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4

2010.11.29

왕이 동침하신다, 동온돌에 이불 깔아라

은밀한 조선 국왕의 사생활 엿보기…지밀상궁 4명 병풍 뒤에서 매일 침수 수발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10-11-29 13:1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왕이 동침하신다, 동온돌에 이불 깔아라
    조선시대 궁궐은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 규정에 따라 축조됐으나 중국과 달리 우리 실정에 맞게끔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구조를 대략적으로 보면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內殿), 왕이 신하들과 회의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외전(外殿), 세자의 활동공간인 동궁(東宮), 휴식공간인 후원(後苑), 궁궐 안에서 업무를 보는 관청인 각사(各司) 등으로 구성됐다.

    특히 국왕의 침소는 궁궐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아 극비라 하여 지밀(至密)이라 불렀다. 화려한 곤룡포와 면류관으로 치장한 왕이 아닌, 평복을 입은 왕이 생활한 침전(寢殿)이자 연거지소(燕居之所)로 경복궁은 강령전(康寧殿), 창덕궁은 희정당(熙政堂)이 있었다. 정남향의 이들 전각은 육간대청(여섯 칸이 되는 넓은 마루)을 중심으로 동온돌과 서온돌로 구분됐는데 동온돌은 국왕의 침실이고, 서온돌은 왕비의 침실이었다.

    동온돌은 구조가 특이해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병풍을 치고 그 중앙에서 국왕이 자고, 병풍 바깥쪽에는 네 사람의 지밀상궁이 밤을 지새우며 왕의 침수(寢睡)를 지켰다. 이때 상궁이 졸지 않을까 염려해 딱딱한 목침만 갖다 놓고 절대 폭신한 베개를 쓰지 못하게 했다.

    국왕과 왕비는 이처럼 방을 따로 쓰고 자다 일진(日辰)을 보아 한 방을 썼다. 이때 지밀상궁이 궁녀에게 “오늘 밤은 동온돌에 기수 배설(排設)하여라”고 이르면, 궁인이 이부자리를 동온돌에 깔았다. 이렇게 모처럼 동침하는 날이면 왕비는 밤에 분홍빛 저고리에 남치마 차림으로 노란빛 속옷에 쪽진 머리를 하고 동온돌로 들어갔다.

    왕비는 분홍 저고리에 노란 속옷 입고 왕과 동침



    그런데 국왕이 왕비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을 경우 반드시 혼자 잤다고는 보기 어렵다. 때때로 국왕은 내명부(內命婦)의 나인(內人)을 데리고 잤다. 나인이 하룻밤이라도 국왕과 침실을 같이 쓰면 ‘시침(侍寢)했다’라고 하여 이를 매우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시침을 승은(承恩)이라 했고, 승은이라는 궁중 용어는 나인이 임금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광영의 표시였다. 국왕이 평소 눈여겨보았던 젊은 나인이 있으면 상궁을 불러 “오늘 밤 ○○을 시침토록 하라”라고 명령했다. 만일 이 나인이 왕자라도 생산하는 날이면 일약 ‘빈(嬪)’이나 ‘귀인(貴人)’으로 승격했는데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내명부조에 따르면 빈은 정일품(正一品), 귀인은 종일품(從一品)에 해당하는 고귀한 봉작이었다.

    중국 황실은 후궁이 너무 많아 황제가 그 얼굴을 모두 기억할 수 없었다. 한무제(漢武帝)는 삼천 궁녀의 방을 일일이 알고 찾아갈 수가 없어 저녁이면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멈추는 곳에서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중국 황실처럼 후궁이 많지 않았다. 한평생 승은을 받지 못한 외로운 후궁도 많았다.

    국왕의 사생활 가운데 역시 중요한 것은 식생활인데, 이조의 하급 전문관청인 속아문 중 사옹원(司饔院)에서 국왕의 음식과 식료품, 도자기 등을 관할했다. 수라상은 반드시 독상(獨床)이었다. 궁중에는 겸상이라는 게 없어서 국왕과 왕비가 함께 진지를 들어도 마주앉는 법이 없고, 제각기 앉아 먹었다. 이는 왕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해서 그랬던 것 같다. 또 수라상에는 반드시 쌀밥과 팥밥 두 그릇을 놓았는데 이는 제일 맛있는 특산이었기 때문이다. 밥은 반드시 돌솥에다 지었다. 수라상이 놓이면, 국왕이 보는 앞에서 상궁들이 먼저 시식을 했는데 이를 ‘기미(氣味)를 본다’고 했다. 그리고 국왕이 수라를 다 들면 상을 물리는데 이를 ‘퇴선(退膳)’이라고 했다. 물론 국왕이 물린 수라는 상궁들 차지였다.

