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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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수십 년간 운용한 그들에게서 벤치마킹 절대 필요

  • 매일경제신문 특별취재팀(설진훈 차장, 남기현·이소아·김정환 기자)

    입력2011-04-25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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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 거주하는 만 65세 이상 고령자가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다. 서울시는 2010년 주민등록 인구통계자료에 근거해 2010년 말 현재 서울시 고령인구가 100만2770명이라고 밝혔다. 서울시 전체 인구가 1031만2545명이므로, 10명 중 1명은 65세 이상인 셈이다.

    이처럼 고령화사회는 미래 모습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다. 또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시작됐다. 즉, 돈벌이 없이 연금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자, 앞으로 대비해야 할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연금, 특히 퇴직연금은 생필품이 됐다.

    지금 금융업계는 퇴직연금 관련 부서와 인력을 마련하고 마케팅에 열을 올린다. 그러나 아직은 초기 단계다. 수십 년간 본경기를 치른 해외 선진 시장에서 배울 건 배우고, 경계할 것은 대비해야 할 때다. 미국, 영국, 독일, 호주, 일본 등 5개국 퇴직연금 시장을 직접 둘러봤다.

    >>> 미국 “투자요? 당연히 본인 책임이죠”

    근로자 10명 중 8~9명 실적배당형 가입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401K가 뭔지 아세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한 미국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반응이 묘했다. 주차관리회사에서 일한다는 앤디 셔먼은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나요?”라며 오히려 기자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미국의 금융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이곳에 자리한 피델리티 금융그룹 인베스트센터의 총괄 책임자인 리처드 로저스 부사장은 “미국에서 401K는 펀드만큼이나 친숙한 용어”라며 “그만큼 퇴직연금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했다”고 말했다. 401K란 미국 소득세법 401조 K항을 일컫는 말로, 근로자 스스로 투자 결과에 책임지는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제도를 규정한 것이다.

    또 한 가지 놀라운 부분은 퇴직연금 상품의 포트폴리오다. 은행, 보험, 증권 등 한국의 모든 퇴직연금 사업자는 현재 원리금보장 상품 중심으로 경쟁을 펼친다. 퇴직연금 시장을 은행과 보험이 석권한 만큼 한국의 대표 퇴직연금 상품은 예금과 원리금보장 상품 딱 두 가지로 보면 된다.

    이렇다 보니 누가 더 많은 보장수익률을 제시하는지가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다. 시중 예금금리는 3%대인데 5% 정도의 특별 금리를 쳐주고 콘도 이용권과 무료 건강검진 같은 파격 혜택까지 제공하다 보니, 국내 퇴직연금 사업자 대부분이 적자(역마진)를 면치 못한다. 하지만 미국은 이 부분에서도 한국과 정반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따르면, 2009년 미국 확정급여형(DB형) 퇴직연금 포트폴리오 가운데 은행 예금과 보험사 연금 같은 원리금보장 상품 비중은 13.4%에 불과했다. 반면 주식, 채권 같은 실적배당 상품 비중은 84.6%다. 금융위기 이전엔 실적배당 상품의 비중이 90%를 넘은 적도 있다. DC형 역시 실적배당 비중(2009년 기준)이 82.3%에 달한다.

    미국 최대 공무원퇴직연금기금인 캘퍼스(캘리포니아 공무원 퇴직연금)의 웨인 데이비스는 “주식과 채권이 퇴직연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며 “심지어 부동산까지 전체 퇴직연금 펀드의 성공을 결정짓는 주요 투자처로 인식된다”고 밝혔다.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미국인이 주식을 가장 매력적인 투자 대상으로 생각하는 이면엔 ‘장기 투자 수익률 면에서 주식만 한 게 없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 세계 최고의 증권 전문가로 알려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와튼스쿨) 제러미 시겔 교수에 따르면, 1802년부터 2006년까지 204년간 미국의 주요 투자자산 가운데 수익률이 가장 높았던 것은 주식이다. 1802년 주식에 1달러를 투자했다면 2006년에 1270만 달러를 벌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1802년 소비자물가지수가 1이었다고 가정하면 2006년 소비자물가지수는 16.84가 나온다. 주식상승률이 물가상승률보다 75만 배 높았던 셈.

