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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후에도 편치 않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애도 물결 속 공과 논쟁…장례는 ‘준국장’

  • 이설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snow@donga.com

사후에도 편치 않은 ‘철의 여인’

‘철의 여인’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 ‘윈스턴 처칠 이후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앞에는 늘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는 1979년 총리에 취임해 90년까지 3연임하면서 안으로는 영국 개혁을 이끌었다. 4월 8일 한 시대를 풍미한 지도자가 뇌중풍(뇌졸중)으로 사망하자 영국에서는 애도 물결이 이는 한편, 생전과 마찬가지로 공과 논쟁이 한창이다. 대처의 정책 전반을 일컫는 ‘대처리즘’은 무엇을 남겼을까.

대처 전 총리는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다. 1925년 영국 중서부 랭커셔 주에서 가난한 식료품점 딸로 태어나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그가 정치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버지 앨프리드 로버츠의 영향이 컸다. 로버츠는 가난 탓에 중학교도 마치지 못했지만 지역 시의원과 시장까지 지냈다. 어린 대처는 아버지를 따라 토론회 등에 다니며 정치 감각을 키웠다. 아버지는 늘 그에게 “남에게 기대지 마라”고 가르쳤으며 이는 대처 전 총리가 훗날 고질적인 ‘영국병’을 뜯어고치는 데 큰 자산이 됐다.

아버지의 전폭적 지지로 대처 전 총리는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했고, 25세인 1950년 총선에 출마한다. 비록 낙선했지만 최연소 여성 후보자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으며, 이때 평생 찰떡궁합을 자랑한 남편 데니스 대처를 만난다. 귀족 출신의 성공한 석유사업가인 데니스는 35세 이혼남이었다. 대처는 데니스를 ‘보물창고’라며 애정을 아끼지 않았고, 데니스는 스스로를 ‘그림자 남편’이라 칭하며 아내를 헌신적으로 내조했다.

대처의 마지막 나날



한 차례 실패를 딛고 대처 전 총리는 34세인 1959년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그 후엔 특유의 강단과 원칙주의로 탄탄대로를 걷는다. 1961년부터 64년까지 연금·국민보험부 차관을 지냈고, 69년 교육부 장관에 올랐다. 75년 보수당 대표에 당선했으며, 79년 총선에서 승리해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다.

대처 집권 이전 영국은 과도한 복지, 만성화한 파업 등 ‘영국병’으로 신음했다.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에서 여성 총리가 탄생한 배경에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이 깔려 있었다. 1979년 총리 취임식에서 그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예고했다. 철강과 광업 등 공기업을 민영화했고, 과감한 세제개편으로 과도한 복지를 줄이는 데 앞장섰다. 밖으로는 냉전시기에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소련에 맞섰다. 그 결과 만성적 경기불황으로 침체한 영국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성공한다. 이런 개혁정책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에 ‘주의(-ism)’를 붙인 단어 ‘대처리즘’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최초의 영국 정치인이 됐다.

가난한 식료품점 딸은 런던의 호화 호텔에서 눈을 감았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비대해진 방광 수술을 받은 뒤 대처 전 총리는 줄곧 이 호텔에 머물렀다. 병세가 언제 또 악화할지 몰라 집 대신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던 것. 런던리츠호텔은 그가 생전 지인들과 즐겨 찾던 곳이다. 최고의 VIP 투숙객이 사망한 뒤 호텔 측은 조기를 걸고 애도를 표했다.

대처 전 총리의 건강 이상설이 나온 것은 1990년대 말부터다. 청력이 떨어져 토론회에서 중언부언하는 모습을 보이자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본격적인 병마는 2001년 8월 남편과 포르투갈 마데이라 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찾아왔다. 뇌중풍으로 쓰러진 뒤 이듬해 치매 증상까지 겹쳐 심신이 급격히 쇠약해졌다. 이때부터 의사 권고로 예정된 연설을 취소하는 등 사실상 모든 공식 일정을 접었다.

2003년 6월 52년간 함께한 남편 데니스가 숨진 뒤 그의 건강은 크게 악화했다. 대처는 “그 없인 지금의 나도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딸 캐럴은 2008년 회고록에서 “치매에 남편에 대한 그리움까지 겹쳐 어머니는 종종 아버지가 숨졌다는 사실을 잊었다”고 적었다.

말년의 대처는 런던 남쪽 고급 주택가인 벨그레이비아에 위치한 4층짜리 집에서 살았다. 가정부 2명과 경호원 몇 명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신문을 읽는 조용한 일상이 이어졌다. 이따금 총리 시절 스타일리스트였던 신시아 크로퍼드, 언론 담당 수석비서 버나드 잉엄, 에너지 장관의 부인 앨리슨 워크햄, 외교정책 자문 로드 파웰, 개인비서 마크 워싱턴 등 옛 친구들이 그를 찾았다.

꽃을 든 사람 vs 맥주 파티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런던리츠호텔에는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런던 남부 대처 전 총리의 자택 앞에도 꽃과 사진을 든 추모객 발길이 줄을 이었다. 같은 시각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는 시민 300여 명이 ‘마녀는 죽었다’는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했다. 런던 브릭스턴에서는 “매기, 매기, 매기,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를 외치며 맥주 파티를 벌였다.

