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61

2012.11.05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괴물이야

조성희 감독의 ‘늑대소년’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11-05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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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괴물이야
    “이게 웬 괴물이냐?”

    영화 ‘늑대소년’의 첫 대사다. 한 노파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한탄하는 말이다. 제법 곱게 나이 든 할머니지만 그 마음속 소녀는 거울 속 주름 가득한 늙은이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라고 안 그럴까. 노화를 안타까워하며 무심코 뱉은 ‘괴물’이라는 단어가 극중 다시 한 번 변주된다. 손녀와 함께 할머니는 시골의 버려진 옛집으로 간다. 할머니가 어려서 한때를 보낸 곳이다. 손녀가 말한다. “할머니, 괴물이 나올 것 같아.” 그리고 잠시 후 관객은 정말로 괴물과 마주한다. 늑대소년이다. 할머니의 대사를 똑같이 되돌려줄 수 있겠다. “(늑대소년) 이게 웬 괴물이냐? 어디서 나타난 괴물이란 말이냐.”

    생물학적 기원을 떠나 우리 이야기의 전통에서 늑대는 단연코 외래종이다. 늑대와 인간이 결합한 상상 속 별종으로서의 늑대인간은 설화와 민담을 포함해 우리의 어떤 서사장르에도 그 뿌리가 없는 낯선 존재다. 한국 영화에도 등장한 적이 없다. 그 대신 늑대(인간)에 필적할 ‘토종’으로 여우가 있다. 전설이나 민담은 물론, 한국 영화에서도 잊을 만하면 여우가 사람으로 둔갑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인이 한을 품고 여우가 되거나,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이 되려고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1967년 심우섭 감독의 ‘처녀귀신’부터 신상옥 감독의 ‘천년호’를 비롯해 ‘사호무협’ ‘마계의 딸’ ‘여랑’ ‘춘색호곡’ ‘구미호’를 거쳐, 애니메이션 ‘천년여우 여우비’까지 여우(인간)가 등장하는 영화는 2000년대까지 꾸준히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여우는 하나같이 여성이었다.

    서구의 늑대와 한국의 여우

    여우와 달리 ‘늑대인간’은 유럽의 이야기 전통에서 기원한 존재다. ‘웨어울프(werewolf)’ ‘울프맨(wolf man)’ ‘라이칸스로프(lycanthrope)’라고 부르는 늑대인간은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오비디우스의 ‘메타모르포세스(변신담)’ 등 고대 그리스·로마 문학에서도 나타났다. 그리고 대부분 남자다. 이후 유럽 전역의 신화나 민담, 전설에 대대로 등장하며 근대 문학에서도 자주 다뤘다. 영화로는 1935년 작인 ‘런던의 늑대인간’이나 1941년 작 ‘울프맨’을 비롯해 지금까지 수백 편이 만들어졌다. 대형 흥행작인 ‘해리포터’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신드롬을 일으킨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세 주인공 가운데 한 명도 늑대인간이다.



    서구 영화나 전설 속 늑대인간은 보통 보름달이 뜨는 밤에 늑대로 변신하며, 일반 늑대보다 몸집이 크고 괴력을 지녔다. 사람을 해치거나 잡아먹고, 인간으로 돌아오면 늑대로서 저지른 짓을 까맣게 잊는다. 사람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변종도 보이고, 죽지 않고 부활하는 영생의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왜 늑대인간 설화가 끊임없이 이어졌을까. 근대 이전의 연쇄살인사건을 상징하거나 설명하려는 서사라는 분석도 나오고, 민가에 출현해 가축을 물어가던 늑대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광견병이나 낭광(狼狂·늑대라는 망상에 빠져 늑대 흉내를 내는 정신병) 같은 질병 때문이라는 풀이도 존재한다. 늑대는 흡혈귀나 좀비 등과 더불어 보통 악마적 존재로 그려지지만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제이콥(테일러 로트너 분)처럼 인간을 수호하는 구실도 있다.

    ‘늑대소년’은 한국 영화가 담는 이야기의 서구화 혹은 서구적 스토리의 한국적 차용 및 변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늑대소년’은 한 노년 여성이 떠올리는 수십 년 전 이야기다. 10대에 만났던 늑대소년과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다. 할머니가 돼 미국에 살던 김순이는 한국 옛집을 처분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자신과 꼭 닮은 손녀와 함께 귀국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흉가가 됐지만, 한때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대저택. 당시 10대 순이(박보영 분)는 폐병에 걸려 요양차 한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홀어머니, 형제들과 함께였다. 이사 온 첫날 순이는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정체 모를 짐승을 발견한다.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고 말도 못하는 늑대소년(송중기 분)이었다. 마음 따뜻한 어머니(장영남 분)가 늑대소년을 임시로 거두고, 병 때문에 자괴감과 세상에 대한 원망을 지닌 채 살던 소녀는 야성의 늑대소년을 길들이면서 차츰 그와 교감한다.

    그때 죽은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사람의 아들이자 저택을 마련해준 지태(유연석 분)가 흑심을 품고 호시탐탐 순이를 노린다. 더욱이 늑대소년이 염소를 물어죽이고 흉악한 괴물로 변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경찰이 출동한다. 동네 사람이 죽고, 늑대소년의 정체가 탄로 나면서 순이 가족과 늑대소년은 위기를 맞는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괴물이야
    한국영화의 놀라운 소화력

    늑대소년의 출생 기원도 꽤 흥미롭다. ‘6·25 전쟁 후 숲에 버려진 고아’로 추정되던 그는 알고 보니 정치적 목적으로 진행한 연구 끝에 태어난 과학의 산물이었다. 흥분하면 귀가 솟고 온몸이 털로 뒤덮이며 무시무시한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다. ‘코끼리 수준의 골밀도와 근력을 가진 초인적 괴물’이다. 쉽게 말해 ‘헐크’ 같은 존재다. 여우가 보통 ‘여인의 원한’을 상징하는 우리의 서사 전통에 견준 존재라면, 늑대소년이 지닌 외래성은 이야기 요소요소에서 드러난다.

    기원은 외래지만 ‘늑대소년’의 유려하고 능숙한 스토리텔링은 한국 영화의 잡식능력과 탁월한 소화력을 보여준다. 거슬러 올라가면 ‘도둑들’의 장르와 설정은 ‘오션스 일레븐’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 뿌리를 두며, ‘광해, 왕이 된 남자’의 가장 중요한 극적 동기는 ‘왕자와 거지’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가케무샤’, 미국 영화 ‘데이브’와 공유한다. 오락성으로 중무장한 서구적 장르영화가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내고,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 ‘피에타’가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그 한편에선 ‘도가니’ ‘부러진 화살’ ‘남영동 1985’ 같은 묵직한 사회드라마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극장가를 보면서 문득 묻고 싶어졌다.

    “한국 영화, 넌 도대체 웬 괴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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