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6

2010.12.13

살아선 왕실의 살림꾼 죽어선 시부모 다섯 분 모셔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홍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12-13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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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선 왕실의 살림꾼 죽어선 시부모 다섯 분 모셔

    날렵하고 섬세한 조각이 돋보이는 홍릉의 사각 장명등.

    홍릉(弘陵)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英祖)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 서씨의 능이다. 홍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서오릉지구 북서쪽 능선에 자리하며, 남동쪽에서 북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영조는 왕후가 먼저 승하하자 이곳에 왕후의 장지를 정하면서 장차 자신도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래서 왕비 능의 오른쪽 정혈(正穴)에 열십자(十字) 형태를 새긴 한 자 크기의 돌을 묻도록 해 자신의 터를 잡아 비워두는 허우(虛右)의 수릉(壽陵)을 조성했다.

    서오릉은 원래 세조의 큰아들인 추존왕 덕종과 그의 인수대비 한씨의 능인 경릉이 조성되면서 조선 왕실의 왕릉군 가운데 두 번째로 큰 곳이 됐다. 덕종은 세조의 원자이며 왕세자인 의경세자다. 세조는 세자가 일찍 세상을 뜨자 많이 애석해하며 친히 이곳에 나와 길지를 선택했다고 한다. 경릉 이후 이곳에는 덕종의 아우 예종과 그의 비의 창릉이 조성됐고, 200여 년 뒤 제19대 왕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이 먼저 조성되고, 이후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이 조성됐다. 그리고 30여 년 뒤인 영조 33년(1757)에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의 홍릉이 조성되면서 서오릉이라 이름 붙여졌다. 정성왕후는 죽어서도 시아버지인 숙종과 그의 시계모 인경왕후, 작은 시어머니 두 분을 모셨고, 숙종의 계비였다가 폐비가 된 대빈 장희빈의 묘소가 1970년대에 천장해온 뒤로는 시부모 다섯 분을 모시는 셈이다. 지금도 시부모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죽어서도 시집살이에 시달리는지 궁금하다. 우허제(右虛制) 자리를 비워놓고 영원히 떠난 남편 영조를 한탄이나 하지 않는지….

    정성왕후 우측 유택 여전히 비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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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침이 있는 곡장 안 오른쪽 왕의 자리가 비어 있고 왼쪽에 정성왕후의 능침이 보인다.

    영조는 생전에 정성왕후 무덤 우측에 자신이 누울 유택을 만들어놓았지만, 죽은 뒤 현재 동구릉 내 원릉에 계비인 정순왕후와 함께 쌍릉으로 조성된 무덤에 안장됐다. 일화에 따르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할아버지를 미워한 까닭에 수릉으로 만든 홍릉에 모시지 않고 동구릉 내 효종의 영릉 초장지 터에 모셨다고 한다. 또 다른 일화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남편이 원비인 정성왕후와 나란히 묻히는 것이 싫어서 홍릉 대신 동구릉을 택했다고 한다. 어떻든 조선시대 42기의 능 중 유일하게 유택이 지금까지도 비어 있는 특이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정성왕후는 언젠가 그 빈자리로 영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는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704년 13세에 연잉군(후에 영조)과 가례를 올려 왕실에 들어왔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왕비에 봉해졌고, 1757년 승하할 때까지 34년간 왕비로 있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애를 태웠으나 왕비로서 책무를 충실히 하고 권위를 누리다가 1757년(영조 33년) 2월 15일 창덕궁 관리각에서 66세로 승하했다.



    홍릉은 을좌신향(乙坐辛向)이다. 일반적인 능역이 자좌오향(子坐午向), 즉 남향인 데 반해 이 능은 동남에서 북서를 바라보는 흔치 않은 좌향을 택한 것이다. 다른 능역에 비해 사자와 생자의 만남의 공간인 제향 공간과 절대적 사자의 공간인 능침 공간의 높낮이에 차가 큰 것도 특이할뿐더러 경사 또한 매우 가파르다. 게다가 능역은 용맥이 길게 흘러내리는 유란형(乳卵形)이 일반적인데 이곳은 짧다. 영조가 이곳을 자신의 수릉으로 잡은 것이 의아할 정도다.

    정성왕후 발인 때 영조는 사대문 안에서 작별을 하고, 사도세자는 호읍(號泣·목 놓아 큰 소리로 욺)하면서 따라오다 모화관(서대문 밖)에서 곡을 하며 하직했다.

    34년간 왕비, 자식 없어 애태우다 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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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릉은 정자각에서 능침까지 이어지는 능역이 매우 짧고 급경사인 것이 특징이다.

