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0

2013.06.03

“선택받아야 연기 가능 미스 김은 딱 내 얘기”

‘직장의 신’ 헤로인 김혜수

  • 김지영 월간 ‘신동아’ 기자 kjy@donga.com

    입력2013-06-03 11: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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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택받아야 연기 가능 미스 김은 딱 내 얘기”
    “안녕하세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5월 28일 오후 약속장소에 들어서자 김혜수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말투가 상냥하고 목소리는 경쾌하다. 입가엔 환한 미소가 번져 있다. 5월 21일 막을 내린 KBS 2TV 드라마 ‘직장의 신’에선 볼 수 없던 모습이다.

    ‘직장의 신’에서 그는 스스로 계약 인생을 고집하는 자발적 비정규직 ‘미스 김’을 열연했다. 미스 김은 버스와 포클레인 운전, 비행기 정비, 조산 등 ‘미스 김 사용설명서’에 명시한 124가지 자격증 외에도 칸이 부족해 적지 못한 170가지 자격증을 가진 슈퍼우먼이요, 회식 참여 조건으로 당당히 수당을 요구하는 ‘간 큰’ 여자다. 현실에선 존재하기 힘든 캐릭터지만 미스 김의 언행은 방송 내내 시청자로부터 열렬한 지지와 공감을 이끌어냈다. 사회조직의 부조리에 순응하며 살아온 이 시대 을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준 덕분이리라.

    “~했습니다만”이라는 말투와 매회 그가 남긴 명대사도 화제였다. 특히 “회식은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입니다” “회사란 생계를 나누는 곳이지, 우정을 나누는 곳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걸로 오버했다간 자기 목만 날아갑니다” 같은 대사는 직장인이 새겨야 할 어록으로 인터넷을 달궜다.

    평소 당당하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김혜수이기에 미스 김 캐릭터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스 김을 그리워하며 ‘직장의 신2’를 기대하는 이도 적잖다. 드라마가 종영한 후 꼭 일주일 만에 만난 그는 미스 김으로 살았던 지난 3개월간의 촬영 뒷얘기를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퉁명스럽고 까칠한 미스 김 화법이 아닌, 재치와 유머가 번뜩이는 김혜수 언어로.



    ▼ 드라마 종영 후 어떻게 지냈나.

    “마지막 회를 방송한 5월 21일까지 촬영했다. 장규직을 구하러 간 게 마지막 촬영 신이었다. 그날 저녁 회식하고, 이튿날 영화 ‘관상’ 포스터를 찍고, 그다음 날은 ‘직장의 신’ 제작진, 배우들과 1박2일 일정으로 MT를 다녀왔다.”

    ▼ 재미있었나.

    “우리끼리 참 돈독한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자고 싶어 하지 않아서 날 샐 때까지 놀았다. 재미있는 얘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노래도 하면서. 예능프로그램을 안 봐서 몰랐는데 조권(아이돌그룹 2AM의 리더)이 노래를 정말 잘하더라. 현란한 댄스 실력도 보여줬다. 전혜빈은 정말 열정적이다. 쉼 없이 노래하더라. 콘서트나 다름없었다. 동영상을 찍다가 배터리가 방전된 것도 모를 정도로 푹 빠져 있었다.”

    1박2일 MT 돈독한 시간 보내

    “선택받아야 연기 가능 미스 김은 딱 내 얘기”

    KBS 2TV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 비정규직 ‘미스 김’으로 열연한 김혜수.

    극중 미스 김은 달인 수준의 탬버린 댄스를 비롯해 게장 담그기, 홈쇼핑 내복쇼, 유도의 엎어치기 등 다채로운 ‘묘기’를 대역 없이 선보였다.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부단한 연습의 결과”라며 “누가 봐도 입이 쩍 벌어질 만하게 현란한 동작과 기술적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연기했다”고 털어놨다.

