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0

2012.06.04

“이웃 위한 행복 콘서트, 갈수록 재미있고 보람 있어요”

‘그린콘서트 10년’ 최등규 대보그룹 회장의 나눔경영

  • 조성식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2-06-04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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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 위한 행복 콘서트, 갈수록 재미있고 보람 있어요”
    최등규(64) 대보그룹 회장이 골프장을 개방해 콘서트를 열자고 했을 때 임직원 가운데 찬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주말 영업을 포기하는 것도 모자라 페어웨이를 주차장으로 쓰겠다니…. 다들 회장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겼다. 골프장 회원들도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충남 보령의 태봉산 정기를 타고난 최 회장의 뚝심은 ‘언터처블(untouchable)’이었다. 그가 옳다는 걸 직원들이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최 회장의 ‘용단’으로 시작된 대보의 그린콘서트가 10회를 맞았다. 대보 계열사인 서원밸리골프클럽은 매년 5월 마지막 주 토요일이면 골프장을 일반인에게 개방해 무료 콘서트를 연다. 처음에는 파주지역 주민을 위한 잔치였으나 지금은 전국적인 문화축제로 자리잡았다. 관람객도 해를 거듭할수록 늘었다. 첫해 관람객은 1500명이었으나 지난해에는 3만5000명에 달했다. 5월 26일 경기 파주시 서원밸리골프클럽에서 열린 10회 그린콘서트에는 전국 각지에서 약 4만 명이 몰려들었다. 퍼블릭 코스 9개 홀은 차량 5000대의 주차장으로 이용했다.

    # 골프 코스가 주차장으로 변신

    이날 행사는 오후 2시에 시작했다. 낮시간에는 벙커씨름대회, 퍼팅대회, 장타대회 등 체육행사와 더불어 페이스페인팅, 글짓기대회, 에어바운스 등 어린이를 위한 놀이가 많았다. 다양한 경품 추첨과 풍성한 먹거리, 수익금 전액을 보육원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바자회 등도 관람객을 즐겁게 했다. 오후 7시엔 엠블랙, 티아라, 백지영, 김장훈, 바비 킴, 김조한 등 유명 가수 10여 명이 출연하는 콘서트가 열렸다. 대보는 그린콘서트 말고도 각종 기부활동과 장학활동으로 “묵묵히 나눔경영을 실천한다”는 평을 듣는다.

    “하다 보니 10년이 됐다. 사실 갈수록 부담을 느낀다. 사람이 너무 많다. 주차난에 안전사고도 염려된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최 회장은 그린콘서트 10회를 맞은 소감을 묻자 요란하게 자랑할 법도 하건만 무덤덤하게 말했다. 체구가 건장하고 생김새가 옹골차다. 후덕한 인상이지만 예리한 눈빛과 단단한 안면근육으로 봐선 한 카리스마 하겠다. 피부가 좋고 건강해 보인다고 덕담을 건네자 “부모 잘 만난 덕”이라며 웃었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고 등산과 달리기를 즐기는 게 건강 비결이란다.

    1981년 창립한 대보그룹은 서원밸리골프클럽을 비롯해 10여 개 계열사가 있다. 먼저 건설 쪽으로는 회사의 기반이자 간판인 대보건설과 대보실업이 있다. 2002년엔 정보기술(IT) 분야에도 진출해 고속도로정보통신공단(현 DB정보통신)을 인수했다. 유통 부문으로는 고속도로 휴게소 13곳과 주유소 11곳을 운영하는 대보유통과 대보D·S, 보령물산이 있다.

    대보 본사는 서울 수서동에 있다. 지하에 이마트가 입점한 22층짜리 주상복합건물인데, 대보는그중 6층 전체를 임대해 쓴다. 매출 1조 원을 눈앞에 둔 중견기업이 사옥이 없는 건 최 회장의 근검절약 정신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는 대면결재 시 인조가죽이 아닌 마분지 결재판을 사용한다. 또 음식을 남기면 큰일난다. 1999년 화성휴게소 인수 당시 일화. 직원식당에서 꽃게찜이 나왔는데 일부 직원이 먹기 힘들다며 꽃게찜을 그냥 버렸다. 이를 본 최 회장이 잔반(殘飯)통에 버려진 꽃게찜을 꺼내 먹었다. 이후 대보 직원식당에선 잔반이라는 게 아예 없어졌다.

