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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홍색귀족’ 태자당 전성시대!

시진핑 총서기 등 중국 각 분야 요직 장악…2, 3세 그들만의 끈끈한 관계 과시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홍색귀족’ 태자당 전성시대!

중국을 10년간 이끌어갈 시진핑(習近平)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게는 항상 ‘태자당(太子黨) 출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태자당은 공산당 내 혁명 원로나 당·정·군 고위 간부 자제들로 이뤄진 파벌을 가리킨다. 공산당에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우두머리로 하는 상하이방(上海幇)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그리고 태자당 등 3개 파벌이 있다. 중국 혁명 8대 원로 가운데 한 명이자 부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習仲勳)이 시진핑의 부친이다. 시중쉰은 1962년 반당(反黨)분자로 몰려 숙청됐다가 1978년 정계에 복귀했다. 시중쉰은 덩샤오핑(鄧小平)과 절친한 친구로, 덩에게 경제특구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인물이다.

태자당 ‘보스’ 쩡칭훙

시 총서기는 부친의 숙청으로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다. 16세 때 산시성으로 하방(下放)돼 7년간 농촌생활을 하기도 했다. 칭화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칭화대 인문사회과학원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연구해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 푸젠성 성장, 저장성 당 서기, 상하이시 당서기, 정치국 상무위원, 국가부주석, 중앙군사위 부주석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시 총서기가 승진 가도를 달린 배경에는 태자당 출신이라는 막강한 타이틀이 있었다.

태자당이 탄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78년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개방 정책 때문이다. 당시 덩은 개혁·개방 정책과 함께 인민해방군 감축 및 현대화를 강력 추진했는데, 이에 반발하는 당 고위 원로들을 설득하려고 그 자제들을 주요 보직에 기용했다. 이 아이디어는 8대 혁명 원로 가운데 한 명이자 부총리 등을 역임한 보이보(薄一波)에게서 나왔다. 보는 인민해방군 고위급 간부 출신과 당 정치국 위원의 자녀에게 당 주요 간부와 부성장, 국무원 부부장급 직위를 주자고 덩에게 건의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8대 원로 자녀들은 대부분 당 고위 간부가 됐다.

‘홍색귀족’ 태자당 전성시대!

2003년 7월 8일 노무현 대통령(왼쪽)을 접견하는 쩡칭훙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

당시 보는 자신의 아들 3명 가운데 누구를 당직이나 국무원으로 진출시킬지 고민하다가 차남을 내세웠는데, 그가 보시라이(薄熙來)다. 정치적 재능이 있던 보시라이는 이후 태자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면서 충칭시 당서기까지 올랐지만, 부인의 영국인 독살 사건과 부하의 미국 망명기도 사건 및 부정부패로 실각했다. 반면 같은 태자당이면서 보시라이와 라이벌이던 시진핑은 총서기가 됐다.



시 총서기 이전에 태자당에서 가장 출세한 인물은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이다. 쩡 전 부주석의 부친은 쩡산(曾山) 전 내무부장으로 장쩌민 주석의 양부 장상칭(江上淸)과 함께 상하이에서 항일 투쟁과 공산당 지하 혁명 활동을 했다. 모친은 1940년대 혁명 원로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한 덩류진(鄧六金)이다. 덩샤오핑은 1989년 6월 톈안먼사태의 책임을 물어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를 해임하고 상하이시 당 서기였던 장쩌민을 총서기로 발탁했다. 장은 상하이시 당 부서기였던 쩡칭훙을 베이징으로 데려갔다. 이후 쩡은 인사를 총괄하는 당 중앙조직부장을 맡아 장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면서 권력을 휘둘렀다. 쩡은 이와 동시에 중앙 정치무대에서 세력이 약했던 태자당을 단일 계파로 키우는 등 ‘보스’로 활약했다.

쩡의 최대 업적은 시진핑을 총서기로 만든 것이다. 시진핑이 2007년 제17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전대)에서 후 주석 후임으로 낙점된 것도 쩡 덕분이다. 쩡은 장 전 주석의 후계자로서 최고지도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덩샤오핑이 장 전 주석 후임으로 후 주석을 선택하자 후 주석 다음은 반드시 태자당에서 나와야 한다는 야심을 품었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장 전 주석과 후 주석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점을 교묘히 이용했다.

쩡은 공청단의 세력 확장을 우려한 장 전 주석을 설득해 후 주석의 후계자로 공청단 출신의 리커창(李克强) 당시 부총리가 아닌 시진핑을 선택하도록 했다. 그 대신 자신은 국가부주석에서 과감히 물러났다. 이후 시진핑은 쩡이 맡은 모든 직책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쩡의 지략과 정치적 수완이 없었다면 시진핑은 총서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쩡은 앞으로도 시 총서기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이자 태자당 대부로 활약할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부친들은 과거부터 잘 아는 사이였으며, 시 총서기는 어린 시절부터 쩡을 큰형님처럼 따랐다.

