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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조선시대 행궁 여행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 이현군 서울대 국토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leehyungoon@hanmail.net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행궁(行宮)은 왕이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궁궐이다. 흔히 생각하는 멋들어진 궁궐을 기대한다면 그 소박한 모습이나 황량한 터밖에 남지 않은 자취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왕이 한양을 떠나 머물렀던 곳인 만큼 행궁이 자리한 지역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더구나 서울에서 멀지 않다는 점이 큰 매력이다. 왕이 행차한 길을 따라 행궁과 행궁이 자리한 성을 돌아본다면 무심코 지나친 주변 환경이 새삼 다르게 보일 것이다.

#북한산성 행궁

유사시 비상집무 처리

20세기 초까지 온전했지만…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경기도(京畿道)에서 경(京)은 서울을 일컫는 말이고, 기(畿)는 서울을 중심으로 500리 이내 땅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경기라는 말 자체가 서울과 그 주변 지역, 현재 용어로 수도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경기도에는 여러 군현이 있었지만, 도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은 유수부(留守府)로 삼아 중앙관서처럼 취급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수도였던 개성부(開城府·세종 20년, 1438)만 유수부였다가 강화(江華·인조 5년, 1627), 화성(華城·정조 17년, 1793), 광주(廣州·정조 19년, 1795)가 잇따라 유수부로 승격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여러 군현 가운데 개경, 광주, 화성, 강화 지역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 셈이다.



행궁은 왕이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머물던 궁궐을 가리킨다. 행궁이 자리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지역이라는 뜻이다. 개경은 지금 우리가 가보기 어려우니 경기도에 있는 조선시대 행궁 가운데 북한산성, 남한산성, 수원화성, 강화로 떠나보자.

떠나기에 앞서 경기도 지도를 펼쳐보자. 그 장소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기 전 우리가 떠나려는 곳의 상대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장소와 위치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겼다.

조선시대 행궁을 찾아가는 것인 만큼 현재 서울시가 아닌, 조선시대 한양을 염두에 둬야 한다. 옛날 한양이라는 땅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도읍을 정하면서 이곳에 성(城)을 쌓았다. 한양에 성을 쌓았으니 한성(漢城)이다. 서울을 포함한 행정구역을 서울시 또는 서울특별시라고 부르는 것처럼 한성을 포함한 조선시대 행정구역 명칭은 한성부(漢城府)다. 한성부는 도성 안 지역과 도성 밖 지역을 아우른다. 그렇다면 도성 밖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옛날 행정구역은 자연을 경계로 삼았기에 도성 주변 산과 하천이 경계다. 남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한강이 있다. 동대문(서울 흥인지문)에서 동쪽으로 가면 중랑천이 나온다. 북쪽으로는 북한산, 서쪽으로는 모래내(사천)가 보인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넓게 본 한양, 즉 한성부는 북한산과 모래내, 중랑천, 한강을 경계로 한다. 현재 서울시가 동쪽 아차산과 남쪽 관악산까지인 것과 비교한다면 훨씬 좁은 범위인 한강 북쪽 지역만 한성부였던 것이다.

현재 한강변을 따라 만든 도로가 강변북로다. 강변북로를 달리다 보면 중랑천을 따라 만든 동부간선도로를 만난다. 동부간선도로는 북한산 아래 터널을 지나 월드컵경기장과 난지도 사이로 연결되는 내부순환도로에 연결된다. 강변북로, 동부간선도로, 내부순환도로를 연결하면 대략 한성부 범위다. 서울시 안에 한성부가 있고 한강 남쪽은 경기도가 되는 셈이다.

한양을 좁게 본다면 어떨까. 궁궐이 자리한 도성 안이 좁게 본 한양이다. 바로 북악산 아래다. 간혹 북악산과 북한산을 혼동하는 사람이 있는데, 북악산은 경복궁과 청와대 뒷산이다. 북악산과 대비되는 산이 남산(목멱산)이고, 북한산은 북악산 뒤쪽에 있다.

