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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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조 일병’은 철모 찾으려다 사고死했다

대법원, 억울한 의문사 ‘사인 조작’ 판결…軍의 자살 판정 뒤집어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1-05-23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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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조 일병’은 철모 찾으려다 사고死했다
    30여 년간 풀리지 않던 고(故) 조모 일병 사망사건에 드디어 마침표가 찍혔다. 대법원은 4월 14일 “1978년 육군 제21사단 동계훈련 마지막 날 사망한 조 일병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사고사한 것으로, 당시 조 일병의 사인이 조작됐다”며 “국가는 유가족에게 2억 원의 피해보상액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이는 사실상 대법원이 1978년 사건 직후 국방부 헌병대의 조사 결과와 2009년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의 ‘진상 규명 불능’ 결론, 그리고 1심 재판부의 판결까지 한 번에 뒤엎은 것으로 매우 이례적인 판결이다. 그 순간 군의문사위의 이 사건 담당 조사관이던 박용덕(건강세상네트워크 사무총장) 씨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만약 망인(亡人)의 혼(魂)이 있다면 분명히 기뻐했을 거예요.”

    박씨는 군의문사위 민간조사관으로 2007년 9월부터 조 일병의 사건을 맡았다. 박씨는 “드디어 마음속 부담이 사라졌다”며 밝게 웃었다. 과연 조 일병의 죽음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2006년 1월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 직속 군의문사위를 신설했다. 군인, 전·의경으로 복무하던 중 죽은 사람의 사망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고 의심할 상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재조사에 나서겠다는 것. 2006년 1년간 군의문사위는 600건의 진정을 받았다. 군의문사위는 검사, 경찰, 군 헌병수사관 등 공무원뿐 아니라, 시민단체 소속 활동가, 인권운동가 등을 포함한 민간조사관도 30여 명 채용했다. 1991년 대학 졸업 후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박씨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를 거쳐 2007년 9월 군의문사위 민간조사관으로 임용됐다.

    진상 규명보다 ‘취하’에 바빴던 군의문사위



    군의문사위에 진정된 사건 대부분은 군대 내 자살과 관련한 것이었다. 타살 혹은 사고사인데 자살로 조작했거나, 선임의 가혹행위 등 군내 내무 부조리로 자살했는데 가정 형편, 내성적인 성격, 애인 결별 등 개인 문제로 자살한 것처럼 사망 원인을 조작한 경우다. 박씨는 “부모 처지에서는 군에 간 생떼 같은 자식을 잃은 것도 괴롭지만, 그 방식이 자살이라면 더욱 상처”라고 말했다. 자살을 ‘개인적 병리 현상’으로 보는 한국 사회에서는 자식과 형제를 잃고도 주변의 수군거림과 손가락질을 견뎌야 한다. 물론 국가의 보훈혜택도 받지 못한다.

    군의문사위는 이들 억울한 가족의 사연을 진심으로 들어준 ‘첫 사람’이다. 그동안 유가족은 군대에서 사망한 가족의 죽음에 의문이 있어도 맘껏 하소연하지 못했다. 2008년 3월 ‘군의문사위 중간평가’ 때까지만 해도 군의문사위는 180여 건의 진상을 밝혀내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하지만 정권이 바뀐 후인 2008년 말 군의문사위의 활동은 제약을 받았다. 2008년 12월 31일 군의문사위 법정 활동 기간 마감을 앞두고 ‘군의문사위 흔들기’가 본격화했던 것. 한나라당 일부 의원은 사실상 군의문사위를 폐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법안까지 제출했다. 우여곡절 끝에 군의문사위는 2009년 12월 31일까지 일시적으로 활동이 연장돼 2009년 2월부터 활동을 재개했다.

