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5

2012.07.09

1920년대 파리의 낭만을 그대에게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07-09 10: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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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파리의 낭만을 그대에게
    “만일 당신이 젊은 시절에 파리에서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린다면, 여생에선 어느 곳을 가든 파리는 마음의 축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어니스트 헤밍웨이)

    “선한 미국인은 죽어서 파리에 간다.”(오스카 와일드)

    “파리에선 아무도 구경꾼으로 남아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누구나 주연배우를 꿈꾼다.”(장 콕토)

    “미국은 조국이지만, 내 고향은 파리다.”(거트루드 스타인)

    “사랑해 파리 영원한 도시/ 맑을 때나 흐릴 때나/ 활기찬 좋은 날에도 눈물 젖어 우울한 날에도/ 난 점점 더 사랑해 파리/ 내 사랑이 있는 도시”(콜 포터, ‘사랑해 파리(I love Paris)’ 중에서)



    파티에 초대된 당신. 와인 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신사와 숙녀들 틈에서 어리둥절해하는데, 한 젊은 여인이 다가와 묻는다.

    “뭘 하시는 분이신가요?”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소설을 쓰죠.”

    젊은 여인이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며 옆에 서있던 사내를 잡아 끈다.

    “이쪽은 스콧, 스콧 피츠제럴드입니다.”

    진짜? ‘위대한 개츠비’의 그 작가? 놀라지 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콜 포터가 부르는 흥겨운 재즈 ‘레츠 두 잇(Let’s do it)’이 흐르는 가운데 피츠제럴드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소개한다. 헤밍웨이는 여성 비평가 거트루드 스타인의 집으로 그를 끌고 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인사시킨다. 피카소가 현재 사귀는 여인은 모딜리아니와 브라크와도 염문이 있었던 패션 디자이너로, 코코 샤넬 밑에서 공부 하는 중이다. 1차, 2차, 3차 술자리를 거듭하는 와중에 한 주점에서 마크 트웨인을 만난다. 옆자리에선 열띤 토론이 진행 중이다. 누구인가 쳐다보니 흥에 겨운 살바도르 달리가 루이 뷔뉘엘과 만 레이를 상대로 열심히 떠들고 있다.

    “이런 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어”

    1920년대 파리의 낭만을 그대에게
    20세기 세계 문학예술계의 ‘올스타’ 혹은 ‘드림팀’이라고 할 만한 이들이 모인 이곳은 파리다. 글 쓰고,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는 뭇 예술가들이 동경했던 곳.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이 꿈꾸는 도시. 영원한 예술과 낭만, 사랑의 도시 파리다. 그중에서도 1920년대 파리다. 피츠제럴드에서 피카소에 이르는 ‘라인업’이라면 축구에선 전성기의 펠레와 마라도나, 호나우두, 호날두, 메시가 한 팀에서 뛰는 경지라고나 할까. 20세기 전반기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한 문학예술계의 ‘오션스 일레븐’이자 ‘어벤져스’급 캐스팅이다.

    미국의 거장 우디 앨런 감독이 내놓은 신작 ‘미드나잇 인 파리’는 당신을 낭만적 환상으로 가득한 1920년대 파리로 데려간다. 75세이지만 여전히 수다스럽고 유머러스하며 정열적이고, 일면 현학적이고 냉소적이며 능청스럽고 여자를 좋아하는 우디 앨런 감독이 직접 가이드로 나선 파리여행이다. 여정은 가이드의 성격대로다.

    영화는 화보를 자처한 듯 작정하고 파리 시내 곳곳을 보여준다. 재즈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스크린엔 개선문과 각종 공원, 루브르 박물관, 노천카페, 꽃가게, 센 강의 다리들, 나폴레옹 광장, 물랭루주 등이 엽서 그림처럼 차례로 지나간다. 에펠탑의 밤풍경과 함께 노래 한 곡이 끝나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정말 끝내준다! 이런 도시는 세계 어디에도 없어. 전에도 물론 없었고. 1920년대 비 오는 파리를 상상해봐. 빗속에서 화가며 소설가며….”

