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3

2011.09.05

“포니車에 쏟은 열정 나무에 나눠주며 삶을 배워가죠”

동두천 마차산 자락 거주 박병재 前 현대차 부회장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1-09-05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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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니車에 쏟은 열정 나무에 나눠주며 삶을 배워가죠”

    박병재 전 부회장(오른쪽)이 1995년 11월 현대차 울산공장을 방문한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왼쪽)을 안내하고 있다.

    아침 일찍 소나무 가지를 친다. 솔 향이 그윽하다. 숲이 쏴아~ 소리를 낸다. 모기 입이 비뚤어졌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秋分)이 다가온다. 가을이 익으면 장작을 패야 한다. 아내가 일하는 남편을 내다본다. 은퇴 후에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남편이 좋은 눈치다.

    “아들 녀석 둘보다 ‘포니’를 더 사랑한 사람이에요. 은퇴 후에도 얼마나 바쁜지…. 몸을 가만두질 못해요.”

    그는 1968년 7월~2003년 1월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에서 일했다. 고(故) 정주영(1915~2001) 회장, 고 정세영(1928~2005) 회장, 정몽구(73) 회장을 도왔다. 현대차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은 그를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은 분”이라고 기억한다. 용퇴를 바라는 정몽구 회장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서운한 감정 전혀 없습니다. 행복한 순간에 떠납니다. 고문직도 맡지 않겠습니다.”

    현대차 부회장을 지낸 박병재(70) 씨는 경기 동두천에서 소나무를 키우며 산다. 10년 넘게 매년 100그루씩 나무를 심어왔다.



    “채마밭도 해요. 고추, 상추, 토마토를 키워 먹죠.”

    은퇴 후에도 부지런히 몸 움직여

    그는 2006~2009년 영창악기 대표이사를 끝으로 현직에서 은퇴했다. 소일거리를 준비한 것은 현대차에 재직할 때다.

    “1980년대 동두천에 땅을 샀어요. 북한 가까운 곳이라 땅 값어치가 없다고 할 때였죠. 노년을 이곳에서 보내면 좋겠다 싶더군요.”

    “지금 땅값은요?”이라고 묻자 그가 웃었다.

    “100배는 올랐을 거예요.”

    집은 소요산을 마주보는 마차산 자락에 서 있다. 대문 앞으로 개울이 흐른다. 집은 단층(170㎡·50평)으로 소박하다. 벽돌 하나하나에 그의 손길이 닿았다. 전나무, 복숭아나무, 자두나무가 울타리를 이룬다. “훗날 크게 자라거라”라고 다독이며 심은 묘목이 ‘청년’이 됐다. 뒷산엔 직접 심은 소나무 1200그루가 자란다. 잣나무, 주목, 단풍나무를 더하면 1500그루가 넘는다. 자식처럼 돌보던 나무를 조경용으로 내다판다.

    “나무를 키우면서 삶을 배워요. 현직에 있을 때 해외 출장으로 정신없이 지내다 마차산에 들르면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편해지곤 했어요. 지금은 영리(營利)도 되고요.”

    그는 동두천에서 유명 인사다. 동두천성결교회에서는 ‘현대차 부회장을 지낸 장로님’으로 통한다. 동두천시 자문위원도 맡았다. 동두천에 눌러앉은 소식을 들은 시장이 자리를 청했다. 그는 개발연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한국 자동차 산업 개척자다. 현대차를 칭할 때는 지금도 ‘우리 회사’라고 한다. 8월 초 현대차가 도요타를 제치고 올 상반기 세계 자동차 글로벌 톱 4에 ‘일시적으로’ 올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하던 곳이 날로 좋아지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대리 행복을 느낀다고나 할까. 정몽구 회장이 경영을 잘해요. 사람 사는 게 운칠기삼(運七技三)이거든요. 최선을 다해야만, 기삼을 이뤄내야만 운칠이 와요. 전적으로 좋아지는 건 운이지만, 운을 맞으려면 기를 써야 하죠. 도요타가 미국에서 그 꼴 당할지 누가 알았겠어요.”

    정식 발령을 받아 10명 남짓한 사람이 일하는 현대차로 첫 출근한 때가 창업 이듬해인 1968년 7월 1일. 그는 말단이지만 중요한 일을 맡았다.