    은행 예금에서 벗어나 주식과 채권이 중심을 이루다 보니 미국에선 금융사 간 다양한 자산관리 노하우와 운용 역량을 내세워 경쟁을 벌인다. 막대한 퇴직연금 자금이 증시에 투입되면서 증시 안정에 기여하고 증시가 장기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림에 따라 증시에 대한 신뢰도가 다시 올라가는 선순환 구조가 정착해가고 있다.

    >>> 영국 고갈된 공적연금, ‘하이브리드 연금’으로 보완

    정부와 회사가 납입 금액의 절반 분담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영국 런던에 사는 안나는 연봉으로 2만 파운드(약 3500만 원)를 받는 3년 차 직장인이다. 2012년부터 그는 기초연금(한국의 국민연금) 외에 개인연금계좌(Personal Accounts·PA)라는 ‘신종 퇴직연금’에도 의무적으로 돈을 넣어야 한다. 월급의 8%인 133파운드(약 23만 원)를 자동으로 PA에 투자해야 하는 것. 전에 없던 ‘헛돈’이 나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큰 불만이 없다. 8% 납입액의 절반을 외부(회사 3%+정부 1%)에서 분담해주기 때문. 실제로 안나가 내는 금액은 11만 원이다. 이것이 바로 2012년 실행을 목표로 영국 연금위원회가 준비한 연금제도의 시나리오다.

    한국 직장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많다. 일반적으로 연금은 △근로자라면 누구나 가입하는 공적연금 △기업이 근로자 노후를 책임지는 퇴직연금 △개인이 개별적으로 가입하는 개인연금으로 구분한다. 그런데 영국의 새 연금제도인 PA는 전통적 연금 분류 방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PA는 기본적으로 회사가 근로자 노후를 일정 부분 보장하는 DC형 연금으로 분류할 수 있다. 민간연금이면서 공적연금처럼 ‘의무 가입’이 원칙이고, 정부가 납입액 일부를 지원한다. 쉽게 말해 공적연금과 퇴직연금이 뒤섞인 ‘하이브리드(혼합) 연금’인 셈. 영국은 왜 이런 특이한 연금제도를 준비하는 걸까.

    정부가 강제력까지 동원해 퇴직연금 파이 키우기에 나서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령 인구가 급속히 늘면서 공적연금 고갈 속도도 빨라지고 있기 때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영국의 공적연금 소득대체율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낮은 33.5%(2009년 기준)로 나타났다. 은퇴 후 공적연금으로 받을 수 있는 수입이 퇴직 전 급여의 33.5%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OECD 평균치(60.8%)는 물론 프랑스(53.3%), 독일(43.0%), 미국(40.8%)과 비교해도 낮다.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영국은 공적연금과 민간연금을 혼합한 새로운 형태의 퇴직연금을 준비하고 있다. 영국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는 ‘런던월(London Wall)’ 금융가를 직장인들이 바쁘게 걸어가고 있다.

    반면 노동인구 대비 피부양자(65세 이상) 비율은 26.8%로 OECD 평균(23.8%)보다 높다. 공적연금 위기론이 불거지자 영국 정부는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연령을 현재 남성 64세, 여성 60세에서 남녀 구분 없이 2024년부터 66세, 2034년 67세, 2044년 68세로 올려 잡을 계획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연금 고갈을 대체할 수 있는 민간 차원의 노후 보장 안전망이 절실해진 것. PA를 운용하는 노동연금부 산하 개인연금계좌위원회는 강제 가입 부문만 국가가 책임지고 계좌 관리와 펀드 운용은 민간에 위탁한다. 영국이 새 연금제도를 전략적으로 민간에 위탁할 수 있는 배경에는 자국 퇴직연금 시장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 금융산업이 발달한 영국은 유럽 퇴직연금 시장 ‘최대어’로 꼽힌다.

