사 40기) 소장은 ‘특전사 중 특전사’라는 707부대 출신이다. 707부대는 육군 특수전사령부 산하 대테러 부대로 특전사 내에서도 사격, 공수, 무술 등 기량이 뛰어난 대원들로 구성됐다.

    그의 취임 일성은 인화단결. 이를 위해 특별히 웃음체조를 고안해 지시했다. 웃음체조란 말 그대로 체조하듯이 활짝 웃는 것이다. 근무든, 보고든, 식사든 일단 단체로 한바탕 웃고 나서 시작한다.

    “웃음을 생활화하자는 취지다. 나부터 많이 웃으려 노력한다. 억지로라도 웃고 나면 즐거워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군에 마지못해 입대한 병사도 많다. 지휘관은 이들이 생산적인 병영생활을 하고 안전하게 사회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 그 점에서 웃음은 매우 유용하다. 많이 웃으면 부대 분위기가 밝아져 사고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또 ‘자유시간’ 사단장으로 유명하다. 병사들을 만날 때마다 초코바 ‘자유시간’을 손에 쥐어주기 때문. 자신이 타고 다니는 차량에 늘 1개 대대 분량의 초코바를 싣고 다닌다고 한다.

    “자유란 좋은 것이다. 통제된 생활 속에서 스스로 자유를 찾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병사들과의 스킨십 수단으로도 좋다.”

    그는 북한의 도발 위협에 대해 강성 이미지에 걸맞은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나한테는 용서가 안 된다. (병사들에게) ‘적에게 전율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발 시 현장에서 즉각 보복해 도발의지를 분쇄해야 한다.”


    # 골든 브리지와 병영 독서문화

    사이버지식방은 이른바 골든 브리지(Golden Bridge) 도서실을 겸한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작명한 골든 브리지는 최전방 부대와 사회를 연결한다는 뜻이다. 골든 브리지는 7사단 GOP부대의 모든 소초에 설치돼 있다. 자매결연단체에서 책을 지원하는데, 규모가 작은 소초엔 300권, 큰 곳엔 500권씩 비치했다고 한다.

    골든 브리지와 더불어 병영 독서문화를 확산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는 것이 ‘Army Book Start’ 캠페인이다. ‘책과 함께 군생활을 시작하자’는 뜻이 담긴 이 운동은 사단 감찰참모 이형주 중령이 기획한 것으로, 지난해 5월 신병교육대 수료생 및 사단으로 전입하는 보충병에게 책 한 권씩 선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올해부터는 전역병에게도 나눠준다. 분기 1회 독후감 경연대회를 열어 우수자 및 우수분대에 대해선 표창과 함께 특별 외출·외박을 실시한다.

    네발계단 구역을 벗어나 V자 계곡이 있는 승리소초를 기점으로 한 시간가량 오르막 철책길을 걸었다. 계곡물에 손을 담그니 시리다. 주변이 지뢰지대라 계곡 안쪽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몇몇 초소에 들러 병사들과 얘기를 나눴다. 한국예술종합대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다는 김요섭 일병은 대대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약한다. 밴드 이름은 세븐스타즈. 멤버 7명은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연습한다. 가을에 사단 문화행사인 칠성페스티벌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 일병은 “조만간 여군 보컬을 영입할 계획”이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하늘을 달리다’(이적), ‘사랑했나봐’(YB), ‘Twinkle’(태티서) 등이 주요 연습곡이다. 음악은 이데올로기보다 위대하다. 적과 얼굴을 맞대는 최전방에서 밴드활동을 하는 이 젊은이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오후 4시 30분. 오르막 철책구간이 끝나는 지점에 GP 통문이 나타났다. 해발고도가 높고 사방이 탁 트인 이 일대는 겨울이면 병사 대부분이 발가락 동상을 입을 정도로 추운 지역이다. 초소 병사들 사이에서 “총으로 발을 쏴버리고 싶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니 그 고통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다.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생활관에서 웃음체조를 하는 병사들.(왼쪽) 철책 뒤 방벽에서 작전 중인 초병들.(오른쪽)

    # 지난해 6월 유해 3000구 수습

    대기 중인 차에 올라 오작교로 향했다. 한재로라 부르는 비포장도로는 산사태로 곳곳에 돌무더기가 내려앉고 움푹 파인 곳이 많았다. 이곳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장소가 아니라, 7사단(화천)과 21사단(양구)의 경계구역이 맞닿은 지점의 다리를 말한다. 다리 동쪽은 21사단 구역이고 서쪽은 7사단 관할이다.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북한강 상류가 남한에 맨 먼저 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일대는 산양과 사향노루가 많아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여 있다.