한강 북쪽에 자리한 산성이 북한산성이며, 한강 남쪽에 자리한 산성은 남한산성이다. 다시 말해, 한강 북쪽이 한성부고 한성부 뒤에 진 치고 있는 산성이 북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자리하며, 수원 화성은 한강 남쪽 관악산 너머 과천을 지나서 있다. 한강은 서해로 향하는데 서해와 한강, 임진강과 예성강이 만나는 지점에 강화가 있다.

북한산성의 상대적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가 1861년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의 ‘경조오부도’다. 이 지도에 인왕산, 북악산(백악산), 남산(목멱산), 낙산(타락산)을 연결하는 도성이 그려져 있다. 인왕산 서쪽을 보면 한북문(漢北門), 서성(西城)이 적혔고 성곽이 표시돼 있다. 산 능선을 따라가면 오른쪽에 비봉(碑峯)이 보이며, 그 오른쪽에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성이 그려져 있다.

도성 안과 밖을 연결하는 것이 성문이다. 서대문은 인왕산 남쪽에 자리한 성문이고,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있는 성문이 창의문(자하문터널 위)이다. 동대문은 낙산 남쪽에 있는 성문이며, 낙산과 북악산 사이에는 혜화문이 자리한다.

북한산은 도성 북쪽에 있으니 조선시대 성문을 통한다면 서쪽 창의문이나 동쪽 혜화문을 지나야 한다. 산을 오르는 길은 경로가 여러 개다. 능선과 계곡을 따라가기만 하면 정상에 닿기 때문에 북한산 매표소도 여러 군데다. 동대문이나 혜화문을 지나 수유동, 우이동 계곡을 통해 올라가면 북한산 백운대에 도착할 수 있다.

우이동으로 가지 않고 북한산에 오르는 또 다른 방법은 구기동을 통하는 것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버스를 타고 구기터널 입구에서 내린 다음 북한산을 오르는 길이다. 경복궁역에서 버스를 타고 자하문터널을 지나면 상명대를 만난다. 상명대 입구, 홍제천(사천) 위에 작은 문이 보이는데 바로 홍지문이다. ‘대동여지도’ 속 한북문이 바로 홍지문이다. 서성은 한양 도성의 인왕산과 북한산 비봉을 연결하는 성으로 탕춘대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상명대 앞에서 우회전해서 구기터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세검정, 세검정초등학교가 나오는데 이 동네가 신영동(新營洞)이다. 신영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구기터널 방향이고, 우회전해서 세검정길로 가면 평창동(平倉洞)이다. 신영은 ‘새로 생긴 영’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고지도에는 이 근처를 총영(摠營)이라 표시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을 지키는 관청으로 지금의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평창동의 평창(平倉)은 총융청의 군량창고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도성은 군사적 목적을 갖거나 전투를 위한 곳이 아니었다. 원래 도읍에는 궁성(宮城), 내성(內城), 외성(外城) 등으로 삼중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한성에는 궁성과 내성에 해당하는 도성만 있고 외성은 없었다. 북한산성과 서성은 조선 초기에는 없었다. 그런데 도성만 있는 상황에서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성은 군사적 방어기능에 한계를 보이고 만다. 전란을 겪은 후 조선 후기 숙종 37년(1711)에 이르러 북한산성을 새로 쌓은 것이다.

그리고 3년 뒤 숙종 41년(1715)에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려고 서성도 세웠다. 북한산에서 도성 사이에는 문수봉→보현봉→백악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문수봉→비봉→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다. 도성과 연결되는 서성은 이 두 능선 가운데 비봉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지었다. 이에 따라 한양은 조선 초기 궁성과 도성만 있던 구조에서 탈피해 도성, 서성, 북한산성으로 연결되는 성곽구조를 갖추게 됐다.