    2009년 초 군의문사위에 남은 시간은 10개월 남짓. 하지만 진정된 600건 가운데 사건이 종결된 것은 353건에 불과했다. 3년간 처리해도 힘들 사건을 1년 안에 완료해야 하는 상황. 임기 연장도 더는 어려웠다. 박씨는 “당시 군의문사위 내부적으로 조사관에게 ‘신속히 사건을 처리하라’고 요구했다”고 전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조사관은 사건을 심도 있게 조사하기보다 가족을 설득해 1건이라도 더 ‘취하 결정’을 받아내는 데 관심이 많았다. ‘취하 결정’을 받는 것을 기각, 진상 규명 불능, 진상 규명처럼 ‘1건의 민원사건을 처리한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돌아보면 당시 조사관들은 더 조사할 여지가 있는 사건인데도 빠르게 ‘취하’받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박씨가 조 일병 사건을 종결하고 조사보고서를 올린 것은 바로 이즈음이다. 사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때는 1978년 2월 11일. 강원도 양구에 위치한 육군 제21사단이 일주일간 진행한 대대 동계훈련 마지막 날. 대부분의 병사가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으며, 훈련 때문에 제대로 자지 못해 지쳐 있었다. 오전 10시경 마지막 고지 점령 작전을 진행했다. 병사들은 산 중턱에서 잠깐 쉬었는데 대부분 꾸벅꾸벅 졸았다. 조 일병도 마찬가지였다.

    휴식시간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조 일병은 갑자기 철모가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주위를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조 일병은 ‘아마 뛰어올라오는 동안 흘렸을 것’이라 생각하고 분대장과 선임 사수에게 “철모를 아래에 떨어뜨리고 온 것 같다. 찾아서 따라 올라가겠다”고 보고했다. 분대장은 허락했고 조 일병은 허겁지겁 산을 내려갔다. 그때 옆에 있던 동료가 조 일병이 앉았던 자리 바로 뒤에서 철모 하나를 발견했다. 조 일병이 잠결에 허둥지둥하다 철모를 뒤에 빠뜨려놓고 찾지 못했던 것. 동료는 조 일병에게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조 일병은 뒤돌아보지 않았다(훗날 이 동료는 “당시 조 일병은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고 진술했다).

    사고사? 자살? 계속되는 의문

    정오가 돼 고지 점령 작전을 마치고 현장에서 인원 점검을 했지만 그때까지도 조 일병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소대원들은 부대로 돌아가 점심식사를 했고, 소속 소대원들은 산을 내려가며 조 일병을 찾았다. 그러나 조 일병을 찾지 못했고, 오후에 전 부대에 비상을 걸어 실종된 조 일병에 대한 수색작전을 펼쳤다. 작전 지역을 중심으로 중대원이 2인 1조로 조 일병을 찾아 헤맸다. 오후 5시경, 민가와 인접한 야산 초입에서 “찾았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수색 작업을 하던 병사가 한자리에 모였고, 산비탈 소나무 옆에 조 일병은 반듯이 누워 사망한 채였다.

    그는 왜 그곳에서 사망한 것일까. 이튿날인 2월 13일 작성된 군 공문서 ‘매화장보고서’에는 조 일병의 사인이 자살로 적혔다. 이 보고서에 적힌 사망 경위에 따르면 “조 일병은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신경통까지 있어 신체가 허약했는데, 훈련 도중 철모를 분실한 상황에서 처벌을 받을까 두려운 마음에 자살했다”는 것. 매화장보고서는 또한 사건 현장을 “소나무에 방한수갑 끈을 풀어 묶고 올가미를 만들어 자신의 목에 건 후 70도 경사 지점으로 미끄러져 사망했다”고 묘사했다.