    큰아들의 양복을 불에 태운 사건도 유명하다. 최 회장은 아들 둘을 뒀는데, 신발이나 옷은 다 해져야 새것을 사주곤 했다. 큰아들이 대학 진학을 앞뒀을 때 최 회장은 입학 선물로 30만 원짜리 양복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자 최 회장의 친구가 최 회장 부인에게 “아들 양복 사줘라”며 100만 원을 줬다.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 백화점에 가서 100만 원짜리 양복을 사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최 회장은 “약속을 어겼다”며 그 자리에서 양복을 벗긴 뒤 주차장에 가서 태워버렸다.

    이런 최 회장이기에 그린콘서트를 여는 게 의아하기만 하다. 주말 영업 포기에 따른 손해와 잔디 복구 비용을 합치면 한 번 행사를 열 때마다 5억 원의 손실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익 내는 게 본령인 기업인이 왜 이런 엉뚱한 일을 할까.

    “손해 본다는 생각은 없다. 아이들이 맨발로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게 그렇게 보기 좋을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골프는 귀족스포츠로 인식돼 있다. 그린콘서트에는 골프장 영업으로 낸 이익을 주민과 함께 나눈다는 의미도 담겼다.”

    # 고향 중고교에 20년째 장학금

    “이웃 위한 행복 콘서트, 갈수록 재미있고 보람 있어요”

    5월 26일 경기 파주시 서원밸리골프클럽에서 열린 그린콘서트.

    그린콘서트만 하는 게 아니다. 여름에 가뭄이 들면 골프장 잔디에 주는 물을 나눠 인근 농지에 농업용수로 공급한다. 겨울에는 김장페스티벌을 연다. 겨울나기가 어려운 마을의 홀로 사는 노인과 소년소녀가장을 초청해 골프장 옆 연습장에서 김장을 담그고 노래자랑을 곁들인 막걸리 잔치를 벌인다. 골프장 회원도 초대한다. 김장김치는 관내 노인시설과 요양원, 장애인시설 등 11개 사회복지시설로 보낸다.

    그 밖에도 나눔경영의 사례는 많다. 고속도로 휴게소와 주유소를 가장 많이 운영하는 기업답게 매년 고속도로 건설공사를 하다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한다. 각 계열사는 해당 지역의 보육원과 경로원, 장애인 보호시설, 적십자 등을 대상으로 활발한 기부활동을 한다. 사내 여직원회는 매월 바자회와 직원 작품전, 일일호프 등을 통해 모은 돈을 불우이웃돕기에 쓴다. 2009년 최 회장은 사재 21억 원을 들여 모교인 충남 대천고에 기숙형 학급관인 대보영재관을 건립해 기증했다. 4월엔 서울대병원에 의학발전기금으로 3억 원을 내놓기도 했다.

    “나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과거의 나처럼 고생하는 학생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고향 마을 중고교 학생들에게 20년째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대보는 들여다볼수록 재미있는 회사다. 이 회사에서는 뚱뚱한 직원을 찾기 힘들다. 회장이 살을 빼주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고? 비만한 직원은 최 회장과 마주치면 언제까지 몸무게를 줄인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최 회장은 수첩에 직원 이름과 몸무게를 기록해놓고 나중에 반드시 약속 이행을 확인한다. 못 지키면? 인사 불이익은 없지만 기간을 연장하기 때문에 지키지 않고는 못 배긴다.

    최 회장이 신나는 표정으로 수첩을 꺼내들고 설명했다.

    “뚱뚱하면 건강에도 안 좋고 일하는 데도 지장이 있다. 딱 보면 안다. 지금도 내 수첩에 직원 한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85㎏인데 연말까지 75kg으로 줄인다고 약속했다. 때가 되면 해당 부서장이 그 직원의 몸무게를 확인해 사진으로 찍어 보고할 것이다. 약속을 지키면 상을 준다. 회사에서 살을 빼주니 가족이 좋아하고 고마워한다.”

    그는 직원 중매에도 앞장선다. 노총각들과 골프장 여직원 간 단체 미팅을 주선한 적도 있다.

    “현재 40세 안팎의 노총각이 세 명 있다. ‘올해 안에 장가 못 가면 나한테 인사하지도 마라’고 했다.”