북한산성 넓이는 49만4516㎡(약 15만 평)로 한양 도성 전체 넓이 46만7922.6㎡(약 14만1550평)보다 오히려 넓다. 이 안에 행궁을 지은 건 완공 다음 해인 1712년. 유사시 도성이 함락되면 왕이 비상집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넓이 1만1388㎡(약 3450평)에 외전 및 내전 124칸 규모로 지었다. 북한산성은 도성에서 멀지 않고 강화나 남한산성처럼 강을 건너 이동할 번거로움도 없으니 행궁을 짓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안타까운 건 20세기 초까지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던 행궁이 지금은 터만 남았다는 점. 1915년 북한산 대홍수 당시 유실됐고, 일제강점기 때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제162호인 북한산성은 대동문, 대서문, 대남문, 북문 등 여러 성문과 장대가 있어 도성 방어 기지 구실을 한다.

정부는 대남문, 대성문과 가까이 있는 북한산성 행궁지를 사적 제479호로 지정하고 발굴 조사를 진행 중이다. 5월까지 왕비 처소인 내전 영역을 마친 뒤 2016년까지 임금 처소인 외전과 기타 건물지를 4단계로 나눠 발굴 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1, 4 조선왕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한성부 외성으로 쌓은 북한산성 전경.

2 북한성도(동국여도), 조선 후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3 경조오부도(대동여지도), 김정호, 1861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5 오늘날 북한산성은 서울 시민이 즐겨 찾는 등산로다.

6 경복궁, 청와대를 감싸는 북악산과 북한산 전경.

#남한산성 행궁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그날 인조 가슴은 찢어졌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삼전도 치욕의 역사가 살아 있는 남한산성 전경.

남한산성은 ‘산성’이지만 찾아가기가 참 쉽다. 지하철 8호선 산성역에서 내려 9번 버스를 타면 도착한다. 산성답게 찾아가는 길이 꼬불꼬불하지만, 길이 넓고 음식점도 많다. 남한산성을 그린 옛 지도엔 조선 후기 ‘동국여도’의 ‘남한산성도’와 1872년 제작한 ‘광주지도’가 있다. ‘광주지도’에는 남한산성이 크게 그려져 그 안에 행궁도 보인다.

명색이 경기도 광주인데 왜 이렇게 서울과 가까울까. 서울과 가까운 곳에 광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 경기도 광주였던 곳이 서울이 됐기 때문이다. 옛 지도에서 보면 한양에서 송파나루나 광나루(광진)를 건너면 바로 광주다. 광나루란 지명도 나루를 건너면 바로 광주여서 붙은 것이라는데,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해가 잘 안 됐다. 조선시대 행정구역과 지금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와 경기 하남시, 성남시, 광주시가 조선시대에는 모두 경기도 광주였다는 사실을 안 다음에는 광나루를 건너면 광주 땅이라는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일대는 1963년 1월 1일부터 서울 땅이 됐다. 필자는 그것들이 정말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을까, 하나의 영역권이 맞을까 하는 생각에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탄천을 따라 성남 모란시장까지 걸어본 적이 있다. 3시간쯤 걸렸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남한산성이 만들어진 뒤부터 1917년까지 광주군 중심부는 남한산성 안쪽 중부면 산성리였고, 성남시는 남한산성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다. 남한산성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병자호란’ ‘인조’ ‘삼전도의 치욕’이다. 조선 후기 지리서 ‘택리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한강 남쪽에 있고 중심지는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 위에 있다. 옛날 백제 시조 온조왕의 옛 도읍이었던 곳이다. 안쪽은 평평하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가 처음 왔을 때 칼날 하나 대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도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단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의식을 행했던 곳이 삼전도다. 삼전도의 도(渡)는 섬이 아니라 나루터다. 한강 북쪽 산성이 북한산성이라면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 산성이다. 산성에서 싸우다 항복하려고 한강변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삼전도비가 있는 곳에서는 나루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강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2호선 잠실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석촌호수가 보인다. 롯데월드 옆 석촌호수 서호 북쪽에 큰 비석이 있다. 이것이 삼전도비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의식을 하고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인데, 삼전도 어린이공원에서 옮겨와 세운 것이다. 옛 지도를 보면 호수 북쪽이 아니라 호수 남쪽이 삼전도에 해당한다. 석촌호수 동호 남쪽에는 송파나루터 표지석이 있다. 그렇다면 석촌호수가 왜 송파나루, 삼전나루가 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잠실은 육지가 아니라 섬이었다. 옛 한강 물은 잠실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흘렀는데 아래쪽이 옛 한강 주류였다. 잠실은 남쪽보다 북쪽과 가까운 섬이었다. 큰 홍수가 나면 물길이 바뀌기도 하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한강 물길이 바뀌었다. 지금 한강은 잠실 북쪽을 지나지만, 옛 물길은 잠실 남쪽을 지났다. 잠실 남쪽 옛 한강 주류에 있던 나루터가 삼전나루, 송파나루였다. 물길이 바뀌면서 잠실 북쪽에 새로 생긴 물길이라는 의미로 신천(新川)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잠실 남쪽 옛 한강 주류는 석촌호수로 바뀐 것이다.

