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0

2011.06.07

교착 상태 즐기는 중국 한반도는 ‘베이징 프레임’에 갇혀

김정일 訪中 ‘구호외교’ 사실상 헛걸음…6자회담 속내 제각각 북핵 문제 난망

  • 조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chomin@kinu.or.kr

    입력2011-06-03 1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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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착 상태 즐기는 중국 한반도는 ‘베이징 프레임’에 갇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일주일간의 중국 ‘비즈니스 투어’를 마무리했다. 2000년대 들어 일곱 번째 비공식 방문이자, 지난해 두 차례 정상회담에 이은 9개월 만의 방중이었다. 중국 땅 투먼(圖門)에서 여정을 시작한 김 국방위원장은 무단장(牧丹江)과 하얼빈(合爾濱), 창춘(長春), 양저우(揚州), 난징(南京), 베이징(北京)을 거쳐 단둥(丹東)에서 압록강철교를 건너는 귀국길에 이르기까지 20년 전 김일성 주석의 6000여km 방중 노정을 그대로 따랐다.

    지금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중첩된 현안을 타결 짓고 활로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였다. 현안은 크게 △후계 구도 지지 문제 △북한 비핵화 문제 △경제 협력 문제로 압축된다. 오랜 기간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제재를 받아온 데다,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로 한국과 미국은 대북 압박을 한층 강화했다. 2012년 김일성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강성대국’ 기치를 내건 북한은 경제 건설을 위해 특히 경공업과 농업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오래전부터 대내적 자원 동원의 한계에 부딪혀 외부 수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통 큰 지원 없이 팔짱 낀 베이징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김 국방위원장은 당장 대중(對中) ‘구호외교’ 발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수만 리 ‘비즈니스 투어’였지만, ‘중국은 손해 본 것 없고 김 국방위원장은 얻은 것 없는’ 여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북한은 중국와의 빅딜을 통해 ‘통 큰’ 지원을 기대했겠지만, 중국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오히려 초조할 수밖에 없는 김 국방위원장을 상대로 한 중국의 ‘길들이기’가 본격화한 모습이다.

    먼저 김 국방위원장은 5월 25일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후계 구도에 대한 지지를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후 주석은 원론적인 답변만 했을 뿐, 직접적이고 분명한 발언은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후계 구도에 대해 지지를 얻으려고 상하이방(上海幇)의 대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만나는 등 치밀한 사전 작업을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던 셈.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전한 후 주석의 발언 역시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전통적인 중·조 친선의 바통을 굳건히 이어가는 데 역사적 책임을 다해갈 것”이라는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북한의 후계자 문제는 중국이 간여하거나 개입할 사안이 아니다. 더욱이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유례없는 세습 후계 구도, 그것도 국제 사회의 조롱거리인 ‘풋내기’ 후계자 옹립에 대한 지지라면 더욱 그렇다. 중국 지도자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중국 인민의 일반 정서에도 맞지 않기 때문.

    핵문제와 6자회담 역시 이번 방중의 주요 이슈였다. 중국은 이미 대(對)한반도 정책의 주안점을 ‘북한 체제 안정’에 뒀다. 2020년까지를 ‘전략적 기회의 시기(戰略機遇期)’로 정하고 중국이 발전하는 데 유리한 주변 환경 조성을 목표로 잡은 것이다. 이에 따라 2009년 7월 중순 개최한 공산당 중앙상무위원회, 곧이어 열린 당과 외교부 연석회의에서 중국 정부는 ‘전쟁 방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한반도 비핵화’보다 상위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직후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한 제1차 미·중 전략경제대회를 통해 공개한 중국 측 처지는 북한의 ‘합당한 안보 우려(reasonable security concerns)’ 해소와 북미 직접 대화(direct talks)라는 두 가지 사안이 골자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중국은 유엔의 대북 결의안을 지지한 바 있지만, 이내 전략적 토론을 거쳐 북한 체제의 안정을 중시하는 노선으로 선회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대북 압박을 완화시키면서 북한의 체제 안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것. 올해 열린 미국과 중국 간 주요 회담에서도 이러한 베이징의 한반도 정책을 재확인했다. ‘김정일 길들이기’ 역시 이러한 전략 구도 속에서 북한을 관리하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6자회담에 대한 전망은 말 그대로 오리무중이다. 과연 중국 처지에서 6자회담 재개가 절실하고 절박한 문제일까. 최근 중국은 한국과 미국의 처지를 고려해 회담을 단계적으로 재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 간 회담 → 북미 접촉 → 6자회담’ 단계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한국과 북한의 ‘남북대화’ 원칙을 존중하는 한편, 핵문제 당사국인 미국과 북한의 ‘직접 대화’를 강조함으로써 한국과 미국을 먼저 배려한 모습에 가깝다.

