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2

2013.04.08

“격려와 칭찬 후배를 춤추게 하죠”

코오롱 캐주얼본부 우먼즈센터 김정림 기획팀장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3-04-08 09: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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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려와 칭찬 후배를 춤추게 하죠”
    동그란 안경테 때문일까. 김정림(45) 코오롱인더스트리㈜(코오롱) 캐주얼본부 우먼즈센터 기획팀장(부장)은 똘똘이 스머프처럼 똑똑해 보인다. 하지만 아담한 체구와 귀여운 미소 덕에 경계심이 들지 않는다. 대화를 나눌수록 함께 공기놀이하던 동네 언니를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 든다.

    김 팀장은 현재 쿠아, 럭키슈에뜨 등 여성복 브랜드를 총괄 기획한다. 2003년 코오롱에 경력직으로 입사한 뒤 줄곧 남성복 브랜드를 맡았던 그로서는 새로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2011, 2012년 ‘시리즈’ 브랜드 매니저로서 브랜드 실적을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한 ‘성공 경험’이 있어 두렵지 않다. 그의 목표는 “코오롱이 여성복도 잘 만든다는 인지도를 쌓는 것”이다.

    물론 김 팀장은 옷을 기획하는 일을 한다. 그가 옷 콘셉트를 잡는다고 해도 옷을 만드는 건 디자이너들. 그의 역량은 이후 단계에서 더욱 발휘된다.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 가운데 매출을 이끌 전략상품을 ‘소비자 안목’으로 고르는 것이다. 스타일 20%가 매출 80%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이 과정은 기획의 ‘꽃’이다. 그는 “디자이너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만든 것 가운데 잘 팔릴 만한 옷을 골라 매출을 늘릴 뿐”이라고 겸손해했다.

    다른 사람들 좋은 점 따라 하기

    코오롱 캐주얼본부 최초 여성 팀장인 그는 어떤 사람일까.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개그맨을 꿈꿨다. 교실에서 개그 ‘고음불가’를 흉내 내면 친구들이 즐거워했고,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세상(우주) 이치를 아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천문학을 공부하기엔 실력이 모자랐다. 그때 다짐했다. “세상을 공부할 수 없다면 세속에서 잘돼보리라.”



    1987년 숙명여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에도 세상에 대한 관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숙대신보’사에서 활동하며, 교사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교직과정도 이수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남을 돕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학교 선배를 따라 이랜드 교육부서에서 일하며 사회인을 돕고자 1991년 이랜드에 들어갔다. 막상 배치받은 곳은 영업부. 하지만 푸념 대신 대안을 찾았다. 발표회 전날 불안에 떠는 어린 딸에게 아버지는 “최악의 상황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행하라”고 조언했고, 연습 덕분에 멋지게 발표를 끝낸 딸은 그 뒤로 ‘대안 찾기’를 습관화했다. 게다가 매장 점주는 이모나 삼촌뻘. 사회초년병은 점주 생계가 자신에게 달렸다는 마음으로 절박하게 일했다.

    “매장 관리를 어떻게 해야 매출을 늘릴 수 있을까 늘 고민했어요. 점주들을 돕고자 마네킹 코디도 바꿨죠. 제가 잘 따르니까 어떤 점주는 이혼문제까지 상의하더라고요. 한 번은 식당에서 봤던 사은품을 매장에서도 주면 좋겠다 싶어 아이디어를 냈는데 전사로 확대됐어요.”

    그의 성장 비결은 ‘따라쟁이 되기’. ‘부족하면 채우면 된다’는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 말투부터 발표 방법까지 두루 취하면 어느새 자신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물론 열심히 산다고 해서 실수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지금도 그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한 번은 피켓셔츠 100만 장을 생산할 때 여러 디자인으로 나오기에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어요. 마크 자수 색깔까지 일일이 설명했죠. 알고 보니 자수 색깔을 고르는 건 디자이너 업무더라고요. 그 일로 ‘잘난 척한다’고 크게 혼났어요. 그 뒤로는 어떤 일을 할 때 주변 부서와 미리 소통하려고 해요. 무엇보다 겸손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열정’과 ‘겸손’을 겸비한 덕분일까. 그에 대해 ‘뒷담화’하던 본부장이 그에게 고급 스카프를 선물하며 능력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는 1998년 회사를 그만뒀다.