경기 광주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지정됐으며 둘레는 약 11.7km다. 남한산성 남문은 지화문(至和門), 북문은 전승문(戰勝門),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이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동쪽이 오른쪽, 서쪽이 왼쪽이 되지만 한양에서 바라봤을 때 또는 행궁에서 왕이 내려다봤을 때는 동쪽이 왼쪽, 서쪽이 오른쪽이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주 출입구는 남문이다. 남문을 통해 들어오면 로터리가 있고 서쪽 방향으로 가면 행궁이 나온다. 행궁은 광해군 13년(1621) 착공해 인조 4년(1626) 완공했다. 한남루(漢南樓)가 입구에 해당한다. 행궁과 함께 있는 좌승당(坐勝堂)은 광주부 관아건물이고, 일장각(日長閣)은 광주 유수 숙소다. 행궁 일대는 1907년 불타 없어졌다가 2010년 복원했다.

산성은 능선을 따라 쌓았기 때문에 성 안쪽은 오목하다. 중앙부에서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문은 북문이다. 성곽을 따라 능선을 산책하듯이 걸어볼 만하다. 남한산성은 기본적으로 군사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북문에서 서문을 지나 남쪽으로 걷다 보면 수어장대(守禦將臺)를 만난다.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남한산성의 군사적, 방어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남한산성을 한 바퀴 돌면 서울과 광주 일대가 잘 보인다. 특히 서문 방향에서는 남산과 북한산까지 보인다. 한강 남쪽에서 한양을 지키던 산성이니 서울이 잘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남한산성을 한 바퀴 걸으면서 서울과 경기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7 2012년 복원을 끝내고 일반에 공개한 남한산성 행궁 전경.

8 조선 후기(1872) 광주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9 남한산성도(동국여도), 조선 후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0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

#수원 화성 행궁

정조가 꿈꾼 새로운 왕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서울에서 수원 화성까지 가기는 쉽다. 지하철 4호선 사당역 앞에 수원 화성 장안문 앞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수원 화성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한양 궁궐에서 출발한다면 남대문(서울숭례문)을 거쳐야 한다. 남대문을 나와 청파역을 지나면 한강을 만난다. 한강에서 배다리를 건넌 다음 용양봉저정(龍鳳亭)에서 쉬었다가 수원 화성으로 향한다. 용양봉저정에 대해서는 ‘증보문헌비고’에 “노량도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용양봉저정이라고 불렀으며 나루 건너 행차할 때 여러 임금이 잠시 머물렀으므로 좌우에 배다리와 별장소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한강대교 근처 상도터널 옆에 건물을 복원해놓았다.

조선시대에 한강을 건너 수원 화성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남태령을 지나 과천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길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시흥을 지나는 길이다. ‘택리지’를 보면 “수원 북쪽은 과천이고, 과천에서 북쪽으로 15리를 가면 동작나루가 된다. 그리고 한강을 건너 다시 북쪽으로 15리를 가면 서울 남문이 된다”라고 기록돼 있다. 동작나루터를 지나 남태령, 과천, 인덕원을 거쳐 화성으로 향하는 이 길은 지금의 지하철 4호선 노선과 유사하다.

