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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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풍수지리, 세계문화유산 되나

쓰촨성 랑중시, 등재 신청 국제학술대회 국가 차원서 전폭 지지

  • 김혜정 풍수지리학 박사 sutra22@naver.com

    입력2012-12-31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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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中 풍수지리, 세계문화유산 되나

    쓰촨성 랑중시에서 열린 풍수문화 국제학술대회 개막식.

    2012년 12월 중순 중국 쓰촨(四川)성 랑중(中)시에서는 풍수지리를 한족(漢族) 특유의 비물질 문화로 규정하고 유엔 산하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닷새 일정으로 열린 이 대회는 공식적으로는 국제역학연합회와 랑중시 문화연구회, 풍수문화박물관이 공동 주최했지만, 중국 중앙정부가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등 국가 차원의 큰 행사였다.

    개막식은 광장 한가운데를 거대한 나침반으로 만들어놓은 이른바 ‘나반(羅盤)광장’에서 거행했다. 주최국 중국을 비롯해 한국, 독일, 말레이시아, 프랑스, 러시아,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 참석한 각국 학자들은 이 나반 위에서 중국이 12월 9일을 ‘세계풍수문화의 날’로 제정하는 것을 지켜봤다.

    랑중시는 쓰촨성의 수도인 청두에서 자동차로 3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고도(古都)로, 청두와 충칭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전까지는 쓰촨성의 중심 도시였다. 지금의 랑중시는 당, 송 시대 때 그 기본 골격을 짰고, 청나라 때 주거지가 그대로 남은 옛 시가지를 중심으로 주위에 신시가지가 펼쳐진 구조다.

    12월 9일은 ‘세계풍수문화의 날’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랑중시는 동양의 베스트셀러 ‘삼국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한 장소가 탁현(줘저우)의 장비 집이었는데, 랑중시에서 태어나고 죽은 장비의 일생을 볼 때 도원결의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랑중시의 옛 시가지 중심에는 장비가 장렬히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지는 자리에 그의 사당과 거대한 분묘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랑중시 앞산에는 유비 사위의 사당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랑중시 문화관광국은 풍수지리를 주요 문화콘텐츠로 정하고, 무형의 풍수지리설과 유형의 랑중시 자체를 각각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킬 의욕에 넘쳐 있다. 풍수지리학 역사에서 자주 거론하는 이순풍과 원천강의 묘를 랑중시에 대대적으로 조성했는가 하면, 풍수문화박물관을 건립해 이순풍과 원천강의 간략한 전기는 물론 풍수지리의 기본 원리, 양택(陽宅) 풍수지리 활용법 등도 전시해놓았다.

    심지어 랑중시 시청을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전형적인 풍수지리 이론을 바탕으로 건축했다. 시 청사를 뒷산 형상을 본떠 건축했고, 청사 앞은 랑중 옛 시가지의 자연적 형세에 맞춰 물길이 청사를 감싸 안는 환포(環抱) 형국으로 설계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랑중시가 지리설인 풍수지리학을 들먹이면서 천문학자로도 유명했던 이순풍과 원천강, 그리고 한나라 무제 때 태초력을 만든 주역 가운데 한 명인 낙하굉을 풍수지리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에서 주요 키워드로 거론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천문역법(天文曆法)을 주관하던 이들이 랑중시를 중심으로 천문과 풍수지리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학맥을 태동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풍수지리는 천문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우리가 흔히 구사하는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같은 풍수지리 명칭은 천문 28수(宿) 가운데 중심 성좌 네 방향 주위에 떠 있는 별 무리를 각각 지칭하는 데서 비롯했다. 또 흔히 ‘패철’이라고 해서 풍수지리학의 나침반을 의미하는 나반의 방위 구도에 천문을 기반으로 한 사계절 시간대를 재연해놓은 것도 천문과 지리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사실 풍수지리학 역사를 보면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섰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 사이에 랑중시에서 활동하던 이순풍과 원천강의 천문 및 풍수 연구에 이어, 당나라 말과 오대 시기에는 천문관이었던 양균송이 강서(장시)성으로 이주하면서 ‘강서 풍수지리’가 활성화했고, 송나라 말기에는 복건(푸젠)성을 중심으로 ‘복건 풍수지리’가 세상을 풍미했다. 이후 청나라 때는 풍수지리학의 양대 이론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기풍수론’의 총정리판 ‘지리오결’이라는 책이 나오면서 그 주도권이 다시 쓰촨성으로 되돌아갔다.

    이러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랑중시이기에 자타공인 풍수지리 성지로 인정받는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랑중시 자체가 풍수지리상 길지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는데, 형제 장원급제를 두 가문이나 배출한 것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풍수지리 연구에 대한 학문적 지원 또한 우리가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앞섰다. 한국에서 천문과 풍수지리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중국 랑중시는 시 전체를 천문과 풍수 두 분야의 관계 재현 장으로 마련해놓았을 뿐 아니라 중국 학자는 물론, 세계 각지 학자가 풍수지리와 천문, 역학, 심지어 산학(算學) 연구의 장으로 활용하도록 지원한다.

    랑중시에서 이번에 거행한 풍수지리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국제학술대회는 이처럼 오랜 준비 작업을 거친 후 이뤄졌다. 랑중시의 이러한 움직임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中 풍수지리, 세계문화유산 되나
    풍수지리설로 무장한 조선왕릉

    한국에서 풍수지리학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왕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고려의 경우, 고려 창건 역사 자체가 풍수지리설과 깊은 관련이 있었고, 조선의 경우에는 역대 왕과 왕비들을 모신 왕릉을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조성했다. 아쉬운 것은 200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역대 왕릉이 나라에서 녹을 받는 전문 지관과 당시 조정 관료들이 풍수지리학을 심도 깊게 논의해 조성한 결과물이고,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됐는데도 무형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풍수지리설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번 학술대회에 동행한 김두규 우석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비보진압(裨補鎭壓) 같은 우리 고유의 풍수 논리가 한반도에서 일찌감치 자생적으로 발전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중국과 달리 독특한 우리 풍수학이 존재한다는 의미인데, 이번에 풍수지리학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중국에 빼앗기게 된 것은 뼈아픈 일이다.”

    풍수지리학은 과거 문화유산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21세기를 살아가는 현 시대에도 사람 사이에 응용되는 학문이다. 특히 건물이나 집 자리를 논하는 양택풍수의 경우, 현대 건축학과 만나 이른바 ‘돈이 되는’ 이론이 된다. 또 우리는 이런 풍수설을 지금까지 실천해온 반면 중국은 공산화 이후 맥이 끊겨버린 치명적 약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관리, 보전하는 책임을 맡은 문화재청의 중요성과 구실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이번 중국 학술대회를 통해 우리 선조가 남긴 유무형 자산에 대한 발 빠른 보호와 관리, 그리고 창의적 재전승이 무엇보다 절실함을 피부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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