    박씨는 이 매화장보고서를 보면서 사건에 의혹을 갖게 됐다. 조사 결과 매화장보고서에 적힌 사망 장소는 실제 조 일병이 사망한 곳이 아니었다. 조 일병이 사망한 채 발견된 곳은 매화장보고서에 적힌 위치에서 직선거리로 4km 남짓 떨어진, 경사 15도 정도의 평평하고 양지 바른 땅이었다. 매화장보고서에서 말한 70도 경사의 산비탈은 협곡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또한 매화장보고서는 “소나무 밑동에 끈을 매단 후 미끄럼틀을 타듯 산비탈을 미끄러져 목을 맸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자살 방법이 아니다. 실제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나무에 목을 매지, 거의 평평한 땅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것.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을 들어보면, 누가 봐도 조 일병이 동사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2월 중순으로 날씨가 매우 추운데 조 일병은 사고 지점까지 빠르게 달렸을 터. 몸에 땀이 난 상태에서 갑자기 바람이 많이 불면 저체온증에 걸릴 위험성이 높다. 게다가 잠도 못 자고 많이 지친 상태. 박씨는 “조 일병이 뛰어 내려갔다가 지친 상태에서 소나무 옆 양지 바른 곳을 발견했으며 그곳에서 쉬어가려는 생각으로 앉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고 그 상태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박씨는 당시 조 일병과 함께 근무했던 목격자 50여 명을 조사했다. 대부분 성심성의껏 조사에 응했다. 점차 심증은 확실해졌다. 조사받은 사람 중에는 “누가 자살했다고 하더냐. 조 일병은 동사했다. 나는 당연히 동사로 처리된 줄 알았다”며 뒤늦게 안타까워한 사람도 있었다. 박씨는 특히 분대장이던 황모 씨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황씨는 첫 조사 이후 전화를 걸어 ‘제가 아는 사실에 대해 못한 말이 있지만 앞으로는 모두 말하겠다’고 하더군요. 조사받을 때는 불이익을 당할까 말을 아끼다가, 집에 가는 차에서 조 일병이 떠올랐는데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려면 조 일병의 억울함을 밝혀야 한다고 결심했대요. 그분이 함께 근무했던 병사들의 인적사항, 고향, 가족관계까지 떠올려 조사가 한결 쉬웠죠.”

    진술자 대부분 “모르겠다” 발뺌만

    그날 ‘조 일병’은 철모 찾으려다 사고死했다

    조 일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낸 박용덕 씨.

    사고 현장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황씨 덕분이었다. 반면, 당시 선임하사 이상의 직업군인은 군의문사위 조사에서 대부분 ‘모르쇠’로 일관했다. 행여 불이익이 미칠까 봐 입을 다물었던 것. 박씨는 “발뺌 하는 방식도 모두 유사했다”고 회상했다. 먼저 ‘나는 당시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거나 ‘사고 현장에 없었다’고 부인했으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면 ‘나는 멀리 있어서 조 일병 시신을 직접 보지 못했다’고 말을 바꿨던 것.

    특히 조 일병의 소대 선임인 한 직업군인은 “나는 조 일병을 수색하던 중 부대 옆 민가에서 공중전화로 부대에 전화를 걸었고, ‘찾았다’는 말을 듣고 바로 하산했다. 조 일병 시신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고 진술했다가 대질조사를 받던 황모 씨와 또 다른 분대장 김모 씨가 “그 당시에 공중전화가 어디 있었냐”고 소리치자 얼굴이 질린 채 입을 닫아버렸다.

    2009년 9월 박씨는 ‘조 일병 사건은 자살이 아닌 사고사’라는 내용으로 1차 보고서를 완성했다. 그런데 당시 담당 과장은 이 보고서에 대해 마뜩잖아했다. 조 일병이 자살이 아닌 사고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누가 그 사인을 조작했는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진상 규명’ 안을 올리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판단이었다. 목격자 진술과 정황으로 봤을 때 사인 조작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가해자의 자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의문사위 특성상 가해자의 자백으로 사인을 변경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결국 군의문사위는 담당 과장과 주무위원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사건에 대해 ‘진상 규명 불능’ 결론을 내렸다. 박씨는 군의문사위의 결정에 답답해했다.