큰길은 과천을 거치지만, 정조는 과천에 사도세자를 죽게 한 김약로의 형 김상로 무덤이 있어 꼴 보기 싫다며 시흥을 통하는 길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이 길은 노량진 장승백이를 지나 안양교(석수동), 만안교, 사근참, 지지대고개, 수원 화성을 통한다. 지금의 서울 금천구 시흥동을 거치는 길이다. 금천구를 지나는 버스들에서 ‘은행나무사거리’라는 정거장 이름이 적힌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곳에서 왕이 수원으로 가는 길에 잠시 쉬었던 행궁 관아터를 발견할 수 있다.

화성은 새롭게 수원 중심부가 됐다. 수원 옛 중심부는 지금의 화성시 태안읍에 속하는 송산리, 안녕리 일대였다. 화성 안에 행궁이 들어서고 수원의 새로운 중심부로 부상한 것은 사도세자 무덤(현륭원·顯隆園)이 배봉산(서울시립대 근처)에서 수원으로 옮겨온 1789년(정조 13) 이후다.

수원과 화성은 세 부분으로 나눠 답사하는 것이 좋다. 첫 번째로, 화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돈다. 북문인 장안문에서 팔달산, 서장대를 거쳐 남문인 팔달문을 지나 동장대, 연무대를 거쳐 다시 장안문으로 오는 경로다. 두 번째로, 화성 내부구조를 본다. 장안문에서 팔달문으로 연결되는 정조로를 걸으면서 중심지인 화성 행궁을 보고 성 밖으로 나가 수원향교까지 가본다. 세 번째로,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기 전까지 수원 중심부였던 화산 아래 융건릉과 용주사 일대를 답사한다.

이제 화성을 걸어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은 1794년 1월 착공해 1796년 9월 완공했다. 전체 길이가 5.7km라 한 바퀴 둘러보기가 어렵지 않다. 정조가 새로운 왕도를 꿈꿨던 곳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기에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북쪽 장안문에서 ‘장안(長安)’은 중국 수도 장안(서안)에서 따온 이름이다. 새로운 수도를 꿈꾸며 붙인 이름이라 생각된다. 옛 화성은 전체가 연결됐으나 지금 장안문 한쪽 어깨는 도로에 의해 끊겼다. 장안문에서 서쪽으로 가면 화서문이 나오고 이곳을 지나면 서장대다. 서장대에 서면 화성 내부 전체를 조망할 수 있으며 수원 시내도 한눈에 들어온다. 화성은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아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가장 좋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39권(정조 18년, 1794)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팔달산(八達山)에 올라 성 쌓을 터를 두루 살펴보고 상(임금)이 이르기를, 이곳은 산꼭대기 가장 높은 곳을 골라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웅장하고 탁 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

서장대에서 남쪽으로 가면 팔달문이 나온다. 사통팔달(四通八達)의 그 팔달(八達)이다. 산 이름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중심부이니 이곳에서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팔달문 근처에는 영동시장이 있다. ‘예술거리(Fine Art St)’라 이름 붙은 이곳을 걷다 보면 작은 표지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수원면·읍사무소 및 수원시청 자리. 수원의 옛 면사무소와 읍사무소 자리였다.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된 후부터 수원시청이 권선구청 자리로 옮겨갈 때까지 시청사로 사용되었다”고 적혔다. 화성이 건설된 후 이 지역이 수원 행정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표지석이다.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하천이 보인다. 수원천인데 화성 내부를 남북으로 흐른다. 한양 도성으로 치면 청계천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장안문 동쪽에 있는 화홍문이 수문 구실을 하는데 그 아래 수구(水口) 7개가 있다. 수원천은 남쪽에서는 팔달문 서쪽, 지동시장 옆을 통과해 성 밖으로 나간다.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계속 걷다 보면 동장대가 나오고, 그 아래가 연무대다. 이곳에서는 국궁 쏘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화성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장안문으로 돌아왔다면 이제 화성 내부를 걸어보자. 장안문에서 팔달문까지 뻗은 도로를 걷다 보면 ‘북수동성당, 천주교 순교성지’를 만난다.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당한 곳으로, 과거 포도청이었다. 여기서 서쪽을 바라보면 큰 누각이 있다. ‘여민각’이다. 여민각 안에 큰 종이 있으며, 한양으로 치면 종로 보신각에 해당하는 곳이다.

