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7

2012.05.14

무기 제조업자에게 ‘빅엿’을 먹여주마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믹막 : 티르라리고 사람들’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05-14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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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기 제조업자에게 ‘빅엿’을 먹여주마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6년 발표한 4집 앨범에 이런 가사의 노래가 있다.

    “천구백구륙, 아직도 수많은 넋이 나가 있고/ 모두가 돈을 만들기 위해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걸 볼 수가 있었지/ (중략)/ 지금 우리는 누굴 위해 사는가/ 그에게 팔과 다리와 심장을 잡힌 채/ 넌 많은 걸 잃어가게 됐네/ 우리의 일생을 과연 누구에게 바치는가….”

    ‘1996,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라는 제목의 노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는 모든 범죄와 살인을 만들었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을 죽이고 있어, 전쟁 마약 살인 테러 그 모든 것을 기획했어”라며 지구는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돼버렸고, 거기서 우리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해, 끌려다녀야 하는데”라고 읊는다.

    “당신, 너무 많은 걸 가졌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 1990년대 중반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애통해할 때 다른 나라의 약자라고 숨죽이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특히 영화계에서 ‘지구를 정복한 그들’에게 ‘빅엿’을 선사할 묘안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빅엿’이란 ‘골탕 먹이다’라는 뜻의 속어 ‘엿먹이다’에 영어 빅(big)을 붙여 그 의미를 강조한 인터넷 은어다.



    독일 영화 ‘에쥬케이터’(2005)에서 3명의 청춘남녀는 ‘가진 자’의 집에 무작정 들이닥쳐, 주인이 없는 사이에 가구며 집기를 한바탕 들었다 놓는다. 이를테면 소파를 수영장에 처박고, 명품 가방을 냉장고 속에 던져 넣는 식이다. 무단침입 죄를 비켜갈 순 없지만 폭력을 쓰거나 도둑질을 하지는 않는다. 최상류층의 고급 주택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이들은 메모 한 장을 남기는 것으로 임무를 완수한다. “당신은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에쥬케이터(Edukators)’라고 서명을 남긴다. 자신들이야말로 부당한 세상을 바로잡는 진지한 ‘교육자들’이라고 자처하는 것이다.

    지난해 개봉한 미국 영화 ‘타워 하이스트’는 몇 년 전 미국 월가를 뒤흔들었던 버나드 메이도프의 다단계 금융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실상은 악덕 투자자인 월가의 거물에게 평생 모은 돈을 떼인 서민의 복수극을 유쾌하게 다뤘다.

    평범한 샐러리맨의 울분과 로망을 영화로나마 해소해주는 작품도 있다. 제목부터 노골적이다.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2011). ‘끔찍한 상사들(Horrible bosses)’정도로 해석할 만한 원제를 피부에 와닿게 의역했다. 영화는 평생 칼 출근해온 부하직원이 어느 날 2분 지각했다고 해고를 운운하며 위협하는 사장, 말끝마다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며 끈적끈적한 눈길로 음담패설을 지껄이는 성희롱 전문 여자 상사, 안하무인에 인간 말종인데도 사장 아버지를 둔 덕에 회사를 물려받게 된 재벌 2세 등에게 “완전 또라이” “미친 악녀” “인간쓰레기”라고 욕하며 호기롭게 포문을 연다. 각기 다른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남자 3명이 서로 상대방의 상사를 죽여주기로 공모하는 내용이다.

    5월 10일 개봉한 프랑스 영화 ‘믹막 : 티르라리고 사람들’이 ‘빅엿’을 선사하자고 마음먹은 대상은 무기제조업자다. 밑바닥 인생을 대물림한 바질(대니 분 분)이라는 남자 이야기로 시작된다. 바질은 어린 시절 지뢰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우연한 사고로 머리에 총을 맞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총알이 머리에 박힌 채로 살아간다.

    사고로 직장과 집마저 잃고 거리를 전전하던 바질은 “평생 감옥에서 썩은 사형수지만 형 집행 날 단두대가 고장나 기적처럼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깜빵맨’(장 피에르 마리엘 분)을 통해 티르라리고라는 동굴에 숨어 사는 괴짜들을 만난다. 입만 열면 독설이지만 오갈 데 없는 자들을 거둬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는 ‘빅마마’를 위시해 몸을 뒤로 젖히면 뒤통수와 발뒤꿈치가 닿는 ‘고무 여인’, “쏴만 다오. 어디든 날아갈 테다”라고 자신하는 ‘인간탄환’, 말도 안 되는 사자성어를 지껄이면서 컴퓨터와 키보드를 끼고 사는 ‘인간타자기’, 세상 모든 고철이 작품 재료인 ‘발명왕’이 그들이다. 세상 눈으로 보면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을 낙오자이며, 기괴한 취향을 지닌 비정상인이자 괴상한 재능을 자랑으로 여기는 기인들이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순수하다.

    유쾌한 반전(反戰) 영화

    고독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이자 동료를 만난 바질은 마침내 용기를 내 아버지를 죽게 한 지뢰제조사와 자신의 머리에 든 총탄을 만든 제조업체를 상대로 복수에 나선다. 이때부터 무기제조업자들은 세상을 구원할 ‘아이언맨’이 아니라 인간을 파괴하는 악당에 불과하고, 티르라리고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왕따’가 아니라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할 최고의 요원으로 바뀐다. ‘발명왕’은 고철로 ‘007’ 이상의 성능을 자랑하는 신무기를 만들어낸다. ‘고무 여인’은 어느 공간이든 자유자재로 몸을 구부려 숨어든다. 숫자에 능한 ‘인간계산기’가 시간과 거리를 측정하면 대포에 장전한 ‘인간탄환’이 날아간다. 바질은 작전을 짜고, ‘인간타자기’는 무기제조업자들의 비리를 유튜브에 폭로한다.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은 ‘델리카트슨 사람들’과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에일리언4’ ‘아멜리에’ ‘인게이지먼트’ 등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묵시록적인 사회를 배경으로 규범이나 상식으로부터 이탈한 괴짜, 기인들의 이야기를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려왔으며 문명 비판적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얼핏 영상이나 색채가 어둡고 기괴해 보이지만 재기 번뜩이는 유머나 순수한 사랑, 가슴 훈훈한 휴머니즘이 작품 전반을 감싼다.

    ‘믹막 : 티르라리고 사람들’은 장 피에르 주네감독이 만든 작품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어법을 보여준다. 액션, 드라마, 코미디, 로맨스, 스릴러, 사회 비판을 잘 버무린 수작이다. 유쾌 통쾌 상쾌한 반전(反戰) 영화다. 대니 분을 비롯한 배우가 대부분 국내 영화팬에겐 낯설지만, 유럽과 프랑스에선 지명도가 대단하다. 얼마 전 국내에서 개봉한 ‘언터처블 : 1%의 우정’에서 흑인 도우미로 출연했던 오마르 사이가 ‘인간타자기’ 배역을 맡아 특유의 능청스러운 코믹 연기를 보여준다. 개성적인 외모로 ‘인간탄환’을 연기한 도미니크 피농은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하는 분신 같은 배우다.

    제목 ‘믹막(micmac)’은 ‘음모’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티르라리고(tire-larigot)’는 극중 고철판매업자가 사는 동굴 이름이자 쓰레기 수거 단체 이름인데, ‘많이’를 뜻하는 숙어(a?tire-larigot)이기도 하다.

    무기 제조업자에게 ‘빅엿’을 먹여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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