    말 끝나기가 무섭게 찬물을 끼얹는 여자의 말.

    “왜 모든 도시에 비가 내려야 해? 젖는게 뭐가 좋다고?”

    남자와 여자가 파리에 왔다. 미국인 길 펜더(오언 윌슨 분)와 그의 약혼녀 이네즈(레이첼 매캐덤스 분)다. 펜더는 할리우드에서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였지만 순수문학으로 전향하고, 제임스 조이스가 카페에 앉아서 글을 쓰던 1920년대 파리를 동경한다. 반면 부호인 사업가 아버지를 둔 이네즈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결혼 후 파리에 정착하고 싶어 하는 펜더와 달리, 이네즈는 “미국을 떠나선 절대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파리여행 첫날부터 둘의 생각은 조금씩 어긋나고, 여정은 삐걱대기 시작한다.

    펜더는 프랑스에 기업 합병차 동행한 예비 장인 장모와의 식사 자리에서 정치 문제로 언쟁을 벌인다. 예비 장인이 “프랑스는 특히 정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사위가 대뜸 “제가 보기에 우파 지지자인 장인어른은 ‘미친 보수꼴통’이지만 서로 자유로운 견해를 갖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대꾸하는 식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이네즈의 친구 부부까지 그의 신경을 거스른다. 두 커플이 함께 파리 관광에 나서는데, 소르본대학에 초빙됐다는 약혼녀의 친구 남편은 말끝마다 “내가 로댕은 좀 아는데” “내가 와인은 좀 아는데” “내가 피카소는 좀 아는데” 하며 잘난 척이다. 그런 남자에게 약혼녀는 푹 빠져버렸다.

    피카소의 연인과 벨 에포크로

    ‘빈정’이 상한 펜더는 약혼녀가 친구 부부와 함께 춤추러 간 사이 홀로 거리로 나섰다가 길을 잃는다. 자정이 지나자 웬 구식 자동차가 그의 앞에 서고, 차 안의 떠들썩한 일행이 “파티에 함께 가자”며 권한다.

    얼떨결에 차에 올라탄 그가 도착한 곳은 파티장. 미국의 전설적인 작곡가 콜 포터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당대 최고의 스타 커플인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부부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수작을 부리는 그곳. 1920년대 파리다.

    처음 길을 잃은 골목에서 자정을 맞으면 1920년대 파리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그는 미국 현대문학의 출발이자 뿌리인 마크 트웨인을 만나 창작에 대한 조언을 듣고, 당대 최고의 여성 비평가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줘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피카소의 연인인 아드리아나(마리옹 코티야르 분)를 만난다. 첫눈에 서로에게 빠져든 펜더와 아드리아나는 거듭되는 만남 속에서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다.

    어느 날 두 사람 앞에 때아닌 구식 마차가 멈춰 선다. 펜더가 1920년대를 동경했던 것처럼 아드리아나가 꿈꿨던 19세기 말의 파리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좋은 시대’라는 뜻으로 풍요와 예술이 넘쳐났던 파리의 19세기 말을 가리킨다)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마차다. 물랭루주의 한 테이블에 앉아 로트레크가 스케치를 하고, 불현듯 나타난 드가와 고갱이 반갑게 인사를 하던 때 말이다. 고갱의 한마디가 압권이다.

    “이 세대는 공허하고 상상력이 없어. 르네상스 때야말로 최고의 시대였지!”

    유머와 환상이 따스하게 조화된 우디 앨런 감독의 ‘미드 나잇 인 파리’는 파리와 파리의 역사에 관한 가장 훌륭한 안내서이자 가장 낭만적인 찬가이기도 하다. 보는 내내 눈과 귀가 즐겁지만, 며칠간 와인과 파리여행 생각에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건 영화 관람 후 겪을 수 있는 부작용이다. 구석구석, 다양한 얼굴의 파리를 보고 싶다면 옴니버스 영화인 ‘사랑해, 파리’나 ‘사랑을 부르는, 파리’도 권할 만하다.

    1920년대 파리의 낭만을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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