    최근 글로벌 컨설팅업체 타워스 왓슨이 발표한 ‘글로벌 퇴직연금 시장 비교’ 자료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영국 퇴직연금 시장 규모는 1조7910억 달러로 미국(13조1960억 달러), 일본(3조1520억 달러) 다음으로 크다.

    슈로더투신운용 글로벌기관 영업총괄 임원인 가이 헨리크는 “PA에 연금 서비스를 제공할 민간사업자 선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다양한 운용사와 펀드매니저가 운용권을 따려고 본격적으로 경쟁체제에 들어설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 독일 “DC형이라 불안? 최저 수익 보장”

    퇴직연금 안전판 마련에 주력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독일도 공적연금과 퇴직연금 간 ‘이종교배’가 활발하다. 다만 ‘퇴직연금=공적연금의 대체재’로 생각하기보다 퇴직연금마저 공적연금의 ‘연장선’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독일은 공적연금 가입 비율이 경제활동 인구의 82%를 차지한다. 2009년 기준 실질 연금 수령자(2041만 명)가 전체 인구의 25%에 달할 정도로 공적연금 의존도도 높다.

    독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의 알렉산더 암브로스터 경제부 기자는 “월급의 10~15%가 공적연금으로 빠져나가는 데 근로자들이 상당한 부담을 느끼는 게 사실”이라면서도 “언젠가는 자기가 받을 돈이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에 국민 대부분이 공적연금을 ‘필요악’으로 생각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독일 퇴직급여 시장은 이러한 강력한 공적연금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단적으로 퇴직급여 시장에서 가장 널리 운용하는 제도(전체 운용행태의 59%)는 한국의 퇴직금제도에 해당하는 직접보장(Direktzusage) 제도다. 다른 연금에서도 독일 특유의 ‘안정성 먼저’ 원칙이 뚜렷이 드러난다.

    독일에서 퇴직금 다음으로 보편적인 퇴직급여는 연금금고(Pensionskasse)다. 연금금고는 단일 기업 혹은 여러 기업이 합작해 설립한 생명보험회사(이하 생보사)로 보면 된다. 근로자는 이 보험사(연금금고)의 보험 계약자로 인정된다. 아예 기업 전용 보험사라는 연금 ‘보장기관’을 만들어 근로자에게 퇴직급여를 확실히 지급할 수 있도록 수급권을 강화했다. 연금금고가 투자할 수 있는 위험자산(주식) 비중도 40% 이하로 제한된다.

    퇴직연금 이행 형태도 특이하다. 독일에는 전통적인 DB형 연금과 함께 ‘최저 보장 확정기여형’이라는 독특한 DC형 연금이 있다. 근로자가 수익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다른 나라 DC형 연금과 달리, 기업이 최소 약속된 금액만큼은 근로자에게 수익을 보장해주는 연금이다. 실적에 따라 수익이 달라지는 DC형 연금에까지 안전판을 붙여놓은 것을 보면 역시 ‘독일이구나’ 싶다.

    >>> 호주 ‘당근’과 채찍…세제 혜택으로 자발 가입 유도

    퇴직연금 안전판 마련에 주력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슈퍼 애뉴에이션(Super Annuation)’이라고 부르는 호주의 퇴직연금은 양과 질 모두에서 세계 최고로 꼽힌다. 도입한 지 150여 년이 넘은 오랜 역사에, 노동당 정권 중심의 정부가 ‘당근’(세제 혜택)과 ‘채찍’(강제 가입) 정책을 장기간 조화롭고 일관성 있게 추진해온 결과다.

    하지만 시장이 성숙 단계에 이른 현재, 호주 퇴직연금 시장에서 인상적인 것은 근로자의 자발적인 참여다. 실제로 호주는 매달 고용주가 월급에서 떼어 적립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근로자 본인이 원해서 퇴직연금에 추가 적립하는 비율이 총 적립금의 25% 선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많은 국내 전문가가 호주를 ‘본보기 1호’로 꼽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호주 시드니 금융 중심가 마틴 플레이스의 대형 로펌 프리힐스에 근무하는 켄남 변호사. 20대 중반인 그는 50만 호주달러(약 5억6000만 원) 안팎의 원룸아파트를 구입하려고 월급의 절반 이상을 저축하지만, 5% 정도는 따로 떼어 퇴직연금 계좌에 꼬박꼬박 적립한다. 그에게 “부담스럽지 않으냐”고 묻자 “세제 혜택이나 수익률이 월등해 다른 민간 개인연금보다 낫다”고 답했다. 퇴직연금만 꼬박꼬박 적립해도 30년 후 은퇴하면 매월 정상 소득의 60%는 나올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

