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8

2011.12.26

Again! 아문센 모험정신

남극점 도달 100주년 각종 도전과 이벤트 한창… 에스키모와 염문 ‘후손의 비밀’도 화제

  • 밴쿠버=황용복 통신원 hyb430@hotmail.com

    입력2011-12-26 10:2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011년 12월 14일은 불세출의 탐험가 로알드 아문센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남극점에 도달한 지 꼭 100주년이 된 날이다. 아문센의 도전정신을 기리려는 이벤트와 도전이 남극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각장애인 한 명을 포함한 세 명이 남극대륙 해안에서 출발해 900km 떨어진 남극점까지 스키로 주파하는 도전에 나섰다. 맨몸으로 스키를 타는 것이 아니라, 식량 등을 실은 60kg짜리 썰매를 각자 끌고서다. 11월에 출발한 원정팀은 2012년 1월 중 남극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팀 리더는 영국 해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시력이 나빠져 8년 전 전역한 앨런 로크인데, 그는 현재 완전히 실명한 상태로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대학원 동료 두 명이 맹인 돕기 모금을 위해 이 모험에 함께했다.

    또 두 명의 호주인이 남극대륙 해안에서 남극점까지 스키로 왕복하는 코스에 도전한 상태다. 12월 8일에는 전 세계 17개국 37명의 철인(鐵人)이 미국의 남극 연구 기지 부근에서42.195km의 눈길을 달리는 극한마라톤 대회에 도전했다. 남극은 요즘 여름이어서 평균 기온이 영하 30℃ 정도로 연중 가장 ‘온난’하다.

    아문센의 고국인 노르웨이의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도 아문센 루트 중 마지막 20km를 스키로 주파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 와중에 사업을 벌이는 기업도 있다. 미국 시카고 한 여행업체는 1인당 4만500달러를 받고 남극점까지 비행기로 데려다주는 투어 상품을 최근 출시했다.

    아문센 업적을 되새기는 이벤트에 캐나다 언론이 특히 지대한 관심을 쏟는다. 아문센의 고국도 아니고, 남극과 직접 관련 있는 것도 아닌데 이 나라가 열을 올리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아문센이 남극에서의 생존기술을 캐나다 에스키모(공식 인종 명칭은 이누이트)로부터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이런 노하우를 익히는 과정에서 한 에스키모 여인과 사랑을 나눴고, 이에 따라 현재 캐나다 국적의 에스키모 중 상당수가 그의 핏줄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1872년 노르웨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 척의 배를 소유한 선주이자 선장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아문센이 뱃사람 근처에도 가지 않기를 바랐고, 이 때문에 그는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의과대학 재학 중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아문센은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바다와 모험으로 진로를 바꿨다.

    에스키모 중 상당수는 그의 핏줄?

    이때부터 그는 평생 도전의 길에 나섰다. 남극점 도달 외에 북서통로(Northwest Passage) 최초 통과, 남극점과 북극점 두 곳을 모두 통과한 최초 인물 등의 기록을 세웠으나, 56세 되던 해 북극에서 조난당한 유럽 탐험대를 구조하는 일에 나섰다가 생을 마감했다.

    아문센은 25세 때 벨기에 사람이 주도한 남극점 도달 시도에 합류해 첫 모험에 나섰지만 대원들을 실은 배가 얼음에 갇혀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이후 그가 리더가 돼 시도한 첫 도전이 북서통로 통과였다.

    북서통로란 유럽에서 출발한 배가 캐나다 북쪽 북극해에 있는 섬 사이를 통과해 태평양으로 빠지는 가상의 뱃길을 말한다.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직후 이 대륙의 끝자락을 돌아 태평양으로 빠지는 중국과의 교역로를 16세기 초 개척했다. 영국은 스페인 뱃길보다 더 빠른 아시아행 항로로 북서통로를 생각했다. 300년 동안 여러 탐험대를 보내 이 길을 개척하려 무던히 애썼으나 모두 참담하게 실패했다.

