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4

2011.11.28

유기농 포도로 만든 와인 땅 살리고 인간도 살린다

탬벌레인 와이너리

  • 박일원·호주여행전문칼럼니스트 bobbinhead@gmail.com

    입력2011-11-28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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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원 기행’은 와인에 대한 천편일률적 지식이나 이론 혹은 까다로운 예법을 따지는 기존 와인 이야기와는 다르다. 호주의 유명 와인 산지를 직접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들의 인생과 와인 이야기를 담았다. 전직이 판사, 의사, 신문기자, 화가, 항공기 조종사, 철학 교수인 양조장 주인으로부터 포도농장을 하게 된 동기, 그리고 와인에 대한 독특한 인생철학과 애환, 사랑 이야기를 직접 듣고 채록했다.

    유기농 포도로 만든 와인 땅 살리고 인간도 살린다
    헌터밸리를 돌아보며 알게 된 점 중 하나는 와이너리를 꾸려나가는 사람 가운데 유난히 의사가 많다는 사실이다. 한 병에 수천만 원 하는 그레인지를 생산해 세계 와인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펜폴즈(Penfolds) 역시 의사인 크리스토퍼 펜폴즈라는 사람이 설립했다. 펜폴즈는 처음에 치료 목적으로 와인을 만들다 환자의 입소문을 통해 평판이 좋아지자 나중에는 양조용으로 생산량을 늘려 지금처럼 세계적 와인회사가 된 것이다. 펜폴즈뿐 아니라 당시많은 의사가 와인의 의학적 효능을 굳게 믿었다.

    쏟아지는 봄볕과 홀짝홀짝 얻어 마신 와인에 취해 레이크스 폴리를 떠나 다음으로 찾아간 탬벌레인 와이너리 역시 공짜 술꾼으로 북적였다. 이곳은 대규모 마켓을 상대하기보다 멤버십 제도를 도입해 소비자에게 직접 와인을 판매한다. 현재 회원 수가 만여 명에 이른다는 탬벌레인 역시 펜폴즈나 레이크스 폴리처럼 란스 알렌이라는 시골의사가 만들었다.

    와인과 건강의 상관성을 표현하면서 자주 언급하는 것이 ‘프렌치 패러독스’다. 이는 지방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먹으면 심혈관 계통의 질병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인데, 프랑스인은 육식을 즐기면서도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현저히 낮은 현상을 표현한 말이다. 심장 전문의들은 포도껍질이나 씨에 함유된 폴리페놀이 항산화제 기능을 해 심혈관을 보호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리고 대규모 임상실험은 없었지만 ‘적포도주가 심장에 좋다’는 것은 의학계에서 정설로 굳어 있다.

    그런데 이처럼 몸에 좋은 적포도주를 생산하려면 반드시 과거의 방식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1985년 알렌 박사로부터 탬벌레인 와이너리를 매입한 마크 데이비슨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적도포주의 원료가 되는 포도를 키우면서 화학비료나 살충제, 제초제 사용을 철저히 거부한다. 그 대신 ‘고비용 저효능’인 옛날 방식을 고집한다. 유능한 와인사업가라면 비용을 절감하고 속속 등장하는 고품질 비료를 사용해 수확량을 늘려야 할 텐데도, 그는 이런 경제원칙과는 거리가 한참 멀게 와인사업을 한다. 헌터밸리에선 이를 ‘마크 데이비슨의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고비용 저효능’ 옛날 방식 고집

