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4

2011.11.28

태평양 자유무역 전쟁 개전

한미 FTA 통과 동북아 경제지도 변화 미·중, 군사력 이어 경제 패권 잡기 본격화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입력2011-11-28 09: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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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 자유무역 전쟁 개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무역협정의 모델이다. 경제뿐 아니라, 강력한 전략적 이해도 담았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한미 FTA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전략적 이해’다. 클린턴 장관이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상실한 헤게모니(패권)를 되찾으려는, 이른바 ‘동아시아 재개입 정책(East Asia Reengagement Policy)’의 사실상 입안자임은 주지의 사실. 미국 의회가 한미 FTA 이행법안(비준안)을 통과시키고 이틀이 지난 10월 14일 뉴욕경제클럽(ECNY) 연설에서 그는“외교 정책의 중심을 이제 경제에 맞춰야 할 때”라며 “중국을 견제하려고 동아시아 개입을 강화해야 하는 전환점에 들어섰다”고 강조했다.

    미국에게 한미 FTA는 단순한 경제협정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회복하려는 출발점이다. 클린턴 장관은 앞서의 연설에서 1945년부터 8년간 재임한 해리 트루먼 전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했다. “트루먼 전 대통령은 외교와 경제를 분리시켜 생각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새로운 국제 경제 질서를 창출하고 이끌어 나가려면 친구는 물론 어제의 적까지도 활용해야 한다”는 역설이었다.

    트루먼 전 대통령 시절 미국 외교 정책의 책임자는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었다.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워싱턴내셔널클럽에서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을 통해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하고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정한다”는 이른바 ‘애치슨라인’을 밝힌 장본인이다. 이는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미국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한국의 공산화를 저지해야 했다. 동아시아에 다시 개입하려는 오늘의 미국은 ‘애치슨라인’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한국과의 FTA를 가장 먼저 추진했다고도 할 수 있다.

    미국 처지에서 볼 때 한국은 베트남과 함께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전략요충지다. 대륙세력인 중국의 해양 진출을 막으려면 반도국가인 한국, 베트남과의 경제협력이 긴요하다. 클린턴 장관이 말한 ‘친구’와 ‘어제의 적’이 바로 한국과 베트남인 셈이다. 21세기 패권경쟁은 군사력도 중요하지만 경제력에 더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한미 FTA 비준은 경제는 물론 전략적 동맹국과 관계를 강화한다는 외교 정책 가치(foreign policy value) 측면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분석했다. ‘워싱턴포스트’도 “한미 FTA는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래 가장 중대한 무역협정”이라면서 “양국의 경제적, 전략적 동맹관계를 한층 가속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의 눈으로 볼 때, 이제 한국은 동아시아의 ‘전진기지’가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당장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추진해온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확대하는 데 한미 FTA가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11월 12,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의에 참석한 TPP 참가국과 별도로 정상회담을 열고, 내년 말까지 구체적인 협정문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TPP 참가국은 미국을 비롯해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브루나이, 호주, 뉴질랜드, 칠레, 페루 등 9개국. 눈여겨볼 대목은 한미 FTA에 자극받은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TPP 협상 참가 결정을 전격 통보했다는 점이다. 세계 1위 경제대국인 미국과 3위인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TPP 참가국 전체 GDP의 91%를 차지한다. 사실상 미·일 FTA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 경제의 전진기지

    태평양 자유무역 전쟁 개전

    1월 19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백악관에서 동북아 평화와 양국 협력에 관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일본 언론은 미국과 일본이 TPP를 통해 경제동맹을 강화해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도 “세계의 무게 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이동하는 중”이라면서 “미국과 일본이 힘을 합쳐 중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TPP의 경제규모는 21조670억 달러로, NAFTA(17조1900억 달러)나 유럽연합(EU·16조1000억 달러)보다 훨씬 크다. 일본이 TPP에 완전히 참가할 경우 세계 최대의 자유무역권이 출현하는 셈. 더욱이 캐나다, 멕시코, 필리핀, 파푸아뉴기니 등 최소 4개국이 현재 TPP 참가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11월 19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도 처음으로 참석했다. EAS는 2005년 12월 창설된 다자간국제회의체로 회원국은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인도, 호주, 뉴질랜드였다. 중국은 EAS 창설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미국을 고의적으로 배제했다.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켜 동아시아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중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자 아세안은 그동안 상당한 불안을 느껴왔다. 견제 필요성을 절감한 아세안은 지난해 10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제5차 동아시아 정상회의에서 미국과 러시아를 새로운 회원국으로 가입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번 EAS 정상회의서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과 아세안 회원국인 베트남과 필리핀이 갈등을 보이는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에서 아세안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국제법과 평화적 분쟁 해결 원칙에 의거해 남중국해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언은 앞으로 미국이 아세안과의 관계를 강화하겠다는 포석에 다름 아니었다.