    한국과 가장 큰 차이점은 회사가 아닌 근로자 개개인이 DC형, DB형 같은 연금상품 유형이나 운용사를 직접 선택한다는 점. 호주 2대 퇴직연금 사업자인 AMP의 브라이언 딜레이니 이사는 “20~30년 장기 적립하는 젊은 층은 주식 비중이 높은 공격형을, 연금 수령(만 56세부터)을 앞둔 중·장년층은 채권 예금 위주의 안정형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가입자 수 기준으로 보면 DC형이 60%로 가장 높고, 혼합형이 37.9%로 두 번째다. 퇴직 직전 급여에 따라 연금지급액이 결정되는 순수 DB형은 2.1%에 불과하다.

    호주는 1992년 현행 강제가입형 퇴직연금인 ‘슈퍼 애뉴에이션 개런티’를 도입했다. 월 450달러 이상을 받는 18~64세 근로자는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했다. 개런티라는 용어는 기업주가 연금 납부를 굳게 확약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기업주의 법정 의무 기여율이 5%였지만 2002년부터 현재의 9%로 높아졌다. 줄리아 길라드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2012년부터 10년간 단계적으로 12%까지 인상하는 안을 추진하지만 자유당의 반대로 다소 유동적이다.

    하지만 실제 현행 적립 비율은 법정 최저치를 훨씬 뛰어넘는 12.5% 선에 달한다. 기업주가 평균 9.4%를 내고 나머지 3.1%는 근로자가 부담한다. 근로자가 전체 적립금 가운데 4분의 1을 원해서 추가로 내는 가장 큰 이유는 세제 혜택 때문이다. 1인당 연간 5만 호주달러(5700만 원)까지 퇴직연금에 추가납입하면 소득세 최저세율인 15%를 적용받는다. 한도만큼 모두 적립해 최저세율을 적용받으면 정상세율(평균 30%)로 세금을 낼 때보다 우리나라 돈으로 최대 840만 원이 줄어든다.

    수령 단계에서는 만 60세만 넘으면 연금소득세가 전액 면제된다. 반면 한국은 수령액의 3~6%를 퇴직 또는 연금소득세로 내야 하며, 매달 쪼개 받을 경우 일시금 수령 때보다 실제 세액이 더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

    호주의 퇴직연금과 증시 성장은 ‘닭과 달걀’처럼 어느 게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호주 증시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촉발한 대형 금융위기에 안정감을 보인 것도 슈퍼 애뉴에이션 개런티(보유 비중 30%)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주 퇴직연금 적립금은 2010년 말 현재 1조3000억 호주달러(1495조 원)로 호주 국내총생산(GDP)의 100%를 웃돌고, 호주 증시의 시가총액(1조2000억 호주달러)도 훌쩍 뛰어넘었다. 주식 등에 장기 투자한 덕분에 지난 20년간 운용수익률이 연평균 6%에 달한다. 수십 년간 장기 투자를 하면서 ‘퇴직연금 적립→주식투자→주가 상승→연금 재적립’의 선순환 구조와 신뢰가 형성된 것.

