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74

2013.02.04

고전 중인 ‘고전번역’

한국고전번역원 인력과 돈 태부족, 문화보고에 먼지만 쌓여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3-02-04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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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 중인 ‘고전번역’

    이정욱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이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와 ‘북여요선’을 나란히 열어놓고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1월 29일 이정욱(44) 한국고전번역원(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은 컴퓨터 모니터에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를 띄웠다. 조선 서북지방과 만주 일대를 그린 18세기 중엽 군사지도다. 지도 이름에서 ‘피아(彼我)’는 청나라와 조선을 뜻한다. 이 연구원은 “현재 번역 중인 ‘북여요선(北輿要選)’을 이해하는 데 이 지도가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20세기 초반 함경도 유학자 김노규가 쓴 ‘북여요선’은 북간도 및 백두산 일대가 조선 영토임을 밝힌 인문지리서. 김진옥(54) 고전번역원 특수고전번역실장은 “이 책을 완역하면 중국과의 역사 및 영토 분쟁에 대응해야 할 일이 생길 때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저자가 당시 간도시찰사인 이범윤의 부탁을 받고 저술한 것으로, 현장조사와 문헌 및 사료 정리 내용이 탁월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올해부터 특수고전 번역 시작

    그동안 고전번역원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같은 관찬사료와 저명 유학자의 문집을 번역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북여요선’ 번역은 올해 새로 시작한 ‘특수고전번역’사업의 일환이다. 김 실장에 따르면 ‘대형 역사문헌과 문집을 제외한 법제, 과학기술, 의학, 생활사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자료’는 모두 ‘특수고전’이다. 올해 정부가 사상 최초로 이 분야에 예산 8억 원을 지원하면서 고전번역원 내에 김 실장을 비롯한 연구원 9명으로 ‘특공대’가 꾸려졌다.

    구성원 면면은 쟁쟁하다. 1984년 입사해 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한 박헌순(56) 수석연구원, 고전번역원 내 여성 연구원 가운데 가장 선임인 오세옥(55) 책임연구원 등이 ‘특수고전’ 번역을 자원했다. 이에 대해 박 수석연구원은 “우리나라에는 거대한 역사기록이나 위대한 인물의 문집 외에도 중요한 고전이 많다. 선인들의 사유와 당대 생활상이 담겼다는 점에서 사회적 활용도도 높은 이 책들이 그동안 큰 작업에 밀려 사실상 소외돼 있는 게 안타까웠다”면서 “최근 세계적으로 문화사, 생활사, 미시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만큼 우리도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박 수석연구원이 맡은 책은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 서얼제도 관련 연구서 ‘통색촬요(通塞撮要)’다. 그와 함께 이 책 번역에 뛰어든 하현주(43) 선임연구원은 “조선시대에 서얼이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 시대별로 정리하고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 등 각종 자료를 모아놓아, 조선시대 정치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 책”이라면서 “정조가 서얼제도를 개혁하려고 왕명으로 편찬을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하 선임연구원은 대학에서 한문학을 전공하고 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과정을 마친 뒤 성균관대대학원에서 다시 한문번역을 공부한 번역 전문가다. 하지만 정치사 분야는 그에게 생소할 수밖에 없다. 책상 위에 ‘조선 후기 서얼문학 연구’ 등 서얼 관련 서적을 쌓아놓은 채 번역에 몰두하던 그는 “배우고 배워도 늘 새로운 것이 한문번역의 즐거움이자 고통”이라면서 “특히 특수고전 분야 번역은 더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고 소개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고전번역원이 추산하는 우리나라 특수고전 양은 약 7000종, 1만6000책. 그중 번역과 정리가 필요한 책이 약 3000종, 7000책에 달한다. 김진옥 실장은 “학계 도움을 받아 가장 긴요한 것만 정리해봐도 325종이 되더라”며 “그중 올해는 ‘북여요선’을 비롯한 북방사 문헌 3종과 ‘통색촬요’ 외에 조선 법제를 기록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등 6종을 번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산술적으로 계산할 경우 ‘가장 긴요한’ 325종을 번역하는 데만 54년 이상 세월이 걸리는 셈이다.

