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9

2012.01.02

최동원 vs 선동열 그 명승부의 추억

박희곤 감독의 ‘퍼펙트 게임’

  • 이화정 씨네21 기자

    입력2012-01-02 1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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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동원 vs 선동열 그 명승부의 추억
    우리 모두의 기억에 각인된 현대사 일부를 반추한다면 그 색깔은 처한 상황에 따라 모두 다를 것이다. 그게 프로야구라면? 한국 프로야구 30년사의 한 지점을 끄집어내 그걸 걸러서 스크린에 재연한다면? 하나의 경기를 두고서도 저마다의 기억은 모두 다를 것이다. 특히 해태, 롯데, 삼성 팬은 각자의 처지와 태도가 있을 것이다.

    야구 문외한인 필자조차 초등학생 시절 유니폼이 예쁘다는 이유로 OB베어스 어린이 야구단에 들어가볼까 생각했더랬다. 커서는 야구장으로 데이트 하러 가서 남의 팀 응원가 한 번쯤은 불러본 추억을 갖고 있다.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밥을 먹을 땐 누구든 야구 이야기는 꼭 하고 넘어가기 십상이다.

    그러니 영화 ‘퍼펙트 게임’이 최동원, 선동열을 앞세우고 나왔을 때 어디 환호만 있었을까. 한국 야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을 스크린에 불러온 것 자체가 이미 질책을 감수할 위험요소를 안고 출발한 셈이다. 그럼에도 잘만 되면 이게 보통의 드라마로 끝날 게임은 아니다.

    따져보자. 최동원과 선동열의 대결은 일단 수치와 통계로 기록된다는 야구의 일반 룰로는 도무지 재단할 수 없는 세계다. ‘무쇠팔’ 롯데 최동원은 1984년 MVP를 수상한 야구 영웅. 최동원의 후배이자 ‘무등산 폭격기’로 불린 해태 선동열 역시 1986년 MVP를 거머쥔 실력자다. 실력을 떠나 각각 부산, 광주 출생에다 연세대와 고려대를 졸업해 이미 태생부터 라이벌 구도였다.

    두 사람에겐 롯데와 해태의 대표 주전 투수라는 부담이 항상 따라다녔고, 팀이 곧 지역을 대변하는 메가톤급 경쟁의 세계에서 상징적 인물로 통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부산 가서는 해태 껌도 찾지 말아야 한다’는 지역감정이 발화점까지 끓어올라 극에 달했던 1980년대 이야기다.



    1987년 5월 16일 한낮의 부산 사직구장. ‘퍼펙트 게임’이 기록하는 과거는 바로 고(故) 최동원과 선동열이 선수로 재직하던 시절이다. 앞서 두 번의 대결에서 각각 1승씩을 나눠 가진 두 선수는 세 번째 선발 맞대결을 벌인다. 총 4시간 56분의 승부. 연장 15회까지 가는 사투에도 결과는 2대 2 무승부, 상대 전전 1승1패1무를 기록한다. 최동원은 이날 60명의 타자를 상대로 209개 공을 던지고, 선동열은 56명의 타자를 상대로 232개 공을 던진다. 이는 일반적인 투구 수 120개에 2배 가까이 되는 엄청난 수치로,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영화는 야구를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믿기 힘든 역사적 승부의 날을 기록한다. 그야말로 전력투구다.

    경기 외에도 1980년대 전 국민이 야구에 환호하던 시절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긴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역시 과격파 롯데 팬들의 행태. 육두문자는 기본이고, 실제 일어났던 선수단 버스 방화사건이 재연되기도 한다. 선수끼리의 알력도 확인할 수 있다. 최동원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가는 걸 마뜩지 않게 여기는 동료 타자가 있는가 하면, 선동열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만년 포수의 비애도 그려진다. 여기에다 프로야구 붐에 편승하려는 미디어와 국민의 열망을 정치적 목적으로 끌어올리려는 정치권의 잇속도 함께 담긴다.

    최동원 vs 선동열 그 명승부의 추억
    조연들의 활약과 함께 이들 곁가지 스토리의 리듬감이 좋다. 각 캐릭터가 웃음, 감동을 하나씩 완수해나감으로써 영화를 다채롭게 한다. 야구 영화에서 으레 그려질 만한 풍경과 때로는 과하다 싶을 만한 설정도 속출한다. 그래서일까. 이 과잉의 에너지가 경기의 긴장감과 어우러져 마치 그날의 경기를 보러 사직구장에 온 듯한 묘한 착각에 빠져든다.

    실감 나는 경기 장면을 연출하려고 ‘퍼펙트 게임’에서는 특수카메라를 여러 대 사용했다. 시속 150km에 가까운 광속 투구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이나, 야구 배트와 글러브에도 특수카메라를 설치해 포수의 미트 속으로 빨려드는 야구공까지 잡아낸 장면은 새로운 볼거리다.

    그럼에도 야구경기 자체를 즐기려는 관객에게 ‘퍼펙트 게임’ 속 승부 장면은 다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실제 야구경기에서 나올 법한 작전이나 플레이와 관련한 장면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게임에 임하는 두 선수의 심리적 변화다. 자존심을 건 대결을 앞두고 갈라진 손가락에 본드를 붙이고, 다친 어깨를 애써 감춘 채 포기하지 않는 내적 긴장감이 두 선수의 표정에 고스란히 반영돼 경기 장면을 빽빽이 채워나간다.

    최동원과 선동열 두 선수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온 조승우, 양동근의 연기 맞대결 역시 영화 제목처럼 퍼펙트 게임이다. 야구선수라는 캐릭터로 변하려 두 사람은 진력이 나도록 야구 연습을 했다는 후문이다.

    최동원 vs 선동열 그 명승부의 추억
    최동원 선수 역의 조승우는 “전날 공을 100개 이상 던지고도 다음 날 진통제를 맞은 뒤 또 던질 만큼 야구가 좋았고, 파묻혀 살았다”고 회고했다. 선동열 선수 역의 양동근은 “풍채가 좋은 선동열 감독님을 연기하기 위해 즐겁게 먹고 살을 찌웠다”며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공 던지는 연습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작은 체구의 조승우가 어떻게 야구선수 최동원을 연기했을까 하는 걱정은 조승우의 등장 자체로 사라질 것임을 보장한다. 금테안경을 쓰고 등장하는 그 순간부터 조승우는 최동원 선수의 외형과 말투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배우 김윤석에게서 부산 사투리를 배웠다는 그는 연기라기보다 ‘빙의’에 가까운 전율을 선사한다. 그는 이번 작품으로 연기의 어떤 단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인다.

    ‘퍼펙트 게임’은 강우석 감독의 ‘글러브’와 김상진 감독의 ‘투혼’ 등 최근 들어 부쩍 많아진 스포츠 영화, 특히 야구 영화의 붐을 이었다. 야구가 단순히 영화 소재로만 사용되지 않고 야구선수들의 꿈과 도전까지 담아 본격적인 야구 영화로서의 면모도 충분히 갖췄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영화화할 수 있는 멋진 선수와 두고두고 되새김질할 만한 멋진 승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퍼펙트 게임’을 봐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박희곤 감독이 영화로 만드는 것을 허락받으러 간 자리에서 최동원 선수는 “됐고, 야구 발전을 위해서라면 뭘 해도 좋다. 제대로 만들라”라며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그가 ‘퍼펙트 게임’을 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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