    “군의문사위의 규명 과정은 보통 범죄사건과 다를 수밖에 없어요. 많은 세월이 지나 사고 현장이나 수사기록 등 물증이 대부분 없어졌기 때문에 사실 관계를 구성할 때 당사자들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거든요. 조사 결과 사고 현장에 대한 목격 진술이 일관되고, 누가 봐도 조작을 의심할 만하면 누가, 어떻게 사건을 조작했는지 특정할 수 없더라도 국가 책임을 인정해야 하죠. 하지만 당시 이 사건에 대한 군의문사위 결정에서는 엄격한 형사소송법의 입증 수준을 적용해 결국 불능 처리했죠.”

    조 일병 사건이 군의문사위에서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린 날 밤, 박씨는 조씨 사건을 진정한 조씨의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씨는 유가족이 아쉬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안타까웠다. 그는 유가족에게 “어떤 방법으로든 망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싶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한다면 내가 백방으로 돕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군의문사위 활동이 끝난 2010년 1월 유가족은 박씨의 도움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했다. 6월 25일 1심 판결이 났다. 원고 패소. 박씨는 “예상한 결과였지만 판결문을 보는데 화가 치솟았다”고 회상했다.

    “판사가 ‘우리가 보낸 서면이나 자료를 보기나 한 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허술한 판결문이었어요. 만일 1심 기각판결문이 좀 더 세밀하게 기각 근거를 논증했다면 저도 마음을 접고 포기했을 거예요. 많이 아쉬웠죠.”

    그는 가족에게 전화로 결과를 알렸다. 그러자 가족은 2심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박씨는 마지막으로 가족을 설득했다. 허술한 판결문에는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박씨는 항소를 거부한 가족에게 “인지대를 내가 대신 낼 테니 2심 소송을 진행하는 데만 동의해달라”고 제안했다. 가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인권 변호사 출신인 강 변호사와 박씨는 2심을 준비했다. 박씨의 친구인 강 변호사도 도의적인 이유로 소송에 참여했다.

    그리고 12월 14일 서울 고등법원은 이례적으로 1심을 뒤엎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게다가 고등법원은 피고인 국가 측에 원고인 조 일병 유가족이 제기한 피해보상금 1억 원의 2배가 넘는 2억여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처음 이 소식을 듣고 박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이 모두를 사건 담당 판사의 공으로 돌렸다.

    소멸시효 고려 1~2년 안에 손배소 청구를

    “판사가 경기 성남시 국가기록원에 직접 가서 관련 기록도 살펴봤어요. 결국 사고 현장을 찍은 영상을 보고 난 후 ‘여기는 목을 맬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라고 판단한 거죠. 저는 사실 대한민국 사법부에 불신이 많았는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이 정도로 성실한 판사도 있구나’라는 것을 처음 느꼈죠. 이건 망자의 복이에요.”

    올 4월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기각(새로운 재판을 하지 않고 2심을 확정) 판결을 내려 사건은 마무리됐다. 가족은 2억여 원 남짓한 보상금을 받게 됐다. 자기 일도 아닌데 앞장선 박씨에게 “진상 규명이 이뤄졌으니 수고비라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박씨가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에요. 사실 가족 처지에서는 다른 판례에 비춰보면 피해보상금을 좀 더 받을 수 있었는데, 제가 인지대를 부담하는 과정에서 피해보상금을 최소로 청구하다 보니 실질적으로 가족이 받는 보상금이 줄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의 욕심일 수 있지만 형평성에 비춰보면 아쉬운 마음도 있죠.”

    박씨는 “이 사건이 널리 알려져 많은 군의문사 피해자 가족이 국가에 적극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의 경우 소멸시효가 있어 새로운 사실을 안 이후 3년 이내에 소를 제기하지 않으면 손해배상을 받기가 쉽지 않다. 그는 “2009년 말 군의문사위가 활동을 마무리했기 때문에 당시 조사했던 사건의 소멸시효는 2012년 내외로 마무리된다. 서두르지 않으면 망자의 억울함을 풀 마지막 방법도 사라지는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5월 21일 토요일에도 군대에서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와 함께 망자의 억울함을 풀어줄 증인을 찾으러 갔다.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억울함이 풀리기만을 바라는 ‘조 일병’이 많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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