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6

2011.07.18

동성애자, 당신 운전하지 마!

이탈리아 운전면허 갱신 거부 파문…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성적 소수자는 ‘쉬쉬’

  • 로마=김경해 통신원 kyunghaekhr dlsrnjsim@tiscali.it

    입력2011-07-18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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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자, 당신 운전하지 마!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게이 프라이드 페스티벌’에 참여한 동성애자들.

    이탈리아에서 ‘성 정체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동성애자 운전면허 갱신을 거부한 사건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해 동성애자협회와 인권단체들은 ‘호모포비어 정부’라고 비난을 쏟아냈다. 주인공은 크리스티안 프리스시나(Cristian Friscina) 씨. 그는 1999년 브린디시 도로교통공단에서 신규 운전면허증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역 의무 중 동성애자임을 ‘자진 신고’하자 육군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다시 했다. 그 후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다. 육군 병원에서 기입한 차트에는 ‘면허증 소지에 필요한 심리 신체적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사유가 덧붙어 있었다. 즉 동성애자는 면허 소지 결격사유에 포함된다는 판정이었다.

    국회의원에게도 인신공격과 모욕

    문제는 동성애자 운전면허 발급 거부는 이번이 첫 사례가 아니라는 점. 몇 달 전 같은 이유로 운전면허 발급이 거부된 시실리 청년의 항소심에서 카타니아 지방법원은 ‘교통부와 국방부는 보상금 2만 유로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담당 변호사는 ‘10만 유로의 보상금 요구에 비해 너무 약소하고 심리적 피해 보상을 포함하지 않았다’며 대법원에 항소할 예정이다. 시실리 청년의 사례는 영국 BBC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국제적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문제가 불거지자 기회균등부 마라 카르파냐(Mara Carfagna) 장관은 “동성애를 면허 발급 결격 사유로 간주해선 안 된다.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라며 자체 감사에 들어갔다.

    보수적인 이탈리아는 아직도 동성애자 같은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동성애 혐오증(호모포비어)의 무차별한 확산이 사회문제가 된다. 동성애자에 대한 ‘묻지마 폭력사건’도 자주 일어난다. 최근 레즈비언 국회의원 파올라 콘차(Paola Concia) 민주당 의원이 로마의 중심 국회 부근에서 본인과 파트너에 대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인종차별 폭언을 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목격한 행인과 시민들은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또 다른 동성애자 커플은 콜로세움 부근에서 손을 잡고 산책하다 집단 구타를 당했다.



    파올라 콘차 의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나도 그런 일을 당했어요” 란 제목으로 호모포비어 피해가 있으면 고발해줄 것을 호소했다. 며칠 만에 수백여 명이 동성애자란 이유로 당한 폭력 경험담을 페이스북을 통해 털어놓았다.

    이탈리아는 주변 유럽국가에 비해 동성애자에 대한 권리 보호나 사회적 인권 의식이 낮다. 인권 보호 단체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2011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동성애자 인권 보호가 형편없다. 이 보고서는 일부 정치인의 동성애자에 대한 극단적인 편견이 동성애 혐오증을 부추긴다고 분석했다.

    얼마 전에는 스웨덴 가구 인테리어 유통업체 이케아가 제작한 동성애자 모델 광고를 놓고 파문이 일었다. 이 광고는 쇼핑백을 든 두 남성이 손잡고 있는 뒷모습 사진에 ‘우리는 모든 유형의 가족에게 열려 있습니다’란 문안을 담았다. 카를로 조바나르디(Carlo Giovanardi) 가족부 장관은 “이케아 광고는 이탈리아 헌법과 전통 가족상에 위배된다”며 “스웨덴 회사가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헌법에 논란을 일으키는 건 잘못됐다고 본다”고 비난했다. 조바나르디 장관은 또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커플만이 전통적으로 ‘정상적인 가족’으로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이 발언은 이탈리아 동성애자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좌파환경자유당은 피렌체 이케아 대리점 앞에서 동성애자가 단체로 키스하는 키스-인(kiss-in) 퍼포먼스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반(反)인종차별 사무소(Unar)의 연구에 따르면 ‘이탈리아인 4명 중 1명은 동성애자와 이웃이 되기를 거부한다. 이념과 정치 성향을 떠나 이탈리아 사회에는 뿌리 깊은 동성애자 혐오증 있다.