    기자가 “왜 꼭 결혼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가정이 안정돼야 회사에서도 일을 잘한다”는 고리타분한 답변이 돌아온다. 그런데 왠지 그 마음 씀씀이가 정겹다.

    대보 직원들은 매년 6월 한강을 끼고 달려야 한다. 회사 창립기념일에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기 때문. 달리는 거리만큼 돈을 적립해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는다. 10km를 달리는데, 많이 뒤처지면 1~2km를 다시 뛰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6월에 뛰려면 4월부터 훈련해야 한다. 낙오는 허용되지 않는다. 걸어서라도 완주해야 한다.”

    꼭 군부대 지휘관 같은 말투다. 가을이 되면 전 직원이 지리산 등정을 한다. 중산리에서천왕봉에 올랐다가 장터목을 거쳐 백무동으로 내려오는 무박2일 야간산행이다.

    본사 직원들은 점심시간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물론 직원 건강을 생각하고 전기를 아끼려는 최 회장의 지시 때문이다. 그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다 나한테 걸리면 지하 2층에서부터 지상 10층까지 20바퀴를 돌린다. 총무부 직원이 (횟수를) 확인해 나한테 보고한다.”

    언뜻 군대식 문화로 비친다. 개성 강한 신세대 직원에게 이런 문화가 통할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입사 전 우리 회사에 대해 알고 들어오는 신입사원은 이를 회사 문화로 받아들이고 금방 적응한다. 오히려 경력직으로 들어온 사람이 힘들어한다. 여러 회사가 우리의 회사 문화를 벤치마킹했는데 성공하지 못하더라.”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최 회장의 어릴 적 꿈은 농장 주인이었다. 힘들게 농사짓는 부모를 지켜보며 젖소 농장을 경영해 부농(富農)이 되겠다는 야망을 키웠다. 하지만 고교 졸업 후 어려운 집안형편 탓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서 농장에 대한 꿈도 접었다.

    # 1대 7 ‘EMI 혈투’ 벌어져

    1960년대 후반 그는 보리쌀 한 말이 든 자루를 어깨에 메고 무작정 상경(上京)했다. 광화문 뒷골목에 셋방을 구하고 껌팔이, 신문배달로 생계를 이어갔다. 한편으로는 종로 EMI영어학원를 찾아가 문지기 노릇을 하면서 못다 한 공부를 했다. 여기서 전설과도 같은 ‘EMI 혈투’가 벌어진다. 그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기도(문지기)를 맡으니 주변 폭력배가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어느 날 7명한테 두들겨 맞았다. 그 뒤 관철동 포목상 앞에서 그 7명과 다시 붙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맞섰다. 하지만 혼자선 역부족이었다. 인근 식당의 주방에 뛰어들어 칼을 들고 나와 휘둘렀다. 그러자 다 도망갔다. 마음이 안 놓여 이틀간 칼을 차고 돌아다녔다. 이후 관철동 일대에서 주먹 좀 쓰는 친구들을 다 휘어잡았다.”

    기자가 웃음을 참지 못하자, 그가 한술 더 떴다. 오른손바닥의 딱딱한 근육을 내보이면서 “이걸로 나무고 벽돌이고 다 깼다”고 호기롭게 말했다. 원래 싸움을 잘했느냐니까 고개를 내저었다. 어릴 때는 온순했는데 서울로 온 뒤 살아남으려고 성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의 첫 사업은 독서실 운영이었다. 한 군데로 시작해 다섯 군데까지 늘렸다. 시골의 조그마한 땅을 팔아 사업자금에 보탰다. 이렇게 모은 돈을 아파트와 상가에 투자했다. 강남 개발 붐이 일던 시절이었다. 그는 권리금을 얹어 팔고 다시 구입하는 방식으로 아파트와 상가를 늘려나갔다. 한때 잠실주공아파트를 83채나 확보할 정도로 부동산업계의 큰손이 됐다. 그가 물건을 내놓으면 서울 시내 아파트 값이 내려갈 정도였다.

    하여간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 했다. 오퍼상도 하고 거버 이유식 총판도 했다. 스포츠 쪽으로도 눈을 돌려 스키용품업체 노르디카의 국내 대리점을 열고 스쿠버다이빙 장비인 US다이버를 국방부에 납품했다. 당시만 해도 외국 스포츠 장비를 수입해 국내에 파는 건 거의 독점적이었다.