    “기획팀장인 저의 미션이 명예퇴직자를 찾는 일이었어요. 망설임 끝에 결국 제가 나가기로 했죠. 그럼 두 사람은 해고하지 않아도 되더라고요. 결국 영업팀장, 본부장님도 같은 결정을 내렸어요. 그 덕에 우리 부서에는 명예퇴직자가 없었어요.”

    푸념 대신 대안 찾아 실행

    그는 경북 포항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아이를 데리고 시골로 향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소베이직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1999년부터 국내 최초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 기획총괄 담당자로서 여성복, 남성복, 액세서리, 생활 잡화를 두루 만들었다. 그때 그는 원 없이 아이디어를 실현했다. 해외 출장 갔다가 옷 사진을 매장 벽에 걸어둔 것을 보곤 한국에 와 옷 그림을 벽에 크게 그려 설명을 써 놓는 등 반향을 불러온 새로운 시도를 연거푸 했다. 2003년 회사 경영이 어려워져 퇴사하려던 찰나 코오롱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성공 경험이 있는 건 중요해요. 또 다른 성공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나에 대한 평가가 되거든요. 하지만 코오롱에 들어오니 다시 시작해야 했어요. 당시 대졸 여직원이 저밖에 없어서 회사의 구경거리였죠. 더구나 초기에 기획한 상품의 판매 실적이 저조하자 담당 상사가 7번이나 불러 책임을 묻더라고요. 그 일로 1년 동안 의기소침했죠.”

    그때 도움이 된 것은 고도원의 ‘아침편지’와 안철수의 책들. 초등학교 5학년인 큰아들과 노트에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 내용을 자주 언급했을 정도다. 그러면서 김 팀장은 다시 ‘내 일에 주인이 돼야겠다’고 다짐했고, 다행히 인생은 즐거워졌다.

    “브랜드 매니저를 하면서 뭘 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런데 어떤 분은 홍보, 어떤 분은 손익재고 관리를 잘하기에 저는 둘 다 따라 했죠. 주말에 백화점에 들러 브랜드 팀장들에게 간식거리를 건네면서 매출을 늘릴 만한 상품 홍보도 했고요. 정공법으로 한 건데 의외로 상품 홍보를 하는 브랜드 매니저는 드물다면서 좋아하더라고요.”

    편법을 모르는 그는 원칙에 충실했다. 그건 팀원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 팀장으로서 팀원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여기며 팀원들에게 “자신만의 장점을 발휘하라”고 조언한다.

    “사람은 격려해주면 더 잘하기 마련이에요. 어떤 친구는 뭔가를 잘 찾아와요. 어떤 친구는 고객이 좋아하는 디자인을 아주 잘 찾고요. 물론 그렇지 않은 친구도 있어요. 자신감이 부족해서 그런데, 작은 것부터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줬더니 지금은 아주 많이 성장했어요.”

    ‘남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김 팀장은 후배 양성에도 관심이 많다. 그가 퇴근 전 노트에 하루 일과를 반성하고 정리하는 것도 스스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서다. 그 덕분에 그의 반성 노트에는 수험생 일급 노트에 버금가는 비법이 가득하다.

    “대학 1학년 때 만난 첫사랑인 남편도 그렇고, 두 아들도 저를 자랑스러워해요. 제주에 살다 딸의 미래를 위해 서울에 둥지를 튼 친정 부모도 그렇게 생각해주시고요. 힘든 일 내색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좋게 봐주는 것 같아요. 다른 분들도 제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얻으면 좋겠어요. 저처럼 부족한 사람도 즐겁게 살잖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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