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2

2011.11.14

“내 40대를 바친 영화 ‘오늘’ 사회에 득 되겠죠?”

충무로의 작은 거인 이정향

  • 김지영 기자 kjy@donga.com

    입력2011-11-14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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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40대를 바친 영화 ‘오늘’ 사회에 득 되겠죠?”
    자그마한 체구지만 말본새가 다부지다. 말수가 적을 줄 알았는데 말문이 터지니 달변이다. 단정한 커트 머리와 캐주얼한 차림이 소탈한 성격을 말해준다. 동그란 안경 너머 웃는 얼굴은 해맑기 그지없다. 이정향(47) 감독은 어쩐지 그가 만든 영화를 많이 닮았다.

    1995년 조감독 생활을 마치고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그는 시놉시스 세 편을 미리 써뒀다. 바로 심은하 주연의 ‘미술관 옆 동물원’(1998)과 ‘집으로’(2002), 그리고 최근 개봉한 ‘오늘’이다.

    섣부른 용서에 대한 진지한 성찰

    황동혁(40) 감독의 ‘도가니’가 한 장애인 특수학교의 교사들이 제자들에게 가한 무도한 폭력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법적 처분을 다뤘다면, ‘오늘’은 섣부른 용서에 대한 성찰을 그린 작품으로 가해자의 인권보호에는 관대하면서도 피해자에 대한 배려에는 인색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끄집어냈다.

    “1990년대 초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본 칼럼 문구가 가슴 깊이 와 닿았어요. 용서도 때론 죄가 될 수 있다는 글이었죠. 그때부터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겼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권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되묻고 싶었어요. ‘남의 상처를 두고 용서를 함부로 말하지 마라’라는 것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어요. 사건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만들었죠.”



    ‘집으로’가 4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두자 여기저기서 시나리오를 보내왔다. 그러나 선뜻 내키지 않았다. 마음에 쏙 드는 작품도 없었거니와 다른 데 눈 돌릴 여력이 없었다. ‘오늘’은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2005년부터 5년 동안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렸다. 40대를 온전히 ‘오늘’에 바친 셈이다.

    “미리 써둔 세 편의 시놉시스를 모두 영화로 만든 뒤 보통 여자의 삶을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작품을 준비하면서 점점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만일 ‘오늘’ 대신 평범한 삶을 택했다면 지금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있었을지도 몰라요(웃음).”

    ▼ 초고 가제가 ‘노바디 썸바디’인데 어떤 뜻인가요.

    “‘용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인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의미로 붙였는데 탈고를 앞두고 제목을 바꿨어요. 살인자를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증오와 미움의 악순환 속에서 살면 남아 있는 삶까지 황폐해지잖아요. 그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기 의지로 하는 수밖에 없어요. ‘마음 중심부에서 그 미움을 조금이라도 밀어내고 하루만이라도 당신을 위해 살아보면 어떨까요. 그 하루하루가 모이면 어쩌면 상처받기 이전과 조금은 비슷해져 있지 않을까요’ 이런 의미로 ‘오늘’이라고 지었어요.”

    ▼ 영화가 완성된 후 보셨나요.

    “사실 난 내 영화를 안 봐요. 전체를 못 보고 아쉬운 부분에 집착하게 되거든요. 이번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VIP 시사회가 열려서 어쩔 수 없이 봤어요. 역시나 영화를 즐길 수 없더군요. ‘집으로’도 꼭 8년 만에 봤어요. 이제야 재미있더라고요. 유승호도, 할머니도 연기를 참 잘하던데요(웃음).”

    ▼ 자료와 정보를 얻으려고 직접 발로 뛰어다녔나요.

    “유가족을 직접 찾아다니며 인터뷰할 수도 있었지만 다친 마음을 후벼 파놓고 영화화가 안 되면 또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그분들이 강조한 이야기를 놓치고 갈 수도 있어서 책을 많이 봤어요.”

    ▼ 길잡이가 돼준 책을 꼽는다면….

    “폴란드 출신 심리학자 엘리스 밀러의 아동학대에 관한 책과 미국 심리 치료사 제니스 A. 스프링의 용서에 관한 책, 표창원 경찰대 교수가 쓴 ‘한국의 연쇄살인’이 큰 도움이 됐어요. 표 교수가 참고하라고 준 ‘피해자학’이라는 교재 덕에 우리나라 피해자들이 얼마나 심하게 소외되는지 알았죠. 사형제 폐지와 관련된 책도 정말 많이 봤어요. 그분들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끝까지 가보려고요. 그래야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겠더라고요.”

    ▼ 사형제 폐지를 반대하나요.

    “사형제 폐지를 무조건 반대한다기보다 대안 없는 폐지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종교계와 위정자가 사형수의 인권 운운하며 사형제 폐지를 외치지만 실제로 사형수는 교도소 안에서 방치되고 있어요. 더구나 사형수 인권은 중요하게 여기면서 피해 유가족 인권은 무시당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유가족에 대한 보상은커녕 가해자가 원치 않으면 면회도 불가능해요.”

    ▼ 미국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날 수 있나요.

    “가해자가 자신의 형량을 줄이려고, 일찍 출소하려고 등등의 이유로 피해자 앞에서 위선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한 번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퍼부을 수 있는 기회를 줘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거나 반성하거나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지 않는데도 무턱대고 용서만을 강요해요. 이건 문제죠.”

    학창 시절 반항적인 아웃사이더

    “내 40대를 바친 영화 ‘오늘’ 사회에 득 되겠죠?”
    ▼ 극중에서 딸을 무자비하게 패는 아빠보다 끔찍한 폭행 장면을 태연하게 보고만 있는 엄마의 모습이 더 충격적이었어요.