    다시 차를 타고 30분쯤 달려 북한의 수공(水攻) 위협에 대비해 만들었다는 평화의 댐에 도착했다. 같은 민족 간에 물 공격까지 대비해야 하다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 날 아침 7시 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15사단 구역으로 넘어갔다. 15사단은 승리부대라고 부른다. 6·25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부대’라며 하사한 칭호다. 100여 차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이 부대는 특히 강원 고성 지역 351고지 전투에서 북한군 7사단을 섬멸함으로써 동해안 휴전선을 북쪽으로 밀어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먼저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있는 인민군사령부 막사와 대성산지구 전적비를 둘러봤다. 대성산지구 전투는 1951년 6월 9일 국군 2사단과 중공군 58사단이 벌였다. 6일간 계속된 이 전투에서 2사단은 중공군으로부터 1042고지를 탈환한 데 이어 근처 다른 고지들도 차지함으로써 수복(修復)의 발판을 마련했다.

    빗줄기가 점차 거세졌다. 공보장교 이남지 중위의 안내로 승리전망대로 향했다. 휴전선 155마일의 한가운데 위치한 승리전망대는 칠성전망대와는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줬다. 북한 지역을 잘 관찰할 수 있고 남북한 초소들이 곡예하듯 뒤엉켰다는 점에선 같지만 지형은 차이가 있다. 고지와 언덕이 더 가파르고 철책이 더 날카로워 보인다. 날이 흐려 북쪽 지형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지난해 6월 15사단은 6·25전쟁 격전지인 적근산(1073m)에서 유해 3000구를 수습했다. 그중 일부는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미군과 중공군 유해로 확인됐다. 화천군과 철원군의 경계인 적근산은 산 전체가 국군과 중공군 시체로 뒤덮일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오전 10시, 와수베가스라고 부르는 마을의 한 분식집에서 늦은 아침을 들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빗댄 와수베가스는 시골치고는 꽤 번화한 곳이다. 행정구역상 명칭은 철원군 서면 와수리. 이곳 음식점과 유흥업소의 주 고객은 물론 외출·외박을 나오는 군인들이다.

    6사단 공보장교 전창일 중위가 마중을 나왔다. 철원 지역을 지키는 6사단의 다른 이름은 청성(靑星)부대다. 차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이 지금까지 봐왔던 지역과는 완연히 다르다. 사방이 탁 트이고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다. 동부 지역에서는 볼 수 없던 비옥한 논들이다. 오대쌀로 유명한 철원 평야는 서울 이북의 대표적 곡창지대다. 김일성이 이곳을 빼앗기고 난 후 3일간 식음을 전폐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취재진 카메라에 잡힌 산양.(왼쪽) 7사단과 21사단이 만나는 오작교.(오른쪽)

    # 녹슬어도 철마는 달리고 싶다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제2땅굴 내부.

    철원군 근동면 광삼리에 있는 제2땅굴부터 둘러봤다. 제2땅굴은 1975년 군사분계선 남방 800m 지점에서 발견됐다. 입구에 땅굴 탐지 과정에서 지뢰와 부비트랩으로 목숨을 잃은 군인 8명을 기리는 위령탑을 세워놓았다. 땅굴 안으로 들어가 10여 분 걷자 작은 우물이 나타난다. 북한군이 식수로 쓰던 우물인데, 우리 측이 확보한 후 통일염원우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물 안에 동전이 수북이 쌓였다. 기자도 통일을 염원하며 동전을 던졌다.