    그 역시 처음에는 다른 포도원처럼 화학비료도 주고 약품을 사용해 해충 방제와 제초를 했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화학비료와 살충제,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유나 달걀껍질, 해초류, 퇴비, 포도껍질 등 자연친화적 유기물과 자연 광석을 이용해 땅을 기름지게 한다. 또 살충제를 쓰는 대신 무당벌레 같은 익충으로 진딧물 등의 해충을 방제한다. 추수가 끝나고 나면 포도밭에 염소와 양을 풀어 고랑 사이를 헤치고 다니게 한다. 이들은 수북이 자란 잡초를 뜯어먹는다. 염소와 양은 포식해서 좋고 포도원 측은 자동으로 제초를 하니 이득이다. 더욱이 제초제 대신 끌어들인 동물이 쏟아낸 배설물과 화학약품을 사용하지 않아 생긴 지렁이는 땅을 기름지고 숨 쉬게 만든다.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마크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하는 유기농 재배와 무방부제 농법을 혼동한다”며 “무방부제 농법은 단순히 포도의 부패를 막기 위해 사용하는 아황산가스 등을 억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찰스 영국 왕세자와 와인을 마시며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 역시 유기농 와인에 대한 절대적 지지자였다”고 전한다. 마크는 원래 시드니 북쪽 뉴캐슬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후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일하다 포도재배에 관심을 갖고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다시 농업대에 들어가 와인을 공부했다.

    온갖 과일 향의 도발적 유혹

    유기농 포도로 만든 와인 땅 살리고 인간도 살린다

    포도껍질, 나뭇잎 등을 발효시켜 천연비료를 생산하는 설비.

    그의 포도원 뒤에는 팔뚝만 한 물고기가 헤엄치는 호수가 있다. 와이너리에서 사용하고 나온 허드렛물을 정화시켜 만든 것이다. 여름밤이면 이 호숫가에서 보통 10년 이상씩 함께 일해온 직원들과 바비큐 파티를 연다. 인근 푸줏간에서 사온 두터운 소고기를 그릴에 척 올려놓은 뒤 창고로 뚜벅뚜벅 걸어가 자신들이 빚은 잘 익은 와인을 꺼내온다. 엄청나게 바쁜 포도원이지만 주말에는 완전히 일손을 놓고 크리켓을 하는가 하면 영화도 관람한다.

    마크와 대화를 나누다 영화 ‘백 투 더 퓨쳐’ 이야기가 나왔는데 “과거는 현재의 미래다. 만약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현재 잘못된 것을 고쳐 놓을 수 있을 텐데”라며 아쉬워한다. 무분별한 남용과 오용으로 황폐해지는 자연을 걱정하는 말이다. “옛날 방식의 자연친화적 농사법이야말로 땅을 살리는 길”이며 “이렇게 살아 있는 땅에서 재배한 포도로 빚은 와인이 결국 우리를 살린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행복한 인생이라고 뭐 크게 다를까요. 여기 탬벌레인의 포도밭에 앉아 무릎에 손자를 앉혀놓은 뒤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와인 한잔 마시면 그게 행복 아닌가요. 하늘엔 무수한 별이 있지만 지구처럼 살아 있는 별은 드뭅니다. 그러니 이 땅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게 아니에요. 우리가 후손에게 빌려 쓰고 있는 거죠. 내가 죽고 나면 또 누군가 여기 와서 포도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지 않겠어요.”

    마크는 “자기는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임차인에 불과하기에 탬벌레인도 잘 사용하다 결국 누군가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말한다.

    마크와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말이 끄는 수레가 덜거덕거리며 다가온다. 관광객을 태우고 헌터밸리 지역을 돌아보는 마차다. 호기심에 올라타고 보니 때마침 손님을 상대로 상담해주던 와인컨설턴트가 옆자리에 동승한다. 오전 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이라는 그에게 와인에 얽힌 인생 이야기나 들어볼 요량으로 말을 건넨다.

    소가죽 아쿠브라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나이 지긋한 마부는 그와 나를 태우고 탐스러운 포도 꽃이 피어난 포도원 샛길로 마차를 몰아간다.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은은한 포도꽃 향기가 바람을 탄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한잔 따라 짭조름한 올리브를 안주 삼아 마신다. 보글보글 올라온 기포가 폭죽처럼 터지며 코와 눈을 간질인다. 입안에서는 온갖 과일 향이 요동친다. 드디어 와인의 도발적인 유혹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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