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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캔버스로 北 참상 알리는 게 내 사명”

탈북화가 송벽의 평화 메시지

  •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캔버스로 北 참상 알리는 게 내 사명”

“캔버스로 北 참상 알리는 게 내 사명”

1 ‘떠나자’, 122×60, 2013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은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가 많아 데이트 명소로 소문난 곳이다. 아담한 2차선 도로 양옆으로 카페, 레스토랑, 옷가게, 화장품 팝업 매장, 뷰티숍이 즐비하다. 서구적 정취를 자아내는 유럽풍 건물 사이로 몇몇 갤러리, 영화관이 웅크리고 있다.

자본주의 문화의 경박함과 세련됨이 버무려진 이곳에서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탈북화가 송벽(43). 북한에서 선전일꾼으로 활동하다 2001년 탈북했고 이듬해 한국에 정착했다. 그간 미국에서 세 번, 한국에서 한 번 모두 네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평화와 희망에 대한 메시지다.

지하 요새와도 같은 화랑 Connoi- Space에 들어서자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조그마한 사내가 앉아 있다. 바싹 마른 몸매에 동안(童顔)이다.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30대 초반 청년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림부터 둘러봤다. 하나같이 북한 체제를 풍자하고 자유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품이다. 특별히 세 작품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푸르른 우주 한가운데 지구가 달처럼 떠 있고 새들이 무리지어 날아가는 ‘떠나자’, 태극기와 인공기 중간에서 턱을 괴고 상념에 잠긴 소년을 그린 ‘중심에서 바라보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메릴린 먼로 옷차림의 김정일 사진 밑에서 김정일이 손을 흔드는 ‘공화국인민들에게 자유를’.

기자가 ‘떠나자’에 대한 특별한 느낌을 말하자, 그가 조곤조곤 얘기를 시작했다.



“북한 인민뿐 아니라 지구상에 굶주리는 모든 영혼을 위한 그림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게 배고픔의 설움이다. 배고파서 삶을 마감할 때의 심정이 어떠하겠나. 북한에서만 300만 명이 굶주려 죽었다. 이게 말이 되나.”

‘세상서 가장 슬픈 건 배고픔의 설움’

“캔버스로 北 참상 알리는 게 내 사명”

2 ‘중심에서 바라보다’, 71×50, 2013 3 ‘공화국인민들에게 자유를’, 194×122, 2013

낮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다. 그가 독립투사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김일성 생일인 4·15 태양절에 맞춰 전시회를 열었다”고 덧붙였다. 기자가 “‘중심에서 바라보다’는 남쪽에도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남북한 갈등을 그렸다. 우리가 왜 갈라졌나. 한 줌의 이데올로기 때문 아닌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슬픈 사연을 갖고 있나. 남북이 다같이 노력해야 한다.”

그는 최근 북한의 도발위협에 따른 남북 대치 국면에 대해 “안타깝다”고 했다.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끼리 왜 전쟁 열의를 고취해야 하는지. 그 시간에 민생을 챙겨야지….”

그렇다고 그가 양비론을 펴는 건 아니다. 그는 “강경할 땐 강경해야 한다. 그간 얼마나 양보했나. 양보할수록 더 공갈을 치지 않았나. 이대로 가면 북한이 더 갑갑해질 것”이라면서 박근혜 정부의 대북노선에 지지를 표했다.

그가 2012년 미국에서 연 전시회는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 등 유력인사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CNN, BBC, NHK 등 서방의 유수 언론이 큰 관심을 나타냈다. 언론보도로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서 몇몇 대학의 요청으로 학생들 앞에서 강연도 했다. 외국인 학생들은 그에게 “북한에서 예술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그는 “오직 김일성, 김정일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선전용 포스터 그리는 선전일꾼 화가 대접 못 받아

선전일꾼은 우리가 아는 화가와 다르다. 체제 선전용 포스터를 그리는 사람으로 예술가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의 꿈은 조선화창작단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단원이 되면 평양 거주권이 나오는 등 사회적 우대를 받는다. 그런데 그곳에 들어가려면 실력뿐 아니라 출신성분이 좋아야 한다. 노동자 아들인 그에겐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그는 “예술 하는 사람이라면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지 않나”라는 질문에 고개를 내저었다.

