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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우리 시대 고민 없는 작품 어느 누가 보러 올까요’’

연극 ‘시라노 드 베르주락’ 연출한 김철리 감독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우리 시대 고민 없는 작품 어느 누가 보러 올까요’’

‘‘우리 시대 고민 없는 작품 어느 누가 보러 올까요’’

김철리 감독은 1992년, 2005년, 그리고 올해 총 세 차례나 ‘시라노 드 베르주락’을 연극 무대에 올린, 일명 ‘시라노 연출 전문가’다.

성공률 100%의 작업 기술을 자랑하는 연애조작단 ‘시라노 에이전시’가 연애에 서툰 사람들의 사랑을 연결해준다. 지난 추석에 개봉한 영화 ‘시라노 ; 연애조작단’은 이 재기 발랄한 이야기로 관객 270만 명을 모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1897년 프랑스 극작가 에드몽 로스탕이 발표한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락’. 사실 원작은 재기 발랄하기보다는 진지하고, 슬프다 못해 처절하다. 17세기 당대 최고의 검객이자 시인인 시라노는 사촌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못생긴 코 때문에 그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는 록산느를 좋아하는 미남 청년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연애편지를 쓰며 자신의 사랑을 지켜나간다. 영화가 한창 흥행하던 10월 22일, 서울 명동극장에서는 연극 ‘시라노 드 베르주락’(이하 시라노)이 무대에 올려졌다.

시라노, 날것 드러내지만 긍정성 잃지 않아

11월 12일, 연극 시라노를 무대에 올린 김철리(57) 감독을 서울 종로구 동숭동 까망소극장에서 만났다. 김 감독은 “영화 덕분에 우리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다”며 웃었지만 사실 그는 1992년과 2005년 이미 시라노를 연극 무대에 올린, 일명 ‘시라노 연출 전문가’다. 그는 1992년 대학로 학전극장에서 선보인 첫 시라노 연출로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받기도 했다.

“이전에는 시라노를 사실주의적으로 연출하려고 애썼습니다. 무대, 의상, 분장, 대사 등을 최대한 17세기 당대와 가깝게 표현하려고 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과감하게 현대성을 가미하고 ‘연극스러운’ 연극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시라노가 죽을 때까지 세상의 편견과 불합리성에 저항한다는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김 감독은 연극 시라노의 가장 큰 매력으로 “날것 그대로를 드러내면서도 긍정성을 잃지 않는 점”을 꼽았다. 현대 연극은 인간의 삶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어조를 유지하지만, 시라노는 희망에 대한 끈을 끝내 놓지 않는다는 설명도 더했다. 시라노가 낭만희극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0년대 초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한 그는 본래 영화감독을 꿈꾸는 청년이었다. 연극반에 처음 발을 들인 것도 영화 연출에 도움이 될 거라는 선배의 꼬임 때문이었다. 처음 참여한 연극은 제임스 로젠버그의 작품인 ‘스니키 휘치의 죽음’.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 겁쟁이 총잡이 스니키 휘치를 통해 삶의 부조리를 말하는 연극이다. 연극반 선배들은 이미 그의 끼를 간파했던 것 같다. 그에게 처음부터 주인공 스니키 휘치 역을 맡겼으니 말이다. 바보 같은 행동으로 마을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다가 어느 날 영웅이 되고 또다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총에 맞아 죽는 스니키 휘치. 그는 첫 무대에서 연극의 매력에 훅 빠져들었다.

‘‘우리 시대 고민 없는 작품 어느 누가 보러 올까요’’
“바보 연기를 하는데 객석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어요. 그런데 석양에 물든 황야에서 마지막 대사를 내뱉고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는 객석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죽은 채 누워 있는데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니키 휘치도, 시라노도 최후에 죽음을 맞는다. 김 감독은 “실제로 죽음에 대해 말하는 연극에 큰 매력을 느낀다”며 “요즘 사람들은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 착각한다”라고 덧붙였다.