시중쉰-예젠잉-후야오방

시진핑 시대 개막과 함께 태자당이 중국 최고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제18차 전대(11월 8∼14일)에 이어 제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18기 1중전회, 11월 15일)에서 선출한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을 보면 태자당 3명, 상하이방 3명, 공청단 1명이다. 신임 상무위원으로는 시 총서기를 비롯해 리 부총리, 장더장(張德江) 부총리 겸 충칭시 당서기, 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당서기, 류윈산(劉雲山) 중앙선전부장, 왕치산(王岐山) 부총리, 장가오리(張高麗) 텐진시 당서기 등이다. 그중 위 당서기와 왕 부총리가 태자당 출신이며, 상하이방으로 분류되는 장 부총리도 태자당으로 간주되곤 한다. 류 부장과 장 톈진시 서기는 상하이방이다. 태자당과 상하이방은 느슨한 연대를 맺어 공청단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조직부장과 왕양(汪洋) 광둥성 서기를 상무위원에서 탈락시켰다.

위 서기의 부친 위치웨이(兪啓威)는 태자당의 ‘맏형’이라 불리며, 톈진 시장을 지냈다. 모친 판진(范瑾)은 베이징 부시장을 역임했다. 위 서기는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鄧樸方)과 ‘절친’이다. 덩푸팡이 문화대혁명 시절 고문으로 척추에 손상을 입었을 때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 사람이 위 서기다. 왕 부총리는 야오이린(姚依林) 전 부총리의 사위다. 장 부총리는 인민해방군 포병사령관을 지낸 장쯔이(張志毅) 장군의 아들이다.

태자당으로서 시진핑 시대에 요직을 맡은 인물 중에는 중앙판공청 주임에 임명된 리잔수(栗戰書)가 가장 눈에 띈다. 중앙판공청 주임은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 겸 경호실장이다. 최고지도부의 경호와 건강 관리, 통신보안, 주요 문건 작성 및 전파, 정보수집을 관장하는 등 총서기의 심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 주임의 작은할아버지는 산둥성 부성장을 지냈다. 리 주임의 후견인은 쩡 전 부주석이다. 쩡 전 부주석의 누이동생 쩡하이성(曾海生)이 리 주임의 삼촌 리장장(栗江江)과 소학교 동창이다. 군부에서는 자오커스(趙克石) 총후근부장과 장유샤(張又俠) 총장비부장, 마샤오톈(馬曉天) 공군사령원이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시 총서기의 측근이자 브레인도 모두 태자당이다. 예쉬안닝(葉選寧) 예비역 소장과 후더핑(胡德平)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상무위원은 막후 핵심 측근으로 꼽힌다. 예쉬안닝은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냈고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4인방 검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예젠잉(葉劍英) 원수의 아들이다. 예쉬안닝은 시 총서기가 군부를 장악할 수 있도록 핵심 인사들을 연결시켰다. 예쉬안닝은 또 1990∼97년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연락부장으로 있으면서 태자당 인사 3000명을 해외로 유학 보내 양성하고, 이들 명단을 시진핑에게 넘겨 친위세력으로 관리하도록 했다고 한다.

후더핑은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의 장남이다. 개혁가였던 아버지 성향을 이어받아 공산당의 지배력 제한을 주장하는 등 당내 민주화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세 집안은 끈끈한 인연으로 묶였다. 시중쉰은 1987년 후야오방이 덩샤오핑 등 원로들의 공격을 받고 실각할 때 거의 유일하게 후야오방을 두둔했다. 시진핑이 1985년 허베이성 정딩현 서기에서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으로 영전한 건 후야오방의 배려였다. 예젠잉과 시중쉰은 군에서 항일전쟁과 내전을 함께 치른 동지다.

‘홍색귀족’ 태자당 전성시대!
관시 통한 패거리 형성

현재 당·정·군·재계 등에서 요직을 차지한 태자당 출신은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태자당 상당수는 1958년 대약진운동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66년 문화대혁명 시절 시골로 쫓겨나 정치적 어려움을 겪은 경험을 공유한다. 류샤오보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과 교수는 “다른 국가에도 권력 있는 집안이 있지만 중국에선 태자당 출신이 정계와 재계 주력군”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태자당은 2세에 이어 3세까지 각 분야 요직에 진출하고 있다. 중국에선 이들을 이른바 ‘홍색(紅色)귀족’이라고 부른다. 중국인들은 붉은 빛깔을 좋아한다. 특히 황실과 귀족을 장식한 빛깔이 홍색이었다. 이런 홍색 전통을 공산당이 그대로 이어받은 셈이다.

