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6

2011.02.28

살아남은 자 출구 없는 ‘악몽의 터널’

여수 화재 참사 피해 중국인 노동자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생존과의 전쟁 중’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입력2011-02-28 10: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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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자 출구 없는 ‘악몽의 터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는 리궈호우 씨.

    그곳은 지옥이었다. 2007년 2월 11일 오전 4시 전남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는 화마에 휩싸였다. 보호동 3층 304호에서 발생한 불은 천장을 타고 인근 보호실로 번졌다. 보온을 위해 바닥에 깐 우레탄 매트는 유독가스를 뿜어냈다. 쇠창살에 갇혀 있던 55명의 이주노동자는 손과 발로 쇠창살을 두드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설 연휴로 정직원이 휴가를 떠난 자리를 채운 임시직원은 갑작스러운 화재에 당황해 초동 조치를 제대로 못했다. 스프링클러가 없었던 건물 안에서 결국 외국인 노동자 10명이 숨졌다. 정부는 숨진 김모 씨를 방화범으로 지목했다.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사건 발생 1년 뒤까지는 그 사건 희생자인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문제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2년, 3년이 지나면서 관심은 빠르게 식어갔고 4년이 지난 오늘 우리 사회는 그들의 죽음을 잊었다. 무관심 속에 화재에서 살아남은 외국인 노동자 14명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안고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2월 15일 저녁 서울 금천구 독산동 다문화가족상담센터에서 만난 리궈호우(47) 씨는 처음 불이 난 304호에서 살아남았다. 천장에서 무릎 위까지 유독가스가 차자 리씨 등 8명은 화장실로 대피해 최대한 몸을 바닥에 엎드렸지만 4명은 숨지고 리씨는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됐다. 리씨의 눈은 늘 빨갛게 충혈돼 있다. 4년이 지났지만 일주일에 절반 이상은 불안감에 심장이 울렁거려 잠을 설친다. 가슴이 심하게 조여오고 울렁울렁하는 느낌은 지금까지 멈추지 않았다. 리씨의 몸과 마음은 하루아침에 망가졌고 돈 벌어 귀향하겠다는 꿈도 한순간에 무너졌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그날의 공포

    리씨는 2002년 중국 지린성에서 단기 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에 왔다. 10년치 수입에 맞먹는 중국돈 8만 원을 은행과 친척, 친구 등에게 빌려 마련했다. 처음에는 서울 강동구 등지에서 공사현장 잡부로 일하다 비자가 만료된 뒤에는 전국 공사현장을 떠돌았다. 공사현장의 컨테이너가 그의 잠자리였다. 그는 2007년 경남 진해에서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에게 붙잡혔다. 월급을 주지 않던 사장은 그가 월급을 요구하자 불법체류자가 있다고 신고했다. 하지만 리씨는 “화재 발생 뒤 사장이 일부라도 돈을 돌려주었다. 그마저도 고맙다”며 사장을 용서한 착한 사람이다.



    화재 발생 한 달 반 뒤, 리씨 등 부상자들은 법무부와 양해각서를 썼다. 법무부는 ‘여수 화재사고와 관련해 요구하는 모든 금액이 포함됐다’며 1000만 원을 리씨에게 줬다. 또 ‘출국 후 화재와 관련해 후유장애가 발생했다는 의사 진단서를 제출하고 한국에 돌아오길 원하면 최대 3년간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였던 그에게 그것이 어떤 질환인지, 얼마나 심각한지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2007년 4월 11일 중국으로 돌아간 뒤 상태는 더 악화됐다. 그는 한국에서 받아온 약이 떨어진 뒤 두통이 심해지자 진통제만 사 먹었다. 일상생활도 못할 정도로 공포감이 극대화됐고 가까운 가족에게도 입을 닫았다. 부모는 “아들이 정신병에 걸려 돌아왔다”며 절망했다. 활달하고 주변 사람을 잘 챙기던 셋째 아들 리씨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에서 받은 1000만 원도 큰 도움이 안 됐다. 한국에 갈 때 빌린 돈을 갚고 남은 돈을 생활비로 까먹고 나니 돈이 없었다. 이대로 살다가 죽겠다 싶어 다시 6개월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살아남은 자 출구 없는 ‘악몽의 터널’

    장동향 씨(왼쪽)와 김홍매 씨는 화재 직후 경상자로 분류돼 온갖 고초를 겪었다.

    리씨는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왔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정부는 치료비, 약값 사후지급 방침을 고집했다. 민간단체에서 주선해준 병원은 진단서만 발급해줄 뿐 치료비와 약값을 지원하진 않았다. 당장 먹을 약값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리씨와 부상자 동료 2명은 돈을 모아 약을 샀다. 다행히 상태가 심한 리씨에게 동료가 약을 양보했지만 동료의 상태도 점차 심각해졌다. 리씨는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치료비자로 온 사실을 안 고용주는 돈을 적게 주거나 안 주기도 했다. 리씨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간단한 청소일밖에 할 수 없었다. 돈벌이는 일주일에 1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21일 저녁 다문화가족상담센터에서 만난 김홍매(32), 장동향(35) 씨의 사연도 딱했다. 김씨와 장씨는 화재 당시 402호 여자방에서 살아남았다. 천만다행으로 정신을 잃지 않아 목숨은 구했지만 도리어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은 것이 이들에게 화를 불렀다. 김씨는 “정부 직원이 우리를 경상자로 분류하더니 간단한 검사만 하고 곧장 버스에 태운 뒤 밤새 달려 청주외국인보호소로 데려갔다. 사고 직후라 불안감이 심해 고통을 호소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경상자에게 더 가혹한 법무부