    나폴리타노 이탈리아 대통령은 지난 5월 16일 세계 반(反)동성애혐오증 날에 “동성애자 혐오증은 민주 국가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르치게이(Arcigay) 협회 및 인권단체 에콸리티 이탈리아(Equality Italia) 등 관련 단체는 한목소리로 ‘정부는 조속한 반동성애혐오증 관련법을 제정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사실상 반동성애혐오증 관련법 제정에 미온적이다. 야당인 민주당(PD)이 발제한 관련법은 국회가 무려 959일이나 방치하다가 결국 국회 사법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관련법 초안은 동성애혐오증과 트랜스혐오증을 형법으로 인정하며 기회균등부 장관이 반동성애혐오증과 반트랜스혐오증에 관한 정책 실행 상황을 국회에 연례 보고서로 제출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나 세계 반동성애 혐오증의 날 이틀 뒤인 5월 18일, 베를루스코니 연정 소속 의원은 관련법 제정에 무더기로 반대표를 던졌다. 성난 기회균등부 장관은 야당 편을 들며 관련법 제정에 의도가 없는 현 정부에 강한 실망을 표시했다.

    동성애 관광객 유치 변화의 조짐도

    동성애자, 당신 운전하지 마!

    동성애자를 모델로 세워 파문을 일으킨 이케아 광고. 세계적 가구유통업체인 이케아는 이 광고에 ‘우리는 모든 유형의 가족에게 열려 있습니다’라는 문안을 담았다.

    반동성애혐오증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강 건너 불 보기다. 사실혼조차 법적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므로 동성애자 커플은 아무런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 수십 년을 같이 살았다 해도 배우자 사망 시 유산 상속이나 배우자의 연금 수령은 꿈도 꾸지 못한다. 동성애자임을 알면 집 주인이 임대도 잘 해주지 않는다. 보수적인 이탈리아에서 성적 소수자임을 떳떳하게 밝히고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는 아직 미미하다. 정계에서는 현직 몇몇 국회의원과 유럽 최초로 트랜스젠더 국회의원을 지낸 블라디미르 룩수리아, 풀리아 현 주지사 니키 벤돌라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그 외에는 영화, 패션, 디자인, 방송 등 동성애자에 비교적 관대한 특수 직업 몇 군데에서만 가능하다. 게이 프렌들리(Gay Friendly)한 북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변화의 조짐은 보인다. 토스카나 주는 이탈리아 20개 주 중 최초로, 공식 관광 사이트에 동성애 관광객을 위한 맞춤형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호텔, 민박, 레스토랑, 디스코텍, 해수욕장 등 게이 프렌들리 정책에 참여하는 관광업체 리스트를 제공, 동성애 관광객의 요구 사항을 반영했다고 홍보한다. 사실 동성애 관광객은 틈새시장이다. 국제관광기구 조사에 따르면 연간 전 세계 동성애자 관광객은 7000만 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고객층이다. 토스카나 주정부는 열린 사고방식으로 모든 관광객을 편견과 차별 없이 환영하는 첫걸음마를 시작했다. 6월 1일부터 11일까지 로마에서 대대적인 동성애자 인권 집회인 유로프라이드(Europride) 행사가 열렸다. 일 년에 한번 이때만큼은 동성애자라고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목이 터져라 권리 보호를 외칠 수 있다. 365일 법적으로 떳떳하게 차별 없이 모든 권리가 보장되는 그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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