    6사단 정훈참모 권기범 중령은 “6·25전쟁은 6사단 전투사”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6사단은 춘천지구 전투, 음성지구 전투, 초산지구 전투, 용문산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전쟁 초기 북한군의 진격을 3일간 저지한 춘천지구 전투는 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6사단 병사들은 육탄돌격으로 북한군 전차를 파괴하는 용맹함을 발휘했다. 6사단은 또 1950년 10월 국군 최초로 압록강으로 진격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압록강 물을 바치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평화전망대에 올랐다. 전방 북한 지역이 궁예도성 터라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들다. 멀리 6·25전쟁 격전지로 꼽히는 백마고지와 피의 능선, 그리고 김일성 지휘소가 있었다는 고암산 등이 흐릿하게 보인다. 백마고지에서는 10일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뀌고 포탄 27만 발이 쏟아졌다고 한다. 피의 능선 전투에서는 적군 3만 명과 아군 1만 명이 전사했다. 바람이 안개를 밀어내자 아군 GOP 철책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능선을 따라 꾸불꾸불 요동치는 동부전선 철책과 달리 평탄한 지대에 거의 일직선으로 펼쳐져 있다.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초소 안에서 바라본 철책선(위)과 더는 달리지 못해 녹슬고 찌그러진 월정리역 기차.

    전망대에서 내려와 서울-원산 철로의 간이역인 월정리역에 들렀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간판이 처연하다. 더 달리지 못하고 멈춘 기차는 허리 찢긴 한반도의 고통을 말해주듯 녹슬고 찌그러진 고철 덩어리로 남아 있다.

    오후 3시. 군용 우의를 걸치고 흑룡대대 철책 탐방에 나섰다. 철책 옆으로 방파제 모양의 시멘트 방벽이 설치돼 있다. 높이 5~6m의 이 방벽에는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초병들은 이 방벽 구간에서 근무한다. 평상시 방벽에서 철책으로 통하는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방벽길로 걷다가 출입문을 따게 해서 철책길로 내려갔다.

    # 제비와 노랑나비

    제비들이 자유롭게 철책 위를 날아다닌다. 그들에게 남과 북을 가르는 철조망은 한낱 장난감에 지나지 않으리라.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 꽃잎 위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살포시 앉아 있다. 레마르크의 전쟁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답고도 슬픈 광경이다.

    초소 근무 중인 이호근 상병은 “통일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다. 이유를 묻자 “고통받는 북한 주민을 구해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는 조심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한 시간여 동안 철책 구간을 걸은 후 인근 소초에 들렀다. 복도 게시판엔 ‘봄맞이 시 공모’라는 제목 밑에 병사들의 시가 전시돼 있다. 최우수 작품은 최지훈 일병의 ‘아비 부(父)’라는 시다.

    철없이 쏘다니며 / 바람이 날 키웠다 난 생각했네 / 왜 몰랐을까 / 그 바람 / 아비의 한숨이었다는 걸

    철원군 동송읍 철새마을

    독수리 겨울 철새 서식지…땅 70%는 외지인 소유


    그날의 치열한 고지戰 포연처럼 안개가 말 없이 증언

    6사단 출신 철원 주민 백종한 씨(위). 드넓은 철원 평야.

    GOP 취재를 끝내고 민통선 인근 마을인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를 찾았다. 철새마을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독수리, 두루미 등 겨울 철새의 서식지로 유명하다. 토교저수지 근처에서 ‘철새 보는 집’을 운영하는 백종한(66) 씨는 40년간 이곳에서 살았다. 고향은 홍천인데, 1960년대 후반 6사단에서 군생활을 한 것이 인연이 돼 철원 토박이로 변신한 것이다.

    백씨에 따르면 철원 지역 땅의 약 70%를 외지인이 갖고 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떼를 몰고 북한에 갔다 온 후 땅값이 뛰기 시작했는데, 남북관계가 좋았던 시기에는 계속 올랐다고 한다. 통일 후를 내다보는 외지인의 땅 매입이 늘면서 원주인과의 계약 해지로 하루아침에 경작지를 잃은 농부들이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땅값 상승세가 꺾였다고 한다.

    백씨는 “일손이 달려 농번기에 군인들의 대민지원이 없으면 농사 못 짓는다”고 말했다. 농민 대부분이 벼농사만으로는 살기 힘들어 원예농사를 곁들인다고 한다. 백씨의 비닐하우스를 구경했다.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는데, 백씨는 “일하다 갈증 나면 고추를 따 먹는다”며 취재진에게도 권했다. 먹어보니 과연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통일에 대한 생각을 묻자 백씨가 탄식하듯 말했다.

    “통일 되면 우리 같은 농부는 더 힘들어질지 모른다. 그래도 같은 민족이라면 하나가 돼야지. 가진 자들만 좋아지더라도 통일은 돼야지. 통일이 돼 원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월정리역에 들어오거나 기업들이 들어서면 이 지역에도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겠나. 일자리가 없으니 다들 고향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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