    번역은 곧 과거의 현재화

    우리나라 최고 번역전문가가 모였음에도 이처럼 작업이 ‘더딘’ 이유는 고전번역이 단순히 문자 해독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출헌(53)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는 “고전을 번역하는 건 고전을 산출한 과거의 지적 시공간을 오늘날의 지적 시공간 속에 삽입하는 과정이자, 모두가 읽고 공유할 수 있는 지적 층위를 확충해가는 과정”이라며 “번역은 곧 ‘과거의 현재화’이자 ‘지식의 민주화’”라고 설명했다.

    고전번역원이 ‘특수고전번역실’을 만들려고 지난해 시범사업으로 진행한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번역 과정을 살펴보자. ‘사직서의궤’는 조선시대 국가 중요 행사였던 사직제 관련 기록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 국가 전례 연구의 필수 자료다. 오세옥 책임연구원 등 번역팀은 먼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사직서의궤’를 샅샅이 찾았다. 1783년(정조 7) 정조 명으로 편찬한 ‘사직서의궤’는 1804년(순조 4) 1차 증보본이 나왔고, 1842년(헌종 8) 2차 증보본을 출간했다. 전자는 규장각 소장본, 후자는 장서각 소장본이다.

    자료를 찾은 뒤 번역팀이 한 일은 수록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는 두 판본 가운데 후대에 편찬한 장서각 소장본을 저본(底本)으로 하고, 규장각 소장본을 대교본(對校本)으로 삼아 문자와 어구 이동을 철저히 교감(校勘·비교해 바로잡음)한 것. 이후 끊어 읽을 부분을 표시하고, 따옴표와 마침표 등을 달아 번역 과정 오류를 줄이는 ‘표점’ 작업을 한 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관련 자료 40여 종을 수집해 원문을 교감함으로써 문자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해석하는 데 주력했다. 김진옥 실장은 “의궤에는 건축, 복식, 음식 등 다양한 분야의 온갖 물건 이름과 전문 용어가 등장한다. ‘사직서의궤’를 번역하면서 이런 용어와 표현을 통일해 이후 의궤 번역의 기준이 되도록 하는 데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이런 과정 끝에 완성한 ‘사직서의궤’ 번역본은 1월 10일 출간했다. 연구원들은 바로 이 순간 그간의 고생을 다 잊을 만큼 큰 보람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이정욱 선임연구원은 “현대 사회에서 번역되지 않은 한문 고전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의 번역을 통해 비로소 그 책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고 이후 다양한 논문과 문화 콘텐츠 등으로 활용되는 걸 볼 때 뿌듯하다”고 했다. 실제로 2001년 1월 고전번역원이 온라인 고전종합DB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부터 우리나라에 한문 고전을 활용한 연구와 창작 활동 붐이 시작됐다. 관련 논문이 쏟아졌고 MBC TV 드라마 ‘대장금’, 영화 ‘왕의 남자’ 등 세계를 사로잡은 한류 콘텐츠도 탄생했다. 현재 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 서비스에 등록된 자료는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문헌부터 개인문집까지 다양하다. 2011년 88만 명이 찾아 1800만 페이지뷰를 검색하는 등 이용자도 많다. 조성남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2012년 3월 발표한 ‘고전번역의 수요와 가치’라는 논문에서 “한국고전번역물의 학술적 활용과 한류문화산업 활용 사례는 점차 느는 추세”라면서 “우리나라 고전번역 사업의 가치는 연간 약 586억 원”이라고 밝혔다.

    고전 중인 ‘고전번역’

    한국고전번역원 특수고전번역실 연구원들. 왼쪽부터 이정욱, 박헌순, 하현주, 손성필, 이유진, 김종태 연구원과 김진옥 실장, 남지만 연구원.