    이 모든 것을 20대 중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뤘다. 그는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학업의 한을 풀었고 교수 소개로 평생의 반려자도 만났다. 그야말로 장밋빛 인생이었다. 여름엔 스킨스쿠버와 행글라이더를, 겨울엔 스키를 즐겼다.

    하지만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성공이 있으면 실패가 있는 게 인생의 이치 아닌가. 촉망받는 젊은 사업가를 하루아침에 알거지 신세로 전락시킨 것은 화강석이었다. 1980년대 초 일본에 건설 붐이 일었다. 그에 따라 건축 마감재인 화강석을 수출하는 사업이 각광받았다. 그는 전북 익산의 산을 구입해 채석장을 냈다. 여기서 나오는 화강석을 일본에 수출했다. 한동안 재미를 봤으나 예기치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캐내면 캐낼수록 갈라진 틈이 많고 색깔이 변질되는 등 함량이 떨어지는 화강석이 나왔다.

    전 재산을 쏟아부었기에 눈앞이 캄캄했다. 어음을 발행하고 은행과 주변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빌렸지만 이미 침몰하는 배였다. 결국 부도가 났고 인부 노임도 주지 못할 정도로 다급한 처지가 됐다.

    “정말 쫄딱 망했다. 인부들이 노임 달라며 내 목에 삽을 들이댔다. 집도 없어져 사글셋방에서 살았다. 아들 한 명은 시골로, 또 한 명은 처가로 보냈다. ‘내가 맨주먹으로 서울에 올라가 성공했는데 이걸 못 이기겠느냐’며 이를 악물었다. 이후 하루 4시간씩 잤다.”

    나락에 빠진 그를 구한 건 건설시공이었다. 청주공항 활주로공사를 따낸 뒤 국방부와 상무대 공사가 밀려들었다. 이를 발판으로 한국도로공사 휴게소 입찰에도 뛰어들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재기에 성공한 것은 많은 기업이 무너지던 외환위기 때다. 현금 확보와 무차입 경영이 비결이었다.

    “비가 올 때 우산을 뺏어가고 가물 때 우산을 갖다주는 게 은행이다. 화강석으로 실패한 뒤 분수에 맞는 경영을 철칙으로 삼았다. 군살을 빼고 내실 있게 운영했다. 그렇게 하자 직원 복지가 좋아졌고 인재도 더 모였다.”

    그는 기업철학을 묻자 “그런 건 없다”며 겸손해했다.

    # 투명한 기업, 솔선수범 리더십

    “이웃 위한 행복 콘서트, 갈수록 재미있고 보람 있어요”
    “이웃과 더불어 사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 지난 주말 그린콘서트 때 처음으로 아이들로부터 사인과 촬영 요청을 받았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재벌기업의 폐해에 대해 묻자 “점차 사회가 투명해지기 때문에 투명하지 못한 기업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에둘러 비판했다. 오늘날 대보그룹이 특별한 노사분규 없이 알짜배기 기업으로 탄탄대로를 걷는 데는 최 회장의 솔선수범형 리더십이 큰 구실을 했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1995년 최 회장이 옥산휴게소 화장실 바닥을 손수 닦은 일은 국내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문화에 혁신을 일으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휴게소 인수 후 시설을 둘러보던 그는 불결하기 짝이 없는 화장실을 보고 직원들에게 청소를 지시했다. 하지만 ‘화장실은 더러운 장소’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직원들은 적당히 넘어가려 했다. 보다 못한 그가 직접 수세미를 들고 세제를 풀어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당황한 직원들이 동참했고, 이날 옥산휴게소 화장실은 완전히 새롭게 탄생했다. 이후 대보유통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 관리책임자의 이름을 써 붙이는 실명제를 도입했다.

    최 회장의 집무실은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근검절약 정신에 걸맞게 아담하고 소박하다. 책상은 여느 기업 과장급이나 부장급이 쓸 만한 크기다. 회의용 탁자도 작고 의자도 대여섯 개밖에 되지 않는다. 전국 고속도로 휴게시설이 표시된 대형지도가 유일한 장식품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가 강조한 것은 언론에 대한 당부였다.

    “후손이 잘 살 수 있도록 우리가 길을 잘 닦아놓아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언론도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보도를 많이 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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