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9

2012.12.31

뭐, 여의도 초고층빌딩에 불이 났다고?

김지훈 감독의 ‘타워’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12-31 11: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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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여의도 초고층빌딩에 불이 났다고?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1986년 출간한 저서 ‘위험사회’에서 성찰과 반성 없이 근대화를 이룬 현대 사회를 위험사회로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은 지진, 수해 같은 자연재해뿐 아니라 전쟁, 테러, 방사능, 에이즈, 환경호르몬 등 예측 불가능한 위험 속에 살고 있다. 산업혁명 후 부를 축적하고 첨단 과학기술이 발전했지만, 삶을 위협하는 위험은 더욱 증가했다는 얘기다. 최근 환경오염으로 인한 기상이변과 그에 따른 거대한 자연재해는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대지진과 쓰나미로 일어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원전) 사고는 현대 사회가 맞닥뜨린 위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국내에서 울리히 베크 교수의 학설이 큰 관심을 끈 건 1994년 성수대교 붕괴와 95년 삼풍백화점 붕괴 같은 대형사고가 잇따르면서다. 초고속성장과 압축적 근대화의 상징인 한국 사회야말로 위험사회의 특징이 한층 뚜렷하게 나타나는 ‘복합위험사회’라는 국내 사회학계의 진단도 있었다. 위험은 근대화에 실패한 대가가 아니라 성공한 결과이고, 후발 산업국가나 낙후된 사회가 아닌 선진국가가 당면한 상황이며,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주어진 환경이라는 것이 위험사회론의 요지다. 부와 과학기술이 위험을 가중하고, 계급에 따라 위험이 차등적으로 배분되며, 보험처럼 위험을 사고파는 상품이 일상화한 것도 현대 사회의 특징이다.

    할리우드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재난을 다룬 영화가 여전히 많이 만들어지고, 인기를 끄는 이유도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공포와 불안 때문일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2011년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 영화계에는 재난을 다룬 작품이 부쩍 많아졌다. 9·11 테러사건이 미국 영화와 대중문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듯이 ‘3·11 대지진’은 일본 영화계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한국 영화계에도 ‘괴물’ ‘해운대’ ‘7광구’ 등 최근 몇 년간 재난영화가 잇따랐다. 경제위기 때문이든 흉악범죄나 자연재해 때문이든, 삶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우리 사회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재난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자본 동원력과 영상 및 촬영 기술 발달이 재난영화 제작을 가능케 했다.

    앞선 세 작품이 한강과 바다를 소재로 한 반면, ‘타워’는 서울 한복판 초고층빌딩으로 화마를 불러온 본격 재난영화다. 여의도에 108층 높이의 쌍둥이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선다. 타워 스카이다. 최고 상류층과 고위 인사들이 사는 곳인 만큼 완벽한 보안과 초현대식 시설을 자랑한다. 때는 크리스마스이브. 입주민을 대상으로 화려한 파티를 준비하는 이곳 시설관리 팀장 이대호(김상경 분)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싱글 대디인 이대호는 파티 준비에 여념 없다.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어린 딸을 불러 멋진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낼 계획도 세웠다. 그런데 파티를 앞두고 곳곳에서 이상 징후들이 나타난다. 주방에서 작은 불이 일어났는데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건물 외벽 일부에는 균열이 생긴다. 하지만 파티를 주관하는 지배인은 이를 무시한다. 이 건물 최고경영자(CEO)인 조 사장(차인표 분)은 강풍 예보에도 최고의 크리스마스파티를 위해 헬기 이벤트를 강행한다. 크리스마스 전야, 파티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헬기에서 눈을 뿌려 대미를 장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헬기가 건물과 충돌하면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한다.

    이 영화의 직접적인 뿌리는 초고층빌딩 화제를 다룬 1974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 ‘타워링’이다. 여기에 ‘타이타닉’을 비롯한 수많은 재난영화를 떠올릴 만한 장면들이 곳곳에 포진했다. ‘타워’는 이처럼 새로운 것은 없지만, 매무새와 짜임새가 탄탄한 재난영화다. 재난이 닥치기 전 흥겹고 설레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거대한 불지옥이 된 재난 이후 상황이 명징하게 대조를 이룬다.

    뭐, 여의도 초고층빌딩에 불이 났다고?
    재난 앞에서도 계급은 있다

    주인공 격인 이대호와 어린 딸의 애끊는 사투를 비롯해 다양한 등장인물의 가슴 아픈 사연이 교차한다. 로또에 당첨돼 초호화빌딩에 입주한 행운의 주인공(이한위 분)이 있는가 하면, 안하무인 사모님의 괄시를 받아야 하는 가난한 청소부 아줌마와 ‘알바’로 밤을 새우며 등록금을 마련하는 대학생 아들 이야기도 애달프다. 이대호와 식당매니저 서윤희(손예진 분)의 로맨스도 빠지지 않는다. 사고가 발생한 이후 중심에 서는 인물은 소방대장 강영기(설경구 분)다. 소방대 후배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하는 그는 처음으로 휴가를 내고 크리스마스를 부인과 보내려 하지만, 대형 화재가 발생하자 목숨을 걸고 불 속으로 뛰어든다.

    ‘타워’는 재난을 오락 소재로 삼은 작품이지만,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풍자’를 포함하고 있다. 화려한 초고층빌딩은 모든 이가 선망하는 부의 상징, ‘욕망의 바벨탑’이다. 극중에서 거듭 암시되는 부실시공과 안전 불감증, 편법 및 부정은 비뚤어진 욕망의 증거다. 화재와 붕괴 위험 속에 버려진 수많은 사람을 두고 오로지 국회의원과 상류층을 구제하는 데만 관심을 보이는 공무원은 “재난 앞에서도 계급은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보여준다. 욕망과 이기심 그 반대편에서 자신의 임무를 충직하게 수행하는 소방관을 통해 영화는 희생과 헌신, 사랑의 위대함을 일깨운다.

    영화는 예상되는 진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등장인물 수십 명이 공간을 달리해가며 불과 물에 대항해 싸우는 과정을 매우 사실적이고 긴박감 있게 담았다. 무엇보다 재난현장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고 동원한 컴퓨터 그래픽과 26개 대규모 세트, 물과 불을 이용한 각종 특수효과가 한국 영화의 영상 및 촬영 기술의 진일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한마디로, 불과 사람이 모두 살아 있는 모범적인 재난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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