    학술연구에 비해 푸대접 너무해

    그러나 이 분야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고전번역원에 편성된 올해 사업예산은 80억 원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번역 인력 수급과 작업 진척에 어려움이 많다. 박헌순 수석연구원은 “내가 입사할 무렵에는 한학을 공부한 선배가 많았다. 이제는 대학에서 한문학, 국문학, 사학, 철학 등을 공부한 뒤 관련 분야 원전을 읽으려고 고전 공부를 시작한 이들을 중심으로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문제는 이들이 고전을 번역할 수 있는 수준의 전문성을 갖추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번역자들은 대부분 대학 졸업 후 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에서 5~7년간 추가 교육을 받고 번역을 시작한다. 지난해 고전번역연구원이 발간한 연감에 따르면, 2011년 번역 참여 인력 268명 가운데 40대가 96명(35.8%), 50대가 81명(30.2%)에 달했다. 20대는 2명(0.7%)에 불과했다. 학력도 박사학위 소지자가 136명(50.7%)으로 가장 많았고, 석사학위 소지자(36명, 13.4%), 박사 수료자(26명, 9.7%)가 뒤를 이었다. 이런 노력에 비해 보상은 크지 않다. 김진옥 실장은 “1998년 고전번역원 입사 당시 석사학위를 갖고 있었고 교육원에서 추가 교육도 받은 뒤였지만 월급이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며 “번역 자체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지 않고는 하기 힘든 일”이라고 소개했다.

    번역이 학술연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대접을 받는 것도 우수 인력의 번역 분야 진출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정출헌 교수는 “고전번역서를 연구 성과로조차 인정하지 않는 학술 풍토에서 고전번역 정착을 기대하긴 어렵다. 번역의 학술적 가치를 존중하는 학계 풍토 정착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선조가 창조해놓은 문화보고(寶庫)에는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지난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등장해 화제를 모은 ‘승정원일기’의 경우 총 4000책 분량으로, 매년 50책 정도씩 번역하는 현재 속도로 작업한다면 향후 90년은 지나야 완성본이 나온다. 김진옥 실장은 “나를 번역 길로 이끈 책이 바로 ‘승정원일기’”라면서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뒤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었는데 ‘승정원일기’를 통해 원 자료 속에 펼쳐진 무궁무진한 세계를 접하고, 그 매력에 빠져 번역을 시작했다. 그 설렘과 행복을 더 많은 이가 경험할 수 있도록 번역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인터뷰Ⅰ이동환 한국고전번역원장

    “한류의 숨은 금맥 캐지 못해 안타까워”


    고전 중인 ‘고전번역’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를 지낸 이동환(74·사진) 한국고전번역원장은 한학 전문가다. 고전번역원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 멤버로 활동하는 등 고전 해독의 가치를 줄곧 강조해왔다. 그는 “고전은 캐낼수록 빛나는 우리 지식문화의 화수분”이라며 입을 열었다.

    새로 출범한 특수고전번역실에 대해 소개해달라.

    “2010년 번역원장에 취임하면서부터 관심을 기울인 일이다. 우리 선조가 이룬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적 성과를 현대화하고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일상의 역사를 복원하면, 관련 분야 연구자와 일반인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한류 콘텐츠를 다각화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드라마 ‘대장금’은 ‘중종실록’에 몇 번 등장하는 의녀 대장금에 대한 기록에 살을 붙여 완성한 시나리오로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더 많은 고전이 번역되면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당장 가시적 성과를 내기엔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인력 부족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고전을 풀이하려면 최소한 4서5경에는 통달하고 동양 역사나 제도, 문학작품에도 조예가 깊은 번역자가 필요하다. 대학 한문학과나 한문교육과를 졸업한다 해도 4년간 70학점 정도의 한문 수업을 듣는 데 불과한 현실에서 이런 사람을 찾는 게 쉽지 않다.”

    인력을 확충하려면 어떤 지원이 필요한가.

    “일단 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을 ‘고전번역대학원대학교’로 전환해 좀 더 체계적인 한문 원전 교육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현재 고전번역교육원에서는 3년제 연수과정과 4년제 전문과정을 운영 중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 7년의 교육 과정을 마친 이들이 고전번역원에 입사해 번역 업무를 담당한다. 명실상부한 전문가인데, 사회적 인식이나 처우는 이에 크게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다. 이들이 학위를 받고 그에 합당한 대우도 받아야 우수 인력이 지속적으로 고전번역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고전번역 질을 높이고 양을 늘려 우리 문화 기반을 굳건히 하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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