한 세기를 풍미한 지도자의 죽음에 전 세계가 애도하지만 대처의 죽음에 샴페인을 터뜨리는 세력도 적지 않다. 대처 전 총리는 주요 산업 민영화, 노동자 구조조정 등을 단행해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어려웠던 영국 경제를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클랜드전쟁 승리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테러에 강경히 맞서 영국 자존심을 회복한 점도 큰 공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의 ‘대처리즘’ 뒤에는 노동자의 큰 희생이 따랐다. 집권 5년 만에 실업자 수가 약 150만 명에서 320만 명으로 증가해 대처가 밀어붙인 신자유주의 정책이 양극화를 초래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대처 정권에 맞서 대규모 해고에 강력히 반발해온 영국의 전국광부노조(NUM)는 “우리는 오랫동안 대처의 사망 소식을 기다려왔다”며 “대처가 땅에 묻힐 때 그녀의 정책도 함께 묻히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독립을 주장하며 대처 정부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던 북아일랜드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1981년 수감 중이던 IRA가 단식투쟁을 벌여 1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대처 전 총리는 협상을 거부한 채 강경하게 대응했다. 그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러진다는 소식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는 “평생 민영화를 주장했으니 장례식도 민영화하라”는 의견이 쏟아지기도 했다.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은 4월 17일 준국장(ceremonial funeral)으로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치러진다. 그는 평소 국장(state funeral)이 예산을 낭비한다며 반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와 200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후도 준국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했다. 마지막으로 치러진 국장은 처칠 전 총리의 장례였다.

장례식에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여왕의 남편인 필립공이 참석할 예정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의 부인 낸시 여사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도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여왕이 왕실가족 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영국 경찰은 반(反)대처세력의 테러 가능성에 대비해 SNS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고 영국 ‘데일리메일’은 전했다.

한편 영국 출판사 펭귄북스는 장례식 후 언론인 찰스 무어가 쓴 전기 ‘되돌아가지 않는다(Not for Turning)’를 출간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어는 대처 전 총리가 살아 있는 동안 출간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료와 가족을 폭넓게 인터뷰했다.

“소리 지르는 것은 수탉, 알 낳는 것은 암탉”

△대처의 ‘말말말’

“아들 구출에 쓴 비용은 내가 지불한다. 그래야 납세자들에게 내 개인적 일에 한 푼의 세금도 낭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아닌가.”(1982년 1월 아프리카 사막에서 엿새간 실종됐던 아들의 구조비용을 납부하며)

“알래스카가 침략당해 미국이 전쟁을 벌인다면 그땐 나도 이 문제를 국제기구에 넘기겠다.”(1982년 4월부터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전쟁을 벌이던 중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국제기구를 통한 협상을 제안하자)

“전쟁은 나에게 최악의 순간이었다. 만약 영국군이 졌다면 영국에 최악의 모욕이 됐을 것이다.”(1982년 6월 포클랜드전쟁 승리 후)

“요란하게 소리 지르는 것은 수탉이지만, 알을 낳는 것은 암탉이다.”

“정치권에서 활동하면서 깨달은 것은 남자들이 결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정적들이 템스 강 위를 걷는 내 모습을 본다면 어떨까. 그들은 아마도 내가 수영을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처에 대한 ‘말말말’

“칼리굴라의 눈과 메릴린 먼로의 입술을 가진 여자.”(프랑수아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

“여성성은 그녀가 입고 있는 것이고 남성성은 그녀가 숭배하는 것이다.”(여성 작가 비어트리스 캠벨)

“대처는 섹스리스(sexless), 즉 무성(無性) 정치인이다.”(대처 전기를 쓴 작가 존 캠벨)

“정치인 중 가장 뛰어난 남성(man).”(‘더타임스’ 기자)

“대처 전 총리는 영국 경제를 살리고 1980년대 영국을 희망의 시대로 이끄셨던 분.”(박근혜 대통령)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사후에도 편치 않은 ‘철의 여인’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대처 전 총리를 연기한 영화 ‘철의 여인’의 한 장면.

“대처 전 총리의 서거로 전 세계는 위대한 자유 투사를 잃었고, 미국은 진정한 친구를 잃었다.”(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대처 전 총리는 현대사에서 가장 특출한 정치인 중 한 명이었으며 개인적 만남에서도 누구보다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대처는 냉전 기간 남편과 힘을 모아 소비에트연방(옛 소련)에 맞섰던 정치적 연인이었다.”(故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

“대처 전 총리는 1989년 유엔 총회에서 ‘국제사회가 기후변화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촉구한 최초의 지도자였다.”(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대처는 세계 여성들에게 ‘공주님’이 되는 것과는 다른 꿈, 여성이 국가를 이끌 수 있다는 꿈을 선물했다. 하지만 냉철한 재정정책을 고집해 부자들을 더 부유하게, 가난한 자를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철의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메릴 스트리프)




주간동아 2013.04.15 883호 (p50~52)

이설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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