홍색귀족은 ‘관시(關係)’를 통해 그들만의 ‘취안쯔’(圈子·끼리끼리 어울림, 패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결혼도 ‘먼당후뚜이’(門當戶對·비슷한 수준의 집안) 간 성사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부모 세대 후광을 입고 귀족처럼 생활하며, 본인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다. 중국 경제의 노른자위에도 이들 홍색귀족이 포진했다. 이들에게도 규칙은 존재한다. 부모의 영향력을 활용해 선배나 후배를 자처하면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건 기본이다. 엘리트 집단으로서 공직은 물론 각 분야에 자리했다. 중국공산당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태자당 일부는 국유기업을 중심으로 재계에서 기반을 확실히 잡았다. 리펑(李鵬)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장남 리샤오펑(李小鵬)과 장녀 리샤오린(李小琳)은 전기공학을 전공한 부친의 대를 이어 전력 관련 일을 한다. 리샤오펑은 중국 최대전력회사 화넝(華能) 인터내셔널 회장이다. 그는 화베이전력학원을 거쳐 캐나다 마니토바대학에서 공부했다. 리샤오린은 중국전력 투자공사 사장이다. 차오스(喬石)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장남인 장샤오밍(蔣小明)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광둥성 선전에서 벤처기업인 사이버시티를 경영한다. 완리(萬里)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아들 완지페이(萬季飛)는 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 회장을 맡았다. 리셴녠(李先念) 전 국가주석의 딸 리샤오린(李小林)은 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이다.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아들 주윈라이(朱雲來)는 투자은행 중국국제금융공사(CICC) 총재로 페트로차이나, 궁상(工商)은행, 젠서(建設)은행 등 중국 대표 기업의 상하이, 홍콩 기업공개(IPO)를 주도했다. 딸 주옌라이(朱燕來)는 중궈(中國·BOC)은행 홍콩법인 부총재고, 사위는 량칭(梁靑) 중국 우광(五鑛)수출입 총공사 사장이다.

시진핑, 태자당 싸움 말리다 부상?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아들 원윈쑹(溫雲松)은 2007년 사모펀드기업 뉴호라이즌 캐피털(新天域資本)을 설립해 수억 달러를 운용하고 있다. 서양 선진국의 사모펀드업체들이 중국으로 진출하려고 발버둥치는 가운데 원윈쑹이 공동 설립한 뉴호라이즌 캐피털은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중국 본토 사모펀드 호니캐피털, CDH 인베스트먼트 등을 공동 투자자로 두고 있다. 리루이환(李瑞環) 전 정협 주석의 아들 제프리 리는 GL차이나 오퍼튜니티 펀드라는 사모펀드를 설립해 운영한다.

홍색귀족 3세대는 패션, 예술 등 자유분방한 업종에서도 활약한다. 8대 혁명 원로 가운데 한 명인 예젠잉의 손녀 예밍쯔(葉明子)는 디자이너로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영국 디자인 학교인 세인트마틴스쿨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홍콩에서 디자인 컨설팅을 하다가 베이징으로 옮겨 ‘스튜디오 리걸(Studio Regal)’을 운영 중이다. 디자이너답게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한 예밍쯔는 ‘중국의 패리스 힐턴’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완리 전 전인대 상무위원장의 손녀 완바오바오(萬寶寶)는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16세 때 미국으로 유학 간 그는 19세 때 프랑스 파리 상류사회에 진출해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물론 태자당 내에서도 권력 다툼이 벌어진다. 보시라이 전 충칭시 서기는 그 누구보다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고 싶어 했다. 보 서기는 마오쩌둥을 연상시키는 홍색운동과 범죄와의 전쟁 등을 벌이면서 상무위원 자리를 노렸지만, 결국 숙청됐다. 위 상하이시 서기는 보 전 서기가 실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위 서기는 3월 열린 전인대에서 보 전 서기의 정치 노선을 강력히 비판한 바 있다. 보 전 서기는 당시 개혁·개방 정책을 폐기하고 마오 노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는데, 위 서기는 개혁·개방 정책을 계속 추진해야 중국이 발전한다고 맞받아쳤다.

보 전 서기가 낙마하자 군부의 측근 인물도 줄줄이 물러나야 했다.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유력시되던 류사오치(劉少奇) 전 국가주석의 아들 류위안(劉源) 총후근부 정치위원이 중앙 군사위원 승진에서 탈락했다. 시 총서기가 9월 2주 동안 공개 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것도 태자당 모임에서 일어난 싸움을 말리다 의자에 등을 맞아 다쳤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미국 유력지 ‘워싱턴 포스트’의 중국 전문기자 막스 피셔가 11월 1일 블로그에 이런 소문을 올렸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자당 내에서 권력을 놓고 상당한 암투가 벌어지는 건 사실이다.

태자당이 득세하면 할수록 이들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더 커질 개연성이 높다. 태자당 출신은 대부분 배타적이다. 중국 정치는 거미줄처럼 얽힌 인맥으로 유지된다. 중국에는 ‘1대에 걸친 친구, 3대에 걸친 친척’(一代朋友 三代親戚)이란 말이 있다. 오랜 친구 관계가 혈연처럼 가깝다는 뜻이다. 중국 사회가 중시하는 관시는 끼리끼리 돕자는 의미도 된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당면한 최대 과제인 부정부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공산당이 자체적으로 지난 25년간 금액 기준 100대 부정부패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1980년대 2건, 1990년대 15건이고, 나머지 83건이 2000년대에 집중됐다. 시 총서기는 앞으로 부정부패 척결에 적극 나서겠다고 강조했지만, 태자당 시대가 열린 만큼 부정부패 척결이 제대로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벌써부터 나온다. 태자당 권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주간동아 2012.11.26 864호 (p44~47)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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