    청주보호소 생활은 공포 그 자체였다. 둘은 매일 밤 화재 현장이 떠올라 잠을 설쳤다. 수시로 문을 여는 교도관도 이들을 불안하게 했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조선족 김씨가 “죽을 거 같다. 병을 고쳐달라”고 교도관에게 호소했지만, 이들을 골칫거리로 여긴 교도관은 둘을 다른 방으로 갈라놓았다. 장씨는 “같이 있게 해달라고 저항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폭력뿐이었다. 옷이 찢어져 남자 교도관 앞에서 속옷이 다 드러났다”고 말했다. 둘은 “살인범 취급”을 받으며 운동 시간에 만나도 대화조차 나누지 못했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독방에 가두겠다는 협박에 시달렸다고 한다. 점점 불안 증세는 심해졌다. 이에 대해 당시 청주보호소 관계자는 “보호외국인의 안전이나 질서유지 차원에서 취한 합법적인 조치”라고 해명했다.

    보호소에서 나오는 방법은 단 하나. ‘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문서에 서명한 뒤 곧장 중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경상자로 분류돼 잡혀들어온 일부 조선족은 보호소 생활을 못 견디고 결국 중국으로 돌아갔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 그들이 중국으로 돌아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김씨는 “우리는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인권위 등에 편지를 썼지만 제대로 전달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느 날 보호소의 고위 간부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을 때, 김씨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 뒤에야 그간의 사정을 알릴 수 있었다. 보호소의 주선으로 찾아온 인권위 직원에게 김씨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인권위에서 무슨 연락이라도 간 것일까. 김씨와 장씨는 결국 2007년 4월 6일 보호소에서 풀려났다. 법무부는 약 1년 동안 한 달 또는 석 달 단위로 비자를 연장해주더니 그마저 끊어버렸다. 김씨와 장씨는 다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지인 집에 머물며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미안한 마음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다행히 리씨와 부상자들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있었다. 안현숙 다문화가족상담센터 소장은 2008년부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부상자 뒷바라지를 도맡아 해왔다. 그는 병원, 약국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해 당장 치료를 받게 하고 약을 구해줬으며, 일자리를 얻을 때마다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신원보증을 서줬다. 그는 “당시 이들은 자살까지 시도할 수 있는 심각한 상태였다. 그걸 보고도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자 출구 없는 ‘악몽의 터널’

    안현숙 다문화가족상담센터 소장.

    체류기간 3년이 지난 뒤 리씨는 3개월마다 비자를 갱신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마치 “병이 다 나았는데 왜 나가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도리어 리씨는 “언제쯤 약을 그만 먹게 될지 궁금하다”고 기자에게 물었다. 그의 소망은 한국에서 충분히 치료를 받아 건강해지는 것뿐이다. 안 소장은 비자와 의료비 문제를 지적했다.

    중상자였던 리씨는 보상금 1000만 원을 받고 부족하지만 치료도 받을 수 있었지만, 김씨와 장씨는 국가배상은커녕 아직 치료도 받지 못했다. 김씨와 정씨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은 온몸으로 퍼져가며 점점 심각해졌다. 김씨는 신경계 이상으로 팔다리가 심하게 저리고 장씨는 매일 아침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폐쇄공포증, 악몽에 시달린다. 화장실에서 문을 열어놓고 볼일을 볼 정도다. 몸이 아파 일도 매일하지 못하니 생활비 대기가 어려워 약도 충분히 먹지 못한다. 그사이 한 사이비 약장수는 병을 고쳐주겠다며 돈을 받아 가로채는 사기를 치기도 했다.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경우 치료시기를 놓치거나 충분히 치료받지 못하면 이 증세가 평생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안 소장은 이들에게 비자와 의료비 문제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미등록 외국인 매 순간이 불안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취업비자로 바꿔줘야 한다. 지금 구한 일자리로는 치료비는 말할 것도 없고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어렵다. 화재로 인해 다른 질환에도 시달리는데 (건강)보험이 없어 제때 치료를 못 받는다. 중국에서 보내온 약을 먹으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안 소장의 표현에 따르면 리씨는 행운아다. 경상자들은 화재 발생 직후 지원을 받기는커녕 그대로 쫓겨났기 때문이다. 김씨와 장씨는 4년 동안 아무런 지원도 못 받다가 지난 1월 서울성모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판정을 받아 국가배상소송을 벌이는 중이다.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는 늘 단속에 대한 공포에 시달린다. 이 공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비견된다. 중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A씨(34)는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 부근 공장에서 일하다 갑자기 들어온 건장한 사람들에 놀라 그대로 도망을 쳤다. 그는 단속반원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뛰다 건물 3층에서 떨어졌지만 다행히 뼈가 부러지진 않았다. 주변인의 도움으로 다문화가족상담센터로 왔지만 허리 치료차 들른 병원에서 그는 또 도망을 갔다. 안 소장은 “단속반원에게 쫓기는 공포에 시달리는 그가 건장한 남자를 보자 갑자기 사라졌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는 성매매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만큼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2007년 사건 발생 뒤에도 외국인 노동자와 관련한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외국인 보호소의 시설은 개선됐지만 단속 과정에서 단속반원의 폭행, 폭언 문제는 계속 지적되고 있다. 2010년 8월 인권위는 출입국관리소의 특별사법경찰관이 아닌 일반 운전원이 이주노동자를 폭행한 사건과 관련해 운전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단속을 피하려던 한 외국인 노동자가 창문을 통해 도망치려다 떨어져 숨지기도 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09년 8월까지 단속 과정에서 3명이 숨졌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이영 사무처장의 말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단속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올해 고용허가제, 방문취업제도가 종료되면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가 크게 늘어날 것이므로 문제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 심각한 사건을 경험해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뒤에도 재경험으로 끊임없이 고통에 시달리는 질환.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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