    “탬버린 신은 지하에서 연기를 피우며 6시간 동안 찍었는데, 몸을 그렇게 움직여본 적이 없어 정말 힘들었다. 탬버린 달인이 현장에 와서 시연했는데 소리와 박자가 다르더라. 그 정도 경지에 이르려면 최소 6개월을 꼬박 연습해야 하는데 시간적 여유도 없고 난도도 높아 따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스 김처럼 누구나 하는 일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로 표현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더라. 홈쇼핑에 출연해 내복 신을 찍을 땐 두 장을 겹쳐 입었다. 속이 비쳐서. 원래는 나오미 캠벨처럼 직각으로 걸어가다 다리를 위아래로 쫙 찢어서 내복의 신축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려 했는데 무대가 짧더라(웃음).”

    드라마 출연은 2010년 MBC TV ‘즐거운 나의 집’ 이후 3년 만. 그는 “드라마 동향이나 시청자의 흐름을 몰라 오랜만의 안방극장 나들이가 두려웠다”고 했다. 무엇보다 미스 김이 전대미문의 비현실적 인물로 비쳐 시청자가 괴리감을 느낄까 봐 걱정돼 캐릭터를 잡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중심을 잡을 수 있었던 건 대본의 힘 덕분이었다.

    “대본이 주는 신뢰감이 굉장히 컸다. 처음 대본을 봤을 때 윤난중 작가의 집필 코드가 나랑 맞는다는 걸 알았다. 대본만 보고 그런 느낌이 들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본 1부를 다 읽기도 전에 ‘내가 하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첫눈에 꽂힌 남자처럼?

    “정말이지 그런 지문과 대사, 캐릭터는 데뷔 후 처음 봤다. 흥미로웠다. 촬영 내내 대본을 기다렸다. 나뿐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나.

    “스태프와 이만큼 정들기도 힘들다. 드라마 ‘스타일’과 ‘즐거운 나의 집’ 스태프에게도 각별한 애정을 느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우리 스태프는 나를 ‘미스 김’이나 ‘서김이 형’이라고 불렀다. 그게 좋았다. 스태프뿐 아니라 배우들도 미스 김을 연기하는 김혜수를 아껴주고 잘할 수 있게 용기를 줬다.”

    쪽대본 제작 비합리적 시스템

    “선택받아야 연기 가능 미스 김은 딱 내 얘기”
    ▼ 내복 차림이 민망하지 않던가.

    “안 그래도 작가가 5회 대본에 내복 신이 있다는 걸 매니저를 통해 알려왔다. 내복이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전혀 개의치 않았고 촬영하면서도 민망하지 않았다. 작가가 무척 현명하게 수위를 조절하면서 캐릭터 품격을 유지해주리라 믿었고, 그런 기대를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다. 다만 홈쇼핑의 메커니즘을 잘 몰라 물어봤다. 그날 전화주문으로 다 팔아야 되는 거냐고.”

    ▼ 홈쇼핑에서 물건을 구매한 적 없나.

    “보고 마음에 들어도 직접 구매한 적은 없다. 언니나 친구가 사준 적은 있지만. 원래 TV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집에 있을 때 TV 소리가 나면 거슬린다. 혼자 사는 사람은 TV 소리가 위안이 된다고 하더라. 내 주위에도 TV 소리가 나야 잠든다는 친구가 있다.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나도 다큐멘터리는 즐겨 본다. 놓친 영화도 IPTV로 보고. 근데 TV랑 친하진 않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 체력 관리는 따로 했나.

    “오랜만에 드라마를 한다는 두려움에 초반엔 보약을 먹었는데 나중엔 맛없으니까 안 먹게 되더라. 그 대신 체력이 떨어지지 않게 잘 먹었다. 기본적인 게 무너지면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못하는 상황이 오는데, 최소한 그런 일을 스스로 만들지는 말자는 생각으로 촬영했다. 배우는 원래 최상의 컨디션에서 최상의 연기를 해야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지 않나. 사실 이건 불합리한 시스템의 문제다.”