“대학 시절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어요. 집이 홀딱 망해 판잣집에 살 때였는데, 늦은 밤이면 홀로 방에서 담배를 피우며 손바닥만 한 창문 밖을 내다봤어요. 밤하늘이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의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내가 죽으면 저곳으로 가는 건가’ ‘죽고 나면 지금 사고하고 있는 나는 사라지는구나’라는 생각에 죽음이 너무 두려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제한된 인생을 살잖아요. 죽음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며 어떻게 의미 있게 살다 갈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학 졸업 후 EBS PD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연극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5년간 낮에는 교육용 프로그램을 만들고 밤에는 대학 동창들과 연극 연습을 했으나 결국 연극으로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틀었다.

“영상매체와 달리 연극은 무대에 올리는 순간 감독이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배우가 연기를 못한다고 연극을 멈출 수도 없잖아요. 하지만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게 연극의 매력입니다. 관객의 침묵, 환호, 부스럭거리는 소리 등이 배우에게 전달되는 거죠. 그게 연극이 주는 스릴입니다.”

11월 14일 연극 시라노와 함께 그의 손을 떠나는 일이 또 있다. 바로 11월 2일부터 열린 제10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SPAF는 세계 각국의 현대적 공연 예술을 국내에 소개하는 축제로 김 감독은 2006년부터 SPAF의 예술감독을 맡아왔다. 지난 5년간 SPAF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소회를 묻자 그는 “해외에서 SPAF라고 하면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이는 축제로 인식할 정도가 됐다. 또 올해부터 국내 극단과 해외 극단이 함께 제작한 공연을 무대에 올린 것도 성과”라고 평가했다.

‘‘우리 시대 고민 없는 작품 어느 누가 보러 올까요’’
김 감독은 SPAF의 예술감독을 맡고는 1년 365일 중 100일 이상 해외 출장을 다녔다. 잘 알려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영국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남미, 동구권 등에서 개최하는 연극 축제까지 다 찾아다녔다. 지난 5년간 그가 본 해외 공연은 500편이 훌쩍 넘을 정도.

“이곳저곳 축제를 다니다 보면 지난번 유럽에서 봤던 해외 연극 관계자를 이번에는 남미에서 만납니다. 결국 그들이 저를 신뢰하게 되죠. 또 소문만 듣고 고른 공연은 직접 발품을 팔아 선택한 공연을 절대 따라올 수 없어요.”

우리말·우리 관객부터 중시해야

올해 서울에서는 유난히 연극과 관련된 축제가 많이 열렸다. 그가 감독한 SPAF 외에도 국립극장에서 주최한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한국소극장협회가 마련한 대학로소극장축제 D.FESTA 등이 열렸고, 연극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국제연극올림픽이 개최되기도 했다. 국제연극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대학로를 ‘연극특구’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감독은 “양적인 팽창이 질적인 향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국내 연극계는 여러 면에서 균형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소극장 위주의 연극이 급격히 늘면서 TV드라마와 큰 차이가 없는 일상적인 내용을 다루는 연극이 지나치게 많아졌고, 스타 마케팅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아졌다는 지적이다. 김 감독은 “무엇이든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믿는다.

‘‘우리 시대 고민 없는 작품 어느 누가 보러 올까요’’
김 감독은 한때 독재자라고 불릴 만큼 까칠하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요즘 그는 배우와 스태프의 의견에 귀 기울일 뿐 아니라 그들을 붙잡고 아이디어가 생기면 밤낮 가리지 말고 알려줄 것을 당부한다. 김 감독은 “나이를 먹어가는 탓도 있지만(웃음), 예술감독을 하면서 예산, 집행 등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나고 해외 관계자도 만나면서 ‘열린 사고’의 중요성을 많이 느꼈다”고 설명했다.

해외 연극 관계자와 교류할 기회가 많다 보니 외국에서 우리 연극계에 기대하는 점도 직시하게 됐다. 김 감독은 “국내 연극이 우리말과 우리 시대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세계무대에서 언어보다 몸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논버벌(non verbal)이 더 잘 통할 거라 생각하죠. 하지만 해외에서는 한국어가 많이 들어가도 좋으니 지금 한국 사회의 고민과 인생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보여달라고 요구합니다. 배우들이 우리말을 정확한 발성과 화법을 통해 말하며 먼저 국내 관객과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면 세계무대 어디에 가서도 통할 겁니다.”

‘‘우리 시대 고민 없는 작품 어느 누가 보러 올까요’’

연극‘시라노 드 베르주락’의 후반부 장면.(작은사진)





주간동아 2010.11.22 763호 (p56~58)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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