    “부품업체를 선정하는 일을 했어요. 정세영 회장이 돈과 시설이 아닌, 사람을 보고 정하라 하더군요. 부엌, 안방에서 창업한 부품업체가 지금은 내로라하는 협력회사가 돼 있어요. 정 회장이 설렁탕 한 그릇 이상은 얻어먹지 말라고 했죠. 접대를 거절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에요. 정 회장이 그런 정신으로 기업을 운영했기에 오늘날의 현대가 있는 거예요. 그분은 오너 행세를 하지 않고 민주적으로 회사를 경영한 분이에요. 자동차 산업을 키워낸 주역이죠.”

    “설렁탕 한 그릇 이상은 접대받은 적이 없나요?”라고 묻자, “노력했습니다만…”이라면서 웃는다. “정몽구 회장은요?”라고 덧붙여 물었다.

    “경영자로서 결심한 일을 추진해 이루는 건 세계에서 1등이라고 봐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지향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성취해요. 경영자로서 아주 필요한 자질이죠.”

    “현대차 인사를 두고 ‘지나치게 변화무쌍하다’는 평가도 있던데요?”라고 고쳐 물었다.

    “그건 아니에요. 잘못 본 거예요. 인사가 만사죠. 인사를 잘했기에 오늘의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목표를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정몽구 회장이 정주영 회장을 가장 많이 닮았어요. 사안을 판단할 때 본인이 완벽히 이해해야 결심을 해요. 사실 판단을 적당히 하는 적이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결정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그분을 모르고 하는 얘기예요. 얼마나 철저한 사람인데, 무서운 사람이죠.”

    현대차 42년 역사에 세 번의 위기

    “포니車에 쏟은 열정 나무에 나눠주며 삶을 배워가죠”
    현대가(家) ‘왕자의 난’ 비화를 들으려고 비딱한 질문을 던진 기자가 머쓱했다. 그는 ‘포니 정’(정세영 회장의 별명)과 고락을 함께한 ‘정세영의 사람’이다. 정몽구 회장은 1999년 현대차 경영권을 확보했다. 현대차는 1999년 이전 역사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현대차 42년 역사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세 번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포니 만들기 전에 코티나를 조립했어요. 은행 적금이나 상호부금에 가입한 사람을 대상으로 차를 할부로 넘겼죠. 24개월, 36개월 할부인데 돈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90%가 연체인데, 이걸 어떡해요. 그냥 놔두면 회사가 망하겠고. 1969년에 정주영 회장이 직원들이 직접 받아오라고 지시했죠. 차를 빼앗든지, 돈을 받든지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회수하라고 했어요. 정세영 회장이 저 보고 ‘너 할부과로 가’ 하더군요.”

    “추심한 거네요, 조폭이 하는…”이라고 말하자 그가 소리 내 웃었다.

    “주먹은 안 썼어요. 총책임을 KCC 정상영 회장이 맡았어요. 당시 금강스래트 사장이었는데, 나는 월급을 금강에서 받으니 급여 받지 않고 현대차를 위해 노력하겠다, 1년 만에 회수하겠다 하더군요. 정(상영) 회장이 주먹이 야물어요. 깡도 있고, 기운도 세죠. 험한 일 할 때는 깡이 중요하거든요. 정 회장이 우두머리, 내가 실무. 서울대 법대 출신 2명이 법적인 거 검토하고. 정 회장이 해결사 노릇을 제대로 못했으면 지금의 현대차는 존재하지 않아요.”

    두 번째 위기는 1987년 포드, 제너럴 모터스(GM)가 캐나다 법원에 현대차가 덤핑을 했다면서 제소했을 때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때 도요타가 겪은 것보다 더 고생했다. 회사가 뿌리째 없어질 뻔했다”고 기억했다.

    “덤핑 제소에 대한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었어요. 캐나다 국세청이 우리를 조사하는데, 덤핑을 안 했다는 증거로 내놓을 자료가 없는 거예요. 과장이 책임자였는데 내가 귓방망이를 때렸죠.기합을 줘야겠다 싶어 사표도 받았어요.”