    1967년 출범한 아세안 10개 회원국의 전체 인구는 6억여 명이며, 올해 GDP는 1조8000억 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 아세안 주요 5개국의 2011∼2015년 평균 경제성장률은 6% 내외가 될 전망이다. 아세안은 이미 2015년 경제를 통합해 자유무역지대로 만드는 경제공동체(AEC)를 추진 중이고, 중국은 지난해 거대한 시장이자 자원의 보고인 아세안과 FTA를 체결했다.

    미국의 의도는 이처럼 중국이 선점한 아세안에 적극 진출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아세안의 맹주 격인 인도네시아에는 TPP 참가를 적극 권유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에 F-16 C/D 24대를 판매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

    한미 FTA 비준과 일본의 TPP 협상 참가 결정, 미국과 아세안의 관계 강화 등 미국의 공격적 행보가 이어지자 중국 베이징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하다. 주펑(朱鋒)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미국은 중국에 동아시아로 귀환한다는 메시지를 보낸다”면서 워싱턴발(發) 전방위 공세를 우려했다. 특히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TPP가 자국의 경제 전략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본다. 위젠화(兪建華) 상무부 부부장은 “우리는 어떤 나라로부터도 TPP에 초대받지 못했다”면서 “아시아지역의 경제통합에는 투명성이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의 자매지 ‘환구시보’는 10월 14일자를 통해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새로운 규칙을 제정하려는 야욕을 보인다”고 꼬집고 나섰다.

    모습 드러내는 중국의 ‘멍군’

    태평양 자유무역 전쟁 개전

    11월 18일 인도네시아 발리 누사두아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제14차 아세안+3 정상회의 에서 13개국 정상이 회의에 참석해 기조발언을 듣고 있다. 왼쪽부터 원자바오 중국 총리,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 이명박 대통령.

    중국이라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간 중국은 아세안에 자신과 일본, 한국이 참가하는 이른바 ‘아세안+3’이라는 경제통합 전략을 추진해왔지만, 최근에는 그간 일본이 제시해온 ‘아세안+6’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아세안+6은 아세안+3에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인도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거부 반응을 보여왔던 중국이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중국의 이러한 전략 변화는 미국 주도의 TPP에 대응하려는 ‘멍군’이다. GDP 기준 이미 세계 2위에 오른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경제통합의 구심점이 되려던 계획이 TPP 출현으로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아세안과의 협력 강화도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이들 국가와의 정상회담에서 100억 달러 차관을 약속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원자바오 총리는 EAS 폐막 직후 이명박 대통령, 노다 일본 총리와의 3개국 정상회담에서 한중일 FTA의 구체적인 로드맵을 처음 제시하기도 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3국이 연내에 FTA 타당성 공동연구를 마무리 짓고 내년부터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했다. 특히 중국은 한국과의 FTA를 적극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그동안 한국에 FTA를 조속히 체결하자는 의견을 피력해왔다. 궈셴강(郭憲綱) 중국 국제문제연구소의 부소장은 “한미 FTA나 TPP보다 한중일 3국이 FTA를 체결하는 게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공통점이 많은 한국과 중국이 먼저 이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한국과의 FTA가 미국의 TPP에 맞서는 카드가 될 수도 있다는 시각으로, 한국의 경제 의존도가 미국보다 자국에 훨씬 높다는 점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담긴 셈이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패권 다툼은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태평양전쟁의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이었다. 당시 신흥국가였던 일본은 시장과 자원을 확보하려고 아시아·태평양지역을 침공했고,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맞아 미국이나 중국은 모두 이 지역을 발판 삼아 새로운 도약을 모색 중이다. ‘제2차 태평양전쟁’에서 누가 승리할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동아시아 모든 나라가 이들의 힘겨루기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가 그러했듯, 역사는 지금을 찰나의 전략적 지혜로 미래가 엇갈린 결정적 국면으로 기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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