    한국의 금융투자협회에 해당하는 호주 FSC의 마틴 코디나 이사는 “대형 위기 때 퇴직연금 펀드에서 손실이 나더라도 공적기금에서 보전해주는 장치는 전혀 없다”며 “운용사들이 알아서 안정성과 배당수익을 갖춘 블루칩에 투자한다. 수십 년간 운용하는 장기 투자 문화가 이미 정착했다”고 설명했다.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 일본 “안정성 좇던 DB형 기업연금 이제 끝”

    DC형 도입 기업 5년 새 2배로 늘어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일본의 연금제도는 아시아 어느 나라보다 오래됐다. 이미 1962년에 퇴직연금을 도입했다. 한국의 퇴직연금에 해당하는 것이 일본의 ‘기업연금(Corporate Pension)’인데 그 기금은 74조 엔에 달한다. 최근 이 시장에 심상치 않은 변화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에서 직원 120명 규모의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A사장은 2010년 직원들의 퇴직연금을 DB형에서 DC형으로 바꿨다. 그는 “경기 불황이 계속되면서 연금 적립금이 부족할 때 사업주가 채워넣어야 하는 DB형에 부담을 느꼈다”며 “원래 투자라는 말을 써본 적이 없을 정도로 보수적이었는데 요즘엔 니혼게이자이신문을 사서 주식시장을 지켜본다”고 말했다. 일본 퇴직연금 시장의 변화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일본 퇴직연금은 후생연금기금, 적격퇴직연금, DB형과 DC형 등 4가지로 구분되며 DC형을 제외한 나머지는 기업(사업주)이 운용을 책임지는 DB형이다. 일본 후생노동성과 기업연금연합회에 따르면 2010년 상반기 기준으로 DB형 계약은 7951건인 데 반해, DC형 계약은 3371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2년 3월을 기점으로 적격퇴직연금이 폐지될 예정인 데다 후생연금기금도 고질적인 실적 부진에 시달리면서 시장은 빠르게 DB형과 DC형 양대 체제로 개편되고 있다.

    특히 DC형 시장 확대가 두드러진다. 후생성에 따르면, 2005년 DC형을 도입한 기업은 6664개였지만 2010년 6월 말 현재 1만3222개로 2배가 됐다. 가입자도 2005년 173만 명에서 2010년 5월 말 기준 357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노무라증권 연금플랜부 야노 다쿠지 전무는 “일본의 상위 50개 대기업이 DB형을 도입했지만 그중 절반인 26개사는 DC형도 함께 채택했다”며 “기업들의 컨설팅 수요가 급증한다”고 전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연금보호법’도 DC형 시장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이 법의 골자는 DC형의 세제 혜택을 늘리는 것인데,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 DC형 시장 전망이 밝다. 야노 전무는 “(기업들은) DB형 연금이 어떤 의미에서는 끝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DC형 시장이 과거 10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후소득의 중심 퇴직연금 선진 시장을 가다

    일본은 2006년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도달했다. 퇴직연금은 이들에게 이미 필수품이다. 65세 인구가 19%를 차지하는 요코하마 시의 지역 케어센터에 있는 노인들.

    일본의 퇴직연금 시장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은행과 생보사가 주도한다. 은행과 생보사 중심의 DB형 시장이 형성된 데는 안정성을 중시하는 가입자들도 기여했다. 그러나 2012년 적격퇴직연금이 폐지를 앞두고 전체 퇴직연금 시장의 10%에 달하는 이 자금을 끌어들이려는 금융회사 간 경쟁에 불이 붙었다. 특히 증권사는 DC형 시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한다. 증권사가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 역시 ‘투자자 교육’이다. 교육 목적은 안정성에 집착하는 일본 투자자에게 저금리에 따른 연금자산의 수익률 저하를 깨닫게 하고, 투자와 라이프 플랜을 함께 생각하는 의식을 심어주자는 것이다.

    일본에는 40개 금융회사가 회원으로 활동하는 ‘DC산업협회’가 있는데 최근 이들은 “서로 출혈 경쟁을 하기보다 함께 협력해 DC형 시장 전체를 키우는 게 급선무”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금리 출혈 경쟁에 혈안이 된 한국과는 대조된다.

    야노 전무는 “DB형이든 DC형이든 퇴직연금의 최종 목적은 은퇴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며 “장기 및 분산 투자를 통해 너무 많이 잃지 않는 툴을 개발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새로운 퇴직연금 시장을 잡으려면 투자 대상과 결과의 투명성, 10% 이내의 지속적인 수익률, 투자자의 라이프 컨설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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