    우여곡절 끝에 현대차는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현대차 역사에서 당시보다 큰 위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어요. 위기는 벼락처럼 와요. 잘나가면 잡아 내리려고 하죠. 삼성전자가 요즘 고생하고 있지 않나요. 앞으로도 현대차, 삼성전자가 특허 및 덤핑과 관련해 곤욕을 치를 수 있어요. 잘 대비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더욱 신경 써야 해요. 별의별 압력으로 괴로울 수 있거든요. 기업도 국적·호적이 중요하고, 무서운 거예요.”

    마지막 위기는 외환위기 때다. 현대차는 1990년대 초 ‘2000년까지 글로벌 톱 10에 오르겠다’는 비전을 내놓았다. 벅찬 목표였다고 그는 말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기업은 도약할 수 있어요. 경제공황이 올 때 도약해야 하죠. 현대차는 1997년 외환위기를 기회로 만들었어요.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때도 공격적으로 위기관리를 잘했고요. 현대차는 외환위기 이듬해 1만 명을 구조조정했어요. 대우차, 삼성차, 기아차가 무너진 게 적기에 구조조정을 못해서예요. 1998년에는 기아차 인수 계약을 맺었어요. 돈이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건 1999년부터였고요. 구조조정을 통해 생긴 여유자금을 기아차 인수에 쓴 거죠.”

    현대차는 기아차를 인수하면서 글로벌 톱 10에 이름을 올렸다. 2010년 자동차 판대대수에서 현대·기아차는 세계 5위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과 동갑이다.

    “그분이랑 일로 마주한 적은 없어요. 무지하게 똑똑한 사람이에요. 정주영 회장이랑 호흡도 잘 맞았고. 나중에 어긋났지만. 하루는 정세영 회장이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야! 왜 고대 출신보다 연대 출신이 못해. 나이도 똑같은 놈이. 이명박이만큼 못해!’ ‘나한테 그런 자리 준 적 있느냐’고 되물었죠. 내가 버릇이 없어요. 현대차는 현대그룹 안에서도 분위기가 달랐어요. 정세영 회장이랑 농담도 하는 그런 분위기였거든요. 지금 현대차는 분위기가 또 다르지만….”

    그는 2000년대 초 기아차 공장이 있는 광주에서 출마하라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으면 인생이 엉망이 됐을 거예요. 왜들 정치판을 기웃거리는지 ….”

    이따금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 자동차 회사에서 경영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온다. 그때마다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쌍용차 법정관리인 제안도 사양했다.

    “평생 몸담은 현대차에 척지는 일을 할 수는 없어요. 사람이 살면서 적을 만들면 안 되죠.”

    몸에 밴 부지런함 ‘새벽예배’ 안 걸러

    “포니車에 쏟은 열정 나무에 나눠주며 삶을 배워가죠”
    그는 부지런해야 성공한다는 ‘정주영의 현대’에서도 부지런했다. 지금도 새벽예배를 거르는 법이 없다.

    “아침 6시, 6시 반에 일을 시작하지 않은 역사가 없어요. 이명박 대통령도 똑같아요. 아침 일찍 출근하면 장점이 많아요. 근무시간 전까지 간섭 없이 일할 수 있거든요.”

    바쁘게 살던 이가 나무 키우면서 소일하면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70세 넘어 경영하면 안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영창악기 대표이사를 그만뒀죠. 65세도 그렇지만 70세 넘으면 기억력이 떨어져요. 숫자고 뭐고 정확했는데, 지금은 기록 안 하면 잘 몰라요. 월급쟁이하고 오너는 달라요. 오너는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는 가장 사랑한 차가 ‘포니’라고 말했다. 1975년 ‘포니’가 태어난 그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정세영 회장과 함께 펑펑 울었어요. 만드는 제품을 사랑해야 회사가 잘되는 거예요. 우리 세대는 작은 회사가 커가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어요. 요즘 젊은이를 옛날 잣대로 평가하면 잘못이죠. 세상이 달라졌어요. 옛날 방식으로 경영하는 것도 모순이고요.”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큰아들에겐 ‘포니’, 작은아들에겐 ‘포터’를 보는 대로 세게 했어요. 가족보다 자동차를 더 사랑한 사람이죠.”

    나무를 돌보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이 사랑스럽다. 해가 중천에 떴다. 햇빛을 받은 솔잎이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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