    “사실 아버지의 폭력을 방치하는 엄마가 많아요. 딸을 강간하는 남편의 성폭행을 모른 척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남편을 용기 있게 고발하는 엄마는 거의 없어요. 많은 전문가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더군요. 잘못된 부모가 아이를 망친다, 문제아 뒤에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다고요. 제 생각도 다르지 않아요. 부모가 폭력과 폭언을 서슴지 않는데도 무조건 참고 따르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어요.”

    ▼ 학창 시절 부모에게 순종적이었나요.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요. ‘부모가 잘못하더라도 말대꾸하면 안 된다, 자식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이런 말이 싫어서 어릴 때 엄마에게 살살 깨물면 안 아프지 않느냐고 대꾸했던 기억이 나요. 반항적이었어요. 아웃사이더였죠. 중학생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심야에 귀가하곤 했어요. 영화에 심취해 청계천 헌책방에서 밥도 안 먹고 ‘로드쇼’ 같은 영화 잡지나 오래된 영화 서적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봤죠.”

    그가 영화에 빠진 건 우연이었다. 중1 겨울방학을 앞둔 1977년 12월, 단체 영화 관람을 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그는 ‘더 타워링 인페로(The Towering Inferno)’를 봤다. 한국에서는 ‘타워링’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감독은 존 길러민, 주연배우는 폴 뉴먼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내 삶이 2시간 전과 달라져 있었어요. 지축이 틀어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때부터 폴 뉴먼이 출연한 영화, 함께 작업한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지면서 결국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됐죠.”

    그러다 중3이던 1979년 3월 2일, 뜻밖의 비보가 날아 들었다. 하길종 감독의 부고였다. 이 감독은 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병태와 영자’라는 작품도 인상적이었고 미국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 감독이어서 더욱 끌렸다.

    “하길종 감독의 생일이 저와 같아서 그분 죽음이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그때부터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졌죠. 영화 관련 지식은 갈수록 두터워지고 배우 연보까지 꿸 만큼 잡다한 영화 지식이 풍부했어요. 대학 들어갈 때까지 나만 한 영화 오타쿠를 본 적이 없어요.”

    “내 40대를 바친 영화 ‘오늘’ 사회에 득 되겠죠?”

    2011년 작 영화 ‘오늘’(왼쪽), 2000년 작 영화 ‘집으로’에 출연한 김을분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있는 이정향 감독.

    하고 싶은 이야기 하려고 지원 안 받아

    ▼ 감독을 꿈꾸면서 왜 불문과를 선택한 건가요(이 감독은 서강대 불문과를 나왔다).

    “연극영화과는 배우가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서강대 연극반이 유명해서 1지망에 신문방송학과를 지원했는데 안 됐고, 3지망이던 불문과에 붙었죠. 어문계열은 갈 생각이 없었는데 꿈에 ‘계시’를 받았어요. 원서를 넣기 바로 전날 처음으로 하길종 감독 꿈을 꿨어요. 감독과 부인, 아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꿈에서 봤는데 그중 두 사람이 불문과 출신이거든요.”

    그는 대학에서 학과 공부를 하기보다 연극반에서 살다시피 했다. 졸업 후에는 영화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연출부 생활을 시작했다.

    “연극반에서 놀면서 배운 게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연기에 대한 기준점이 생긴 것이 큰 소득이에요. 어떤 연기가 좋은지를 가려내는 눈이 자연스럽게 길러진 거죠.”

    ▼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을 뿐이에요. 나는 영화를 만들 때 두 가지를 점검해요. ‘정말 이 사회에 필요한가, 내가 이 영화를 하면 영화인으로나 인간적으로 좀 더 성숙할 수 있을까.’ 여태껏 회사에서 지원받아가며 시나리오를 쓴 적은 없어요. 다 내 돈으로 미리 썼죠. 그래야 내가 생각한 방향대로 자유롭게 갈 수 있으니까요. 지원을 받으면 투자자의 취향과 의도에 따라 내용이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거든요.”

    20년 가까이 그가 마음에 품었던 ‘오늘’은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왔다. 전작에 비해 어둡고 무겁다는 이유로 투자받는 일도 녹록지 않았고, 주연배우 송혜교가 왕가위 감독의 영화 촬영 스케줄로 발이 묶여 크랭크인이 세 차례나 연기됐다. 이대로 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서 이 감독이 던진 승부수는 진정성이다. “비행기가 이륙하려고 도움닫기를 하다가 어느 속도가 되면 무조건 떠야 한다. 엔진이 부서지든, 화재가 나든…. 그 속도를 V1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미 V1을 지났다. 10월 말까지 와라. 그렇지 않으면 가서 데리고 오겠다”는 말로 송혜교의 마음을 움직인 것. 40대를 오롯이 바쳐서 만든 이 영화를 통해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뭘까.

    “‘용서는 누군가를 향한 미움을 없애는 게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을 가장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라고 말한 소피아 자녀의 대사와 다혜(송혜교 분)가 소년범에게 셀프카메라로 한 말이 엑기스예요.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너 자신을 사랑하는 데 써라, 그러면 네 주변 사람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요.”

    ▼ 다음 작품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메모해둔 건 많은데 아직 이거다 싶은 작품은 없어요. 아마도 경쾌한 영화는 아닐 거예요. 다소 주제가 무겁고 씁쓸하더라도 사회에 득이 되는 영화를 하고 싶어요.”

    ‘오늘’의 흥행 성적은 평단의 호평에도 ‘그저 그렇다’. 충무로의 작은 거인 이정향 감독이 40대를 온전히 바친 영화‘오늘’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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