여민각에서 팔달산 아래로 향하다 보면 화성 행궁을 만난다.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졌고, 양쪽으로 35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화성 행궁 입구 누각이 신풍루(新豊樓)다. 답사 간 날 운 좋게도 신풍루 앞에서 무예 24기(技) 시범 공연을 볼 수 있었다. 1790년 편찬한 ‘무예도보통지’라는 무예 교범서에 등장하는 무예를 재현한 공연이었는데, 활쏘기부터 칼, 창, 권법 등이 등장해 무척 재미있었다. 공연한 무사들 머리띠에 ‘장용(壯勇)’이라 적어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정조 때 만든 국왕 직속 친위부대 장용영(壯勇營)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행궁 근처에 자리한 화성 행궁 홍보관에는 옛 지도와 사진들을 전시해놓았다. 화성 행궁 앞에서 24번이나 46번 버스를 타면 사도세자 장조 무덤인 융릉과 정조 왕릉인 건릉에 도착한다. 근처에 사도세자 넋을 위로하려고 1790년 세운 용주사가 있다. 왕릉 소나무 숲을 걷고, 용주사를 산책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11 수원 화성 화서문과 밖으로 열린 옹성.

12 조선 후기(1872) 수원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3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환어행렬도’(1795년경).

14 수원시 팔달산 정상에 있는 화성장대(서장대).

15 수원 화성의 봉돈. 자체 방어 시설을 갖춘 봉수대다.

16 화성 북쪽 수문인 화홍문.

17 고려가 몽골 침입을 피해 강화로 천도했을 당시 지은 강화성 동문.

#강화 행궁

고려시대 궁궐이던 곳

예나 지금이나 군사적 요충지

서울 신촌이나 합정동에서 버스를 타면 강화대교를 지나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 도착하지만, 강화는 섬이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과 서해가 만나는 곳이 강화다.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강화로 가려면 어떤 경로를 거쳐야 했을까. 일단 도성 서대문(돈의문)으로 나와야 한다. 서대문을 나서면 아현고개를 만나고 이곳을 지나면 한강 양화진에 이른다. 지금은 섬으로 인식되지만 조선시대에는 봉우리였던 선유봉 옆을 지나는 길이 한양에서 강화로 연결되는 대로(大路)다. 양화진을 건너면 만나는 고을이 양천현인데, 지금의 양천구와 강서구가 옛 양천현에 속한다. 양천현 흔적은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천현 향교가 있던 곳이다. 양천현에서 김포 굴포천을 지나 통진, 강화까지 대로로 이어진다.

강화를 답사하다 보면 강화산성이라고 이름 붙은 곳이 있는데, 산성이 아니라 고려 강화도성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강화중학교 옆에 있는 성문이 동문이다. 안내문에는 ‘산성’이라 돼 있지만, 평지성이고 길이도 약 7km로 한양 도성(약 18km)보다 규모는 작지만 궁궐을 둘러싼 도성이라고 볼 수 있다.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남문을 거쳐 성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용흥궁, 성공회강화성당을 만날 수 있다. 용흥궁은 철종이 왕이 되기 전 살았던 곳으로 알려졌고, 성공회강화성당은 1900년 한옥으로 세운 성당이다. 용흥궁과 성공회강화성당에서 북쪽으로 가다 보면 고려 궁궐터와 강화향교를 만날 수 있다.

강화 행궁은 고려시대 궁궐이던 곳이다. 몽골 침입을 피해 고려 고종 19년(1232) 6월부터 원종 11년(1270) 5월까지 39년간 고려 도읍지였던 곳이 강화다. 고려 궁궐이 있던 곳에 조선시대 들어 강화 유수부가 들어섰고, 그 안에 행궁이 있었던 것이다. 강화 외규장각으로도 잘 알려졌다.