    홍릉 능침의 상설제도는 기본적으로 선대왕인 숙종의 명릉 양식을 따르면서 영조 때(1744) 제정된 ‘속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능침은 쌍릉으로 상계-중계-하계의 형식을 따랐고 능침은 난간석을 둘렀다.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부터는 중계와 하계를 구분하지 않아, 홍릉은 중계와 하계를 구분한 조선시대 마지막 능이 됐다. 즉 홍릉은 문인 공간과 무인 공간을 구분한 마지막 능침이다.

    능침이 있는 3면의 곡장 안에 오른쪽 왕의 자리가 비어 있어 평지를 이룬다. 그러나 석물의 배치는 쌍릉 형식이다. 망주석 1쌍, 문무석인 각 1쌍, 혼유석은 왕비의 것 1좌만 왕비의 능침 앞에 있고 장명등은 가운데 1좌가 있으며, 석마, 석양, 석호가 각각 2쌍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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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투구와 갑옷에 다양한 문양과 장식을 새겨 넣은 홍릉의 무석인. (아래)무석인의 갑옷 등 부분에 물고기 비늘무늬가 조각돼 있다.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장식이 많고 뒷면에는 문양을 촘촘하게 조각해 넣었으며, 목 가리개를 위로 올렸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무늬를 넣고, 가슴 부분은 구름 형태의 판상(板狀)으로 처리했다. 장명등은 사각 장명등이다.

    수십m 급경사의 사초지 아래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왼쪽에 예감, 오른쪽 뒤편에 산신석이 있다. 비각에는 영조가 친히 내린 왕후의 시호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를 새겼다. 이렇게 존호가 길어진 것은 정성왕후가 43년의 긴 궁궐 생활을 하면서, 무수리 출신인 시어머니 숙빈 최씨로부터 폐비 희빈 장씨,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계비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등 왕실 어른을 잘 모시고 풍파에 휩쓸리지 않으며 왕실 살림을 잘해냈다는 행장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조는 왕비가 승하하자 곡진한 심정으로 그의 행장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0여 년간 늘 미소 띤 얼굴로 과인을 맞아주었고 왕실의 두 어른을 극진히 받들어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으며, 과인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에 기울인 정성 또한 지극하여 고마움에 답하고자 이 글을 쓰노라.”

    정성왕후는 국모의 역할을 충실히 한 것 같다.

    정자각 앞 참도를 중심으로 왼편에 수복방 터가 초석만 남아 있고 오른편에는 수라간 터의 흔적이 있다. 수라간 뒤편 언덕 너머 재실이 있었다고 문헌에 전해지나 현재는 없다. 발굴과 복원이 아쉽다. 제례 때 쓰던 어정(우물)의 흔적도 있다.

    정성왕후는 자식을 얻지 못했다. 대신 영조는 빈과 귀인에게서 2남 12녀를 두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진종 추존, 정조의 양부)가 장자이며, 사도세자(정조의 친부)가 둘째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올렸던 왕실 제례… 세월 흘러 낮 12시 봉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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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례를 올리는 정자각.

    2009년 6월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조선 왕릉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면서 조선 왕릉이 갖는 건축과 조경의 독특한 가치뿐 아니라 지금까지 600여 년을 이어온 제례 문화도 높이 평가했다. 조선 왕실에서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제례를 올렸다. 대표적인 제례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기신제다. 기신제는 선왕과 비가 승하한 기일에 봉행하는 제로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능 주변에 사찰을 지어 재궁을 설치하고 불교식으로 모셨으며, 세종 이후에는 원묘와 문소전에서 유교의 ‘국조오례의’ 예에 따라 제향을 모셨다. 선조 때 임진왜란(1592년)으로 문소전이 소실된 후에는 능에서 기신제를 모시고 있다.

    홍릉의 기신제는 매년 양력 4월 3일 전주이씨 대동종약원홍릉봉양회에서 올린다. 돌아가신 날을 기준으로 생전의 모습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길례의 하나다. 태조 건원릉의 기신제는 지금도 매년 6월 27일 황세손이 참석해 올린다. 이 날짜는 태조 이성계의 승하 날을 양력으로 계산한 것이다. 그런데 스페인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조선 왕릉 40기의 등재 결정이 난 날이 바로 6월 27일이다. 태조가 죽은 지 601년 만이다. 우연치고는 대단한 일이다.

    현직 왕이 직접 제사를 모시는 것을 친행(親行)이라 하고, 삼정승 또는 관찰사 등이 행하는 것을 섭행(섭행)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왕릉을 친행할 수 없고 비용도 많이 들어 섭행을 자주 했다. 제사를 모실 때 초헌관은 남의 조상이나 문병을 하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고, 죄를 다스리지 않으며, 술이나 파, 마늘, 고추 등 자극성이 강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제례 전 목욕재계하고 제례복으로 갈아입고 맑은 마음으로 오로지 제사를 모시는 데만 정진했다. 기신제는 대개 한밤중(새벽 1시부터 2시)에 모셨다. 그러나 지금은 낮 12시를 중심으로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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