    수라상을 물린 국왕은 변기인 ‘매우(梅雨)틀’을 썼다. 매우틀은 삼방이 막히고 일방이 터진 쓰레받기처럼 생긴 나무틀인데, 그 밑에 반짝반짝 닦은 구리 요강을 놓았다. 나무틀은 임금이 앉아 용변 보기 편하도록 빨간 우단으로 쌌다. 매우틀은 침전, 정사를 보는 곳, 손님을 맞는 집 등 세 곳에 놓았고, 이 일만 전담하는 세수간(洗水間) 나인이 있어서 국왕의 볼일이 끝나면 재빨리 치우고 다시 갖다놓았다. 왕비도 매우틀을 썼으나, 나인들은 측간( 間)을 사용했다. 그런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젊은 나인들은 무서워서 혼자 가지 못하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갔다고 한다.

    공사다망한 국왕의 일상 중에도 웃음보 터지는 일이 있었으니, 영명(英明)한 조선 9대 국왕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 11∼1494. 12)이 처녀성을 판별한 일화가 전해진다.

    성종의 지식과 기지로 처녀성 판결

    왕이 동침하신다, 동온돌에 이불 깔아라

    건물 계단을 활기차게 내려오는 조선 말 상궁들. 왕의 배설물을 담았던 `매화틀`(작은 사진). 배설물은 나인이 궁중의 내의원에게 갖다주어 왕의 건강을 검진토록 했다.

    한 관료가 사대부가의 처녀를 후처로 맞았는데 혼인한 지 사흘 만에 이혼소장을 올렸다. 내용은 처녀로서 실행(失行)을 했으니 이혼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이 있는 곳에 이혼이 있게 마련이고, 조선시대도 이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처에게 일곱 가지 잘못이 있을 때 쫓아낼 수 있다는‘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이혼이 행해졌다. 이혼하려면 양반은 왕에게, 평민은 고을 수령에게 소청해야 했다. 그러면 필요에 따라 임시재판이 열렸는데 재판은 왕이나 수령이 담당했다.

    그런데 칠거의 적용이 매우 애매해 최소한이나마 여성을 보호하려고 삼불거(三不去)를 뒀다. 즉 처가 쫓겨나면 돌아갈 곳이 없다거나, 부모의 3년상을 같이 치렀다거나, 가난할 때 시집와 부유하게 됐다거나 할 때는 칠거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어도 내쫓을 수 없었다.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처의 부정(不貞)이다. 여자가 혼인 전에 순결을 지키지 못했거나, 악질에 걸렸거나, 간통을 했을 때는 영락없이 이혼판결이 내려졌다.

    소장을 읽은 성종은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의녀(醫女)로 하여금 이혼 위기에 처한 후처를 진찰케 했다. 그랬더니 의녀가 “음(陰)을 보니 금사(金絲·처녀막)가 아직 끊기지 아니했고 계안(鷄眼·돌출부)이 신선하다”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성종은 의녀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사대부에게는 부부를 이루어 살도록 명했다.

    이와 비슷한 소동이 조선 선조대 문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가 엮은 야담수필집인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 전한다. 한 관료가 처녀를 후취로 맞았는데, 아내가 이미 남자를 치러본 듯해 이혼소장을 올렸다. 이혼소장을 접수한 성종은 내시에게 명해 여자 집의 방 안 형세를 그려오게 했다. 그림을 살펴보니 침실 옆에 높은 다락이 있었다. 그 후 성종은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

    “비유해 말하자면 가을 밤(栗)과 같아 때가 되면 저절로 벌어지는 법이니 더불어 종신(終身)함이 좋겠다.”

    이 판결을 보고 당시의 선비들은 방에 다락이 있어 처녀가 어렸을 때 오르내리면서 부딪혀 그렇게 됐을 것이라 수긍하면서 국왕의 풍부한 지식과 현명한 판결에 감탄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 나라의 군주가 처녀성 판별까지 했다니,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만일 두 처녀가 처녀성을 잃어버린 것으로 판명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처녀의 집안에서는 위자료를 받기는커녕 혼수비용 일체까지 변상했을 것이며 처녀는 재혼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홉 겹으로 둘러싸인 구중궁궐(九重宮闕)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국왕의 사생활은 당시 사람들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민간에서는 수라상이 산해진미로 가득 찼고 변을 볼 때도 휴지를 쓰지 않고 비단을 썼다고 억측을 했으나, 국왕의 생활은 의외로 검소했다. 오히려 권세가의 사생활이 왕가보다 사치스러웠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