    그는 채시라, 하희라, 이상아와 함께 하이틴 광고스타로 활약하다 1986년 영화 ‘깜보’로 연기에 입문했다. 데뷔 후 줄곧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오가며 정상 자리를 지켜왔기에 쪽대본으로 생방송처럼 촬영하는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폐해를 잘 알고 있을 듯했다. 이에 그는 “방송을 드문드문 해서 잘 모른다”고 전제한 후 소신을 밝혔다.

    “드라마 성패를 시청률과 그에 따른 광고수익으로 판가름하는 한 제작환경이 개선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대본을 미리 쓰기는커녕 써놓은 대본조차 새로 쓰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으로 안다. 전체 대본의 10분의 1도 완성되지 않은 채 제작에 들어가는 경우도 적잖다. 이를 개선하지 않고 자꾸만 높아지는 시청자의 기대치를 무슨 수로 충족하고, 또 콘텐츠의 다양성이나 질적 향상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나. 당장 수익을 내야만 유지되는 방송제작사 처지는 이해하지만 이게 얼마나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인 시스템인지 깊이 반성해야 할 때다.”

    ▼ 원래 웃음이 많다고 들었는데.

    “오지호 씨 덕에 많이 웃었다. 파마머리만 봐도 웃기더라. 오지호 씨가 애드리브를 되게 잘한다. 유머 센스가 뛰어나다. 난 그런 재주가 없다. 오지호 씨를 보며 좋은 자극을 받았다. 많은 도움이 됐다.”

    ▼ 오지호의 매력은?

    “잘생기고 몸도 되게 예쁜데 극중 배역 장규직처럼 빈 듯한 캐릭터를 거부감이 들지 않게 연기하는 게 오지호 씨 장점이다. 장동건, 정우성 씨는 진짜 멋지지만 한 발 떨어져서 봐야 할 것 같은데, 오지호 씨는 친근하다. 그런 걸 떠나서라도 매우 쾌활하고 건강하고 착하다. 촬영 현장이 밝았던 것도 오지호 씨 영향이 크다. 웃음이 많고 성실하다. 캐릭터와 실제 모습 간에 일치하는 지점이 매우 소소하다.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오지호 씨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다.”

    ▼ 액션 신이 많았는데 다치진 않았나.

    “촬영 현장은 다들 일에 빠져 있어 부상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에 만날 별것 아닌 일로 다쳤다. 스테이플러 심을 빼다가도 다칠 정도였다. 잭나이프에도 손을 베고. 얼마 전까지 팔다리가 상처투성이였다. 기합소리를 내며 단숨에 정수기 물통을 갈다가 너무 무거워 떨어뜨린 적도 있다. 혼자 들기엔 벅차더라(웃음).”

    엄살 부리지 않고 최선 다할 것

    ▼ 배우도 계약직인데 연기하며 공감이 가던가.

    “미스 김도 3개월 계약하지만 나도 3개월 계약하고 촬영한다. 리허설 때 동료들이 ‘미스 김 씨는 왜 3개월만 일하고 떠나세요?’ ‘왜 계약 연장을 안 하세요?’ 하고 묻기에 ‘연속극은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미니시리즈는 딱 3개월이 적당합니다’ 하고 농담한 적이 있다(웃음). 배우도 엄밀히 얘기하면 계약직이고 누군가로부터 선택을 받는다. 그런 배우 중에서도 나는 매우 축복받은 소수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사람 대부분이 신체, 두뇌, 정신이 가장 건강할 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일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 삶을 산다는 것이 다행이고 고맙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미안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엄살 부리지 말아야지 싶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3월 ‘직장의 신’ 방영을 앞두고 불거진 2001년 성균관대 언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밝혔다.

    “표절이라는 무서운 단어를 듣고 처음엔 무척 놀랐다. 사실 오래전에 쓴 논문이라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주석을 달아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내 무지의 소치다. 전문가가 문제 있다고 했으니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제 일이든, 10년 전 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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