    1903년 아문센은 북극해의 얼음 밀도가 낮아지는 여름에 북서통로를 개척하는 데 도전했다. 아문센 일행 7명을 태운 47t짜리 배는 북극해 구간을 절반쯤 지난 후 얼음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그들은 인근 섬에 사냥 캠프를 차린 일단의 에스키모와 2년 동안 함께 지내며 에스키모들이 사는 법을 익혔고, 이후 항해를 계속해 결국 태평양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에스키모들과 사는 동안 아문센은 이글루 짓는 법, 동물 모피로 파카 만드는 법, 개썰매 다루는 법 등을 경이로운 눈으로 배워 나갔다. 당시 유럽인은 털실로 짠 파카가 최고의 방한복이라 믿었으나, 그는 동물 모피 파카가 더 가볍고 보온성도 더 뛰어나다는 점을 체득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지 못하는 에스키모 사람들이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 비결은 더욱 탄복할 일이었다. 에스키모인들은 육류나 생선을 날로 먹음으로써 동물 몸에 조금 존재하는 비타민 C를 손실 없이 흡수했을 뿐 아니라, 물개를 잡자마자 내장 속의 소화되지 않은 해초를 별미로 즐김으로써 비타민 C 부족분을 보충했다.

    배가 얼음에서 풀려나 항해를 재개했을 무렵, 현지 여인 레옥이 아문센의 혈육을 잉태했다고 알려졌다. 아문센이 이를 모르고 떠났는지, 알고도 출항했는지는 불분명하나 이렇게 태어나 아버지 얼굴을 평생 보지 못한 아들 이칼라크는 어머니로부터 들은 출생의 비밀을 평생 간직하다가 1978년 숨지기 직전 자식들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캐나다 다큐멘터리 작가 조지 툼즈가 최근 몇 가지 정황을 들어 사실이라고 결론 내렸고, 에스키모 사람들 사이에서는 반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아문센은 여러 여자와 염문을 뿌렸지만 평생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자손이 없다.

    북서통로 통과에 성공한 뒤 귀국한 아문센은 다음 목표를 북극점 첫 도달로 잡고 준비하던 중 낙심천만한 뉴스를 접했다. 미국인 로버트 피어리 등이 이미 이 기록을 수립했다는 것이었다. 아문센은 극비리에 목표를 남극점으로 변경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탐험가 로버트 스코트도 남극점 도달을 공개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개썰매로 56일 만에 남극 정복

    소문 없이 준비한 아문센 일행은 7개월의 항해 끝에 남극대륙 해안에 도착해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항해 도중 대서양의 포르투갈령 섬 마데이라에 도착했을 때, 그는 경쟁자 스코트에게 전보를 보냈다. “저희 배의 남극행을 알리게 돼 송구.”

    아문센과 대원 5명, 개 52마리는 1911년 10월 베이스캠프를 출발했다. 사람은 스키로 이동했고, 짐을 실은 네 대의 썰매는 개가 끌었다. 개는 또 다른 용도가 있었다. 에스키모 전통 방식에 따라 도중에 쇠약해진 순서대로 개를 도살해 사람과 남은 개의 식량으로 삼았다. 대원들은 모두 동물 모피로 만든 파카로 몸을 감쌌다.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56일 만에 아문센 일행은 전인미답인 지구의 남쪽 끝 점에 닿았다. 이들은 동상 걸린 손으로 눈 속에 노르웨이 기를 꽂고 근처에 작은 천막을 친 뒤 간략히 자신들의 행적을 적은 메모를 남겼다. 무사히 귀환하지 못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둔 조치다. 40여 일 뒤 사람은 전원, 개는 11마리가 베이스캠프에 돌아왔다.

    영국의 스코트 일행 다섯 명은 아문센보다 33일 늦게 남극점에 도착해, 경쟁자들이 남긴 흔적을 참담한 심경으로 지켜봐야 했다. 이들은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다 추위와 굶주림 끝에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귀국 후 출간한 탐험기에서 아문센은 “여러 난관을 면밀히 예상하고 실제로 이에 부닥쳤을 때 에스키모식으로 대처한 것이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었지만 이 같은 준비가 가능했던 것은 결국 운이었고, 준비 할 수 없었던 쪽은 불운했을 따름이다”라고 적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