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0

2011.06.07

여기가 어딤까? 한국임까?

연극 ‘연변엄마’

  • 현수정 공연칼럼니스트 eliza@paran.com

    입력2011-06-07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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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어딤까? 한국임까?
    연극 ‘연변엄마’는 조선족 여인의 눈을 통해 인간성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조명한다. 이 작품은 한국이 겉으로는 경제적, 과학적 발전을 이룬 것 같지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윤리의식, 그리고 행복지수는 바닥을 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낼모레면 예순인 복길순이 밀입국한 것은 한국에 간 뒤 소식이 끊긴 딸을 찾고 아들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서다. 그의 아들은 한국에서 일하다 산업재해만 입은 채 중국으로 돌아왔다. 길순은 부유한 집에 가정부로 취직한다. 그러고는 틈날 때마다 딸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닌다.

    극은 길순이 관계 맺고 있는 상반된 계층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그가 일하는 주인집이나, 딸을 찾기 위해 뒤지고 다닌 화류계나 병적이긴 마찬가지다. 상류층 가정은 위선과 강박으로 점철해 있고, 밑바닥 인생들은 인간이 물건처럼 팔려 다니는 환경에 익숙하다. 이 작품은 특히 하층민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들은 ‘돈’을 중심에 둔 채 미친 듯이 돌아가는 사회 변방에서 만신창이가 된다. 열심히 일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꿈은 ‘코리안 드림’이라는 말만큼이나 공허해 보인다. 결말 역시 어둡다.

    극 말미에 ‘꼭 딸을 찾아야 하고, 꼭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길순의 의지와 희망은 산산조각 난다. 또한 그의 건강하고 따뜻하던 정신과 마음까지 어느새 피폐해져 버린다. 그는 정신줄을 놓은 채 혼잣말을 한다.

    “여기가 어딤까? 여기가 한국임까?”



    이 작품은 일말의 희망도 용납하지 않는다. 젊었을 때 사회 정의를 외쳤다던 주인집 남자는 현재 시위 진압기구를 생산하는 회사의 오너고, 봉사단체와 학생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그 집 아들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밥그릇 지키기’에 혈안이다. 그나마 그 집 딸이 가장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프랑스병’과 ‘공주병’에 걸린 채 버릇없는 행동을 일삼던 그는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준 길순에게서 ‘엄마 냄새’를 맡는다. 그리하여 그렇게도 원하던 1000만 원짜리 개를 분양받지 않고, 그 돈을 길순에게 주려 한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트라우마와 치매에 시달리던 할아버지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작품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따지지 않는다. 그 대신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파악하기 어려운 ‘교착상태’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가진 의도는 조선족 여인의 역경을 통해 눈물을 자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낯선 눈’을 통해 사회 이면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도록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런 만큼 감정이입을 하기보다 공연임을 인식하며 이성적으로 관람하도록 만드는 장치들을 사용한다.

    차가운 색감의 무대,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음색의 음악은 비인간적이고 병적인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중앙과 양옆의 상단 등 세 곳에 자리한 화면에서는 자막과 영상이 투사된다. ‘연변엄마’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담은 대본과 강애심, 김대건, 류태호 같은 중견 배우의 연기가 돋보이는 연극이다. 이 작품은 6·25전쟁, 이념 대립, 계층 간 단절, 정체성의 혼란 등 현대사의 이슈를 아우르며 대한민국의 좌표를 묻는다. “여기가 어딤까?”라는 질문이 우리 마음속에서 매일 웅성거릴 법하다. 6월 12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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