    북한은 2010년 11월 우라늄 농축설비와 초현대식 제어시설을 공개한 바 있다. 미국으로선 악몽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는 순간이었고, 북핵 문제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북핵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내세웠다. ‘전략적 인내’는 북한이 더는 버티지 못하리라는 기대 섞인 전망을 반영하지만, 실제로는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의 미국식 표현이기도 하다. 지금 미국은 북핵 문제의 새로운 국면에 내심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속수무책인 실정이다. ‘워싱턴의 아마추어들’이 중국만 쳐다보는 이유다.

    서울 워싱턴 찍고 베이징에서 블루스

    북핵 문제가 한국과 미국의 문제라고 볼 때, 이 문제를 풀지 못하는 교착 상태야말로 중국 국익에 가장 부합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은 6자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되는 상황을 거부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6자회담이 순항해 북핵 문제를 풀어나간다면, 미국의 대외 전략 부담은 상당 부분 해소되고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개선으로 북한의 대중 의존도 또한 약화될 수 있다. 이러한 동북아 전략 구도의 변화가 중국에 반드시 이익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요컨대 중국 처지에서 보자면, 북핵 문제가 풀려가는 상황을 거부할 이유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나설 이유도 없다. 6자회담 교착 국면 또한 중국이 조장할 필요가 없지만 적극적으로 해결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감히 청하지는 못할 일이나 본래부터 간절히 바라는 바(不敢請固所願)’라고도 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중국의 6자회담 단계적 재개 방식은 이를테면 ‘서울에서 출발해 워싱턴을 찍고 베이징에 도착하는’ 코스에 해당한다. 결국 베이징에서 6자가 샴페인을 터뜨리며 ‘다함께 블루스를 즐기자’는 장밋빛 제안인 것이다. 얼핏 보면 매우 환상적이지만, 사실 출발 자체가 쉽지 않다. 반면, 중국으로서는 단계적 재개 방식이 잘 풀려 베이징에 6자가 함께 모이는 상황이 나쁘지 않고, 첫 출발부터 삐걱거려 좀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도 그리 나쁘지 않다. 현 국면에서는 사실 후자의 상황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나 남북한은 지금 ‘치킨게임’에 돌입한 상태다. 어느 쪽도 함부로 물러서기 어렵다. 한국은 남북대화에 앞서 북한의 폭거와 도발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지만 기대난망이다. 평양은 이미 자신의 행위를 인정 혹은 시인했다가 예상치 못한 국제적 비난과 대외 전략의 역효과를 초래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2002년 9월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 국방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문제를 인정했을 당시의 후폭풍이 대표적 사례다. 이후 사회당을 비롯해 북한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던 일본 내 진보세력은 궤멸하다시피 했고 현재까지도 납치 문제는 북·일 관계를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김 국방위원장의 ‘고백 외교’가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 또 하나의 예로, 그해 10월 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 측의 추궁에 ‘모호한 시인’으로 대응함으로써 2차 핵 위기를 촉발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이제까지 천안함 폭침과 무관하다고 주장해온 북한이 갑자기 ‘사과’한다면, 이후 남한 사회에서 발생할 정치·사회적 후폭풍은 앞서의 사례보다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당연히 북한의 사과를 요구해야 하고, 북한은 좀처럼 사과할 수 없다. 남북한의 제로섬게임 구도 교착을 타개하기 어려운 상태가 이어지고, 그에 따라 6자회담의 단계적 재개 방식 가운데 첫 단추인 남북대화는 출발조차 힘들어진다. 어렵사리 첫 관문을 넘는다 해도 남북 사이의 불신, 바닥 수준인 북미 신뢰 수준을 감안한다면 워싱턴과 평양 간 협상 또한 순조롭게 풀릴 리 없어 보인다.