강화 지도에서 높은 산을 찾아보면 혈구산(466m), 고려산(436m) 등이 보인다. 혈구(穴口)는 강화 옛 이름으로, 바다에서 들어오는 입구라는 뜻이다. 강화 행궁 서쪽에 솟은 산이 고려산이다. 나라 이름을 산 이름으로 쓰고 있다.

고려시대에 몽골 침략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삼별초군 흔적을 강화에서 찾을 수 있다. 석모도로 가는 배가 출발하는 외포리나루터 옆에 망양돈대가 자리하고, 그 아래 삼별초군 호국항몽유허비가 있다. 삼별초군이 강화, 진도, 제주에서 활동한 일을 기려 이 세 지역이 자매결연을 했는데, 그것을 기념하려고 세워놓은 진돗개상과 돌하르방도 볼 수 있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개경에서 피난 온 도읍이다 보니 강화에서는 북한 땅인 개경 남쪽을 쉽게 볼 수 있다. 강화대교에서 북쪽으로 철책을 따라 해안도로를 달리면 월곶 검문소가 나오고 그 옆에 정자가 하나 보인다. 연미정(燕尾亭)이다. 흐르는 물 모양이 제비꼬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주변 돈대를 복원해놓았고 큰 나무 두 그루 사이에 정자가 있다. 고려 궁궐이 강화에 있을 때 학생을 모아놓고 공부시켰던 곳이다. 지금은 강화 나들길 제1코스에 속한다.

강화 북쪽, 예성강과 한강이 만나는 주요 포인트가 승천보다. 화문석 문화관, 화문석 마을 북쪽이다. ‘택리지’에 “북쪽은 풍덕 승천포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강 언덕은 모두 석벽인데, 그 아래는 진흙이다. 오직 승천포 맞은편 한곳에 배를 댈 수 있다”고 나온다. 강화 맞은편이 개성 남쪽 풍덕이다. 그 풍덕 승천포에서 배를 타고 오면 강화라는 이야기다. 승천포가 강화와 개경을 연결하는 뱃길인 셈이다.

섬이라는 특수성과 군사적 거점이라는 이유에서 강화에 행궁이 자리했으며 외규장각은 물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도 있었다. 병인양요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는 전등사로 알려진 정족산성 안에 있었다. 정족산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이라고 불렀으며, 정족산성에 있는 사고라 정족산 사고라고도 칭했다.

고려가 몽골 침입을 피해 천도한 것도, 조선이 청나라 침입 때 강화로 피난하려 한 것도 섬이었기 때문이다. 강화는 병인양요나 신미양요 때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강화와 김포, 통진 사이에 흐르는 염하강에는 여러 진과 보가 들어섰다. 대표적인 곳이 초지진, 광성보, 갑곶돈대다. 일본이나 서구 세력의 침입을 막으려고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외적이 염하강을 건너 강화역사박물관이 있는 갑곶돈대를 지나면 곧 한강 입구라 한양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한강 입구 통진에 문수산성을 세웠다. 이곳에서 막지 못하면 외적은 행주산성을 거쳐 한양 양화진까지 쉽게 들이닥칠 수 있었다. 날씨 좋은 날, 강화 곳곳에 산재한 역사 현장을 답사하면서 장소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도성을 떠난 임금 왜 행궁에 머물렀을까?
18 강화도 외규장각.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소실된 것을 2005년 복원했다.

19 고려와 조선의 아픈 역사가 담긴 강화 고려궁지.

20 외규장각 의궤에 담긴 19세기 후반 ‘강화부 궁전도’.

21 조선 후기(1872) 강화 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이현군 씨는

서울대 지리교육과를 졸업하고 지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옛 한양 중심부를 답사한 ‘옛 지도를 들고 서울을 걷다’, 한양 도성 밖과 강남 지역을 다룬 ‘서울, 성 밖을 나서다’, 고구려 국내성과 평양, 백제 공주와 부여, 신라 경주, 고려 개경 등 옛 수도를 다룬 ‘옛 지도를 들고 우리 역사의 수도를 걷다’ 등 역사지리학자의 걷기 여행 특강 시리즈 세 권을 펴냈다.



주간동아 874호 (p66~75)

이현군 서울대 국토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leehyung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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