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2

2013.04.08

그래도 공공병원 있어야 한다

국민 건강과 국가 보건의료체계 지속가능성 보장에 필수조건

  • 이진석 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 phealth@snu.ac.kr

    입력2013-04-08 09: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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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공병원이 필요한가. 이미 주위에는 병원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일부 도서벽지를 제외하면, 전국 어디서든 20~30분만 이동하면 웬만한 규모의 병원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적자투성이인 데다 민간병원과 차별화된 점도 딱히 없는 것 같은 공공병원을 애써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요즘 주위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당 병상 수는 OECD 평균의 1.5배에 이를 정도로 과잉 공급 상태다. 게다가 병상 증가세도 가장 가파르다.

    그러나 이런 통계에도, 우리나라에서 병원다운 ‘병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병원이 병원다운 구실을 하려면, 일정 규모를 갖춰야 한다. 그래야 필수 진료과목을 골고루 개설하고, 의료장비와 인력도 제대로 갖출 수 있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

    병원 과잉 속 빈곤 상태

    외국의 연구와 경험에 따르면, 특정 진료과목을 다루는 전문병원이나 요양병원을 제외한 일반 병원은 300병상 이상은 돼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병원의 약 90%가 300병상 미만의 중소형 병원이다. 이들 병원의 평균 병상 규모는 120병상에도 못 미친다. 이런 규모로는 진료과목을 제대로 갖출 수 없고, 의료장비와 인력을 적절히 운영할 수도 없다. 응급환자가 실려와도 해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중환자가 발생하면 속수무책이다.

    환자가 과잉 진료 걱정 없이 자기 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병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해 한 인터넷 매체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조사 대상자의 73%가 “평소 병·의원에서 과도한 검사나 의료행위를 한다고 느낀다”고 응답했다. 과잉 진료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 일상화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친절한 설명과 성실한 진료도 환자의 오랜 바람이다. 연이어 발생하는 각종 의료사고도 환자의 불안을 부추긴다. ‘양’은 넘치는데, ‘질’은 함량 미달이다. 물론 이런 진료 관행을 의료기관 책임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건강보험 수가가 낮은 데 따른 재정 손실을 박리다매식 진료와 비보험 진료로 대응해온 구조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보건의료정책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병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 때의 혼란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격다짐으로 정부 정책에 협조하는 체했지만, 신종플루에 제대로 대응할 만한 여건을 갖춘 병원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다행히 당시 신종플루 치사율이 높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일 치사율이 높았다면 큰 사단이 날 뻔했다. 운이 좋았던 셈인데, 다음에도 이런 운이 계속될지 장담할 수 없다. 인구 고령화로 급격히 증가하는 만성질환자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정부가 다양한 정책을 모색하지만, 일선에서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극히 미약하다.

    한마디로 과잉 속 빈곤 상태다. 그렇다 보니 의료비 지출은 가파르게 증가하지만, 정작 사회적 필요와 기대에 부응하는 양질의 의료서비스는 제공받지 못하고, 의료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불안은 커져만 간다. 국가 보건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과 거시적 효율성도 위협받는다.

    질 높고, 친절하고,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 환자가 과잉 진료 걱정 없이 자기 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병원, 그리고 개별 병원의 이익뿐 아니라 국가 전체 이익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병원. 이런 병원이 충분히 있어야 국민 건강과 국가 보건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그리고 공공병원은 이를 위한 유용한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물론 공공병원만 제구실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병원이 제구실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한 전반적인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제도가 개선되기를 넋 놓고 기다릴 만큼 사정이 한가하지 않다. 그 전에라도 공공병원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공공병원에서 좋은 모델을 만들면, 이것이 민간병원으로도 파급될 수 있고, 제도 개선을 앞당기는 힘으로도 작용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는 산적한 보건의료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공병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정부 정책은 예전부터 있던 공공병원을 단순 유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을 들여 기껏 공공병원을 만들어놓고, 이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도 없다. 최근 폐업위기에 처한 경남 진주의료원만 해도 2008년 신축 이전하는 데 국민 세금 534억 원을 투입했다. 그런데 이런 병원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없애버리려 한다. 534억 원이라는 국민의 돈을 불태우는 셈이다. 이런 세금 낭비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현재 공공병원이 국민 기대에 못 미치는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고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적자가 발생했다고 덮어놓고 비난만 하는 것도 미련한 짓이다. 우리나라 의료 환경에서 과잉 진료와 비보험 진료를 덜해서 발생한 적자는 ‘건강한 적자’다. 이런 적자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공공병원이 병원다운 구실을 할 수 있게 지원하고, 건강한 적자를 보전해주는 데는 돈이 들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돈이 들더라도 그 돈이 마중물이 돼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과 거시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면, 국가적으로는 남는 장사다.

    ‘건강한 적자’ 긍정적 평가 필요

    그래도 공공병원 있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병원비 걱정없이 치료받을 수 있는 미국 텍사스 ‘스코티시 라이트 어린이 재활병원’.

    공공병원에 대한 중앙정부의 책임성도 한층 높여야 한다. 현재는 지방 공공병원의 운영 책임을 광역 지방정부가 맡고 있다. 그런데 지방정부 처지에서는 ‘건강한 적자’조차 큰 부담이다. 병원을 관리할 수 있는 전문성도 없다. 공공병원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고사하고, 유지하는 것조차 버겁다. 언제든 기회만 생기면 공공병원을 털어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중앙정부가 적극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사안 가운데 하나가 공공병원 간 협력체계 구축이다. 지금껏 정부는 공공병원을 병원별로 관리했을 뿐, 하나의 그룹으로서 상호협력하고 지원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공공병원 간 수평적, 수직적 협력체계는 공공병원이 진료 역량과 운영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실제로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이런 공공병원 네트워크가 공공병원의 경쟁력과 공공적 기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한다. 공공병원 간 협력체계는 개별 지방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중앙정부가 나서야만 가능한 일이다.

    공공병원 자체의 혁신 노력도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공공성과 효율성은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다. 국민 세금이 들어간 공공병원은 훨씬 더 효율적이어야 한다. 훨씬 더 투명해야 하고, 책임성도 훨씬 더 높아야 한다. 비효율적이고 투명하지 못한 공공병원은 공공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으며, 지원과 투자에 대한 국민적 동의도 얻기 힘들다. 병원 구성원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한층 배가해야 한다. 병원이 제구실을 하려면 제구실을 하는 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공공병원 구성원 모두 이번 진주의료원 사태를 자기 성찰과 혁신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무책임에서 비롯한 문제를 더 무책임한 병원 폐쇄로 덮으려는 경남도의 방침은 원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 이런 근시안적 접근은 우리나라 의료의 고질적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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