    더욱이 이러한 교착 국면의 장기화는 한미 양국 사이에 갈등이 생길 소지마저 내포한다. 북미 대화 순서를 기다리는 미국 워싱턴의 눈으로 보자면, 북한의 대화 공세에도 남북대화가 재개되지 않을 경우 이를 서울의 강경 대응 탓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6자회담 체제에 주체적인 견해를 견지하지 못한다면 서울의 뜻과 상관없이 ‘국제 거래’가 이뤄질 수도 있다. 중국의 심모(深謀)와 원려(遠慮)는 이 지점까지 계산에 넣어둔 듯하다.

    ‘발상의 전환’ 없이 해법 불가능

    교착 상태 즐기는 중국 한반도는 ‘베이징 프레임’에 갇혀

    5월 16일 방한한 미국 국무부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서울 외교통상부 청사에 들어서고 있다.

    이렇듯 중국은 6자회담의 단계적 재개 방식의 제안으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겼다. 남북한은 물론 미국까지 당사자의 처지를 모두 존중하는 명분을 과시하는 한편, 북핵 문제의 교착 국면을 즐기면서 자신의 길을 가는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대북지원 문제다. 김 국방위원장이 가신들을 대동하고 ‘비즈니스 투어’에 나선 가장 급박한 동기는 두말할 것 없이 중국과의 경제 협력 때문이다. 김 국방위원장은 지난해 베이징 정상회담 당시 ‘최신형 전투기 수십 대, 300억 달러 상당의 경협 지원, 매년 원유 100만t, 쌀 100만t 긴급 지원’ 등의 청구서를 내밀었다고 전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중국의 지원은 충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중 경제 협력 사안 가운데 핵심은 나선특구 개발과 나진항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개항한 나진항은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두보로,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다. 러시아는 이미 나진항의 일부 이용권을 확보해둔 상태고, 일본은 나진항이 누구 손에 들어갈지 초조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한반도 동해 출해권(出海權)을 확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동북3성 개발이나 물류 처리를 위한 창지투(長吉圖) 개발 계획과 연계해 나진항 문제에 접근한다. 나선특구는 평양에서 멀리 떨어져 개방 효과를 차단할 수 있는 까닭에 북·중 경제 협력의 중심지 구실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나진항이 중국 수중에 들어가면 중국은 핵심 전략 요충지를 확보하는 셈이 된다. 이 경우 일본, 러시아, 미국은 수년 후 나진항에 중국 군함이 기항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할 테고, 이는 특히 일본에게 매우 괴로운 일이 될 것이다. 중국은 북·중 국경에서부터 나진항까지 잇는 직선 고속도로를 내고 대대적인 부두 개축 및 신축을 원하지만, 전략적 가치를 감안한다면 나진항은 북한으로서도 쉽게 넘겨줄 수 없는 아주 큰 협상 자산이다. 압록강의 황금평 개발 문제와는 성격이 다른 사안이다.

    이에 김 국방위원장은 나진항 문제의 반대급부로 중국의 대대적 지원을 약속받는 ‘빅딜’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진항의 대대적인 신·개축이나 출해권 전격 보장 이전에 중국의 대규모 경제 협력과 지원 조치가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중국은 김 국방위원장이 설정해둔 구도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면서, 중국 주도로 상황을 끌고 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세 차례의 정상회담을 통해 바짝 고삐를 죄는 ‘김정일 길들이기’의 향방을 엿볼 수 있는 핵심 포인트가 바로 나진항 카드를 둘러싼 줄다리기인 셈이다.

    다시 6자회담 문제로 돌아가보자. 갈 길이 바쁜 김 국방위원장은 중국의 의도와 책략을 이미 간파한 듯하다. 그는 중국의 단계적 재개 방식 제안에 대응해 ‘6자회담 직행’을 주장하고 나섰다. 세 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거의 매달리다시피 베이징을 설득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미국과 한국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원할 리 없는 중국은 여전히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이렇듯 한반도와 주변 여섯 국가의 속내는 말 그대로 제각각이다. ‘전략적 인내’를 외치면서도 사실상 속수무책인 미국, 치킨게임 구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한국과 북한, 한반도 문제에 적당히 개입하려는 러시아, 초청받지 못한 채 문간을 기웃거리는 일본,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표정 관리’에 애쓰는 중국까지. 결론적으로 이들은 모두 중국이 설정해둔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질문은 마치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복잡하게 꼬인 북핵 문제를 풀어낼 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물론 답은 자명하다. 북핵 문제를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당사자가 ‘새롭고 대담한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꼬인 매듭을 단칼에 풀었듯 북핵 문제 해결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 이는 중국의 한반도 전략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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