“어릴 때부터 김씨 일가가 하나님이고 태양이었다. 예술이 뭔지 자유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내게는 선전 포스터 그리는 것이 큰 행복이었다. 그걸로 김일성 부자에게 충성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그가 탈북을 시도한 건 자유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생각뿐이었다. 첫 탈북은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함께 나섰던 부친이 두만강 급류에 휩쓸려 익사했다. 장마로 물이 불어난 2000년 8월의 일이었다.

경비대에 체포된 그는 수용소로 끌려갔다. 거기서 독한 맘을 품었다.

“북한 정부나 김정일이 싫어서가 아니라 단지 배고파서 나가려 했던 건데, 행위에 비해 너무 가혹한 처벌이었다. 더는 이 땅에서 안 살겠다고 결심했다. 배고픔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탈북을 시도한 수많은 북한 사람이 두만강에 빠지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탈북자마다 처절한 가족사가 있다. 그들을 대변해 세계인들에게 북한의 참상을 알리는 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그는 바싹 말라갔다. 2001년 3월 그가 비교적 일찍 풀려난 것은 그의 표현대로라면 ‘해골만 남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 못하고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렸다. 혜산 사람 2명이 한 방을 썼는데 끝내 굶어죽었다. 그들이 부러웠다. 나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들처럼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굶주림이 없는 곳으로.”

어느 날 수용소장이 찾아와 물었다. “내보내주면 집엔 갈 수 있겠느냐”고. 그는 “보내주면 집에 가 죽겠다”고 대답했다. 소장은 그를 내보낼 때 사탕가루 3봉지를 쥐어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먹으며 생명에 대한 애착심이 생겨났다.

“캔버스로 北 참상 알리는 게 내 사명”
그는 외삼촌 집으로 가서 몸을 추슬렀다. 2001년 5월 다시 탈북길에 나섰다. 가다가 발길을 돌려 황해도 집을 찾아갔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전하며 하직인사를 했다. 어머니는 “어디 가든 죽지는 마라”고 당부했다. 막내 여동생이 홀로 어머니 곁을 지켰다. 그는 3남매의 맏이였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그가 외삼촌 집에 머무는 동안 굶어 죽었다. 불과 28세였다. 남편과 아이가 다 같이 죽었다.

“옛말에 ‘화는 쌍으로 온다’고,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슬펐다. 누가 이 가정을 파탄시켰는지, 이 비극의 책임이 누구한테 있는지….”

그가 한국에 들어온 지 3년이 지난 2005년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2년 후 그는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막내 여동생 가족을 탈북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족에 대한 부담을 던 그는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2007년 공주사범대 미술교육학과에 입학했고 2년 후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해 동양학을 전공했다. 생계를 위해 막일꾼으로 나서고 이삿짐센터에서도 일했다. 쌀 살 돈으로 그림재료를 샀다. 며칠 동안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다.

“흰 캔버스를 통해 나만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그걸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냈다.”

팝아트식에 철학을 해학적으로 표현

그는 자신의 화풍에 대해 “팝아트식으로 재미있게 그리되 철학적 에세이를 해학적 표현으로 담는다”고 설명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는 현재 모 대학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 결혼은 안 하나.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여자 생각이 없나.

“그건 아니다(웃음). 사랑도 하고 싶고 가정도 꾸리고 싶다.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으려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외롭지 않나.

“밤에 혼자 집에서 상념에 잠길 때 외로움을 느낀다. 자신과의 싸움이니 극복해야지.”

▼ 그림 전시가 돈은 되나.

“경제적인 게 목적은 아니다. 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게 중요하다. 교수님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작품을 구매하는 사람도 늘었다. 아직까지는 국내보다 해외 전시 때 구매자가 더 많다.”

▼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할 건가.

“상업적 작품을 그릴 거였으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는 “북한 전문 작가로 머물고 싶지는 않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의 목표는 세계적 화가다. 북한 인민뿐 아니라 굶주림과 압제에 시달리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의 꿈을 키워주는 화가 말이다.

“지구라는 행성은 인간이 사는 곳이다. 그런데 그 행성의 어떤 곳은 풍요롭고 어떤 곳은 빈곤하다. 모순이 넘친다. 내 그림은 그런 모순을 고발하고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캔버스로 北 참상 알리는 게 내 사명”

송벽 화가의 그림을 전시한 갤러리.





주간동아 2013.04.22 884호 (p38~40)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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