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0

2010.11.01

“부처님처럼 행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인 것을”

‘종단의 부목’ 자처 굵직굵직한 불사 완성 … 생활 속에서 자비 실천 강조

  • 유철주 조계종 홍보팀 jayu@buddhism.or.kr

    입력2010-11-01 14:0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부처님처럼 행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인 것을”

    인도의 마하보디 사원을 방문했을 때 밀운부림 대종사.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자리에 세워진 사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남양주 봉선사를 찾은 것은 하안거가 끝난 8월 25일이었다. ‘운악산 봉선사’라는 일주문의 한글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경내로 들어가자 수백 년 동안 봉선사를 지켜온 느티나무가 일행을 맞았다. 그리 크지 않은 사격(寺格)이지만 곳곳에 걸린 한글 현판이 ‘봉선사’임을 확인해줬다. 특히 대웅전(大雄殿)이라 쓰지 않고 ‘큰법당’이라고 쓴 현판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한문 중심의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앞장섰던 운허 스님과 현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의 향기가 경내에 가득했다.

    발길을 피우정(避雨亭)으로 돌렸다. 조계종 원로회의 차석부의장이자 봉선사 회주(會主)인 밀운부림(密耘部林) 대종사를 뵙기 위해서다. 큰법당 오른쪽 방적당 옆에 피우정이 있다. 마루와 방, 화장실이 좁게 붙어 있다. 어른 스님의 방치고는 정말 작다. 방으로 들어가니 10여 개의 각종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 첫 번째 글씨가 인상적이다.

    ‘부목사시(負木捨柴) 기피우정(寄避雨亭) 불관풍뢰(不關風雷) 개안수면(開眼睡眠)’. 부목이 땔나무를 버리고, 이 정자에서 비를 피하려네. 태풍과 뇌성벽력도 상관하지 않고, 눈을 뜨고 잠에 들리라.

    불교와 자연스러운 인연으로 출가

    스님이 피우정에서 칩거를 시작하면서 지은 시라고 했다. 부목(負木)은 사찰에서 땔나무를 마련하는 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스님은 ‘종단의 부목’을 자처할 만큼 많은 일을 했다. 서울 봉은사와 봉선사의 주지를 지내는 동안 굵직굵직한 불사를 해냈다. 스님은 총무원의 재무부장·총무부장·부원장 등을 맡아 경찰 포교조직인 경승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그런 스님이 땔감을 버린 것이다. 밀운 스님의 사형(師兄) 월운 스님은 1989년 밀운 스님이 종단 일을 그만두고 봉선사로 들어올 때 “잠깐 비나 피한다고 생각하고 지내라”며 직접 ‘피우정’이라 이름 지어줬다고 한다.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부르는 비가 내리던 날 밀운 스님에게 인사를 올렸다.

    ▼ 큰스님의 출가 인연이 궁금합니다.

    “제 고향은 황해도 연백입니다. 해방 후 그어진 38선 남쪽으로, 저는 38선 바로 옆에 있던 중학교에 다녔지요. 당시에는 38선 위, 아래쪽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장터에서 북어 등 해산물과 고무신을 교환했습니다. 전쟁 1년여 전부터 남북은 작은 전투를 벌였습니다. 서로의 경찰서를 습격하고 불을 지르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그러다 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 직후 남으로 내려오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1·4후퇴 때 누님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밀운 스님은 황해도에서 할아버지와 부모님, 5형제가 함께 살았으나 누님 1명만을 모시고 월남했다.

    “노량진에 외5촌 아저씨가 계셔서 신세를 졌습니다. 그 무렵, 지금 국립묘지의 지장사(옛 이름은 화장사)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거기서 은사인 대오 스님을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스님께서 간곡하게 권유해 출가를 했습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고향 연백 근처의 망해사를 드나들었다. 망해사 주지 스님도 집에 자주 오셨다. 주지 스님에게서 오랫동안 한문을 배웠다. 불심이 깊었던 부모님은 망해사에 땅을 시주하기도 했다. 불교와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스님은 “부모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늘 베풀고자 했다. 부모님 덕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고 출가해서도 잘 살아왔다”고 전했다.

    ▼ 출가 후 행자 생활은 어디서 하셨나요?

    “영주 초암사에서 했습니다. 대오 스님이 주로 초암사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은사 스님은 제가 중도에 포기할까봐 직접 밥도 해주시고 여러 가지를 챙겨주셨습니다. 얼마간 행자 생활을 하다 영주 비로사에서 무강 스님에게 계(戒)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1954년 출가해 같은 해 사미계를 받았다.

    군 복무 중 화두는 “부처님이 시원찮다”

    “부처님처럼 행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인 것을”

    1971년 해인사 동안거 때의 모습. 동그라미 안이 밀운 스님이다.

    ▼ 은사인 대오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스님은 무척 검소하셨습니다. 입적하실 때 유품이라곤 가위, 돋보기, 실타래, 손톱깎이가 전부였을 정도였습니다. 또 스님은 평생 참선만 하셨습니다. 중국 사찰과도 인연이 있어 자주 다녀오셨습니다. 스님은 관세음보살과 보현보살, 작은 종을 항상 모시고 다녔습니다. 중국 사찰에서 정진하실 때는 한국의 불자들이 버선을 보내줘 버선이 필요한 중국 스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제게도 참선 수행을 하라고 종종 당부하셨습니다.”

    출가 후 군대에 간 스님은 계를 지키기 위해 술과 담배를 철저히 멀리했다. 또 군부대 인근에 있던 포천 동화사를 오가며 틈틈이 정진했다.

    밀운 스님이 군 복무를 할 때의 일이다. 은사인 대오 스님과 동암 스님은 제자가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면회를 왔다. 두 스님은 밀운 스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부처님이 시원찮다”는 말을 했다. 두 스님이 동화사의 부처님을 보고 여법(如法)하게 모시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한 얘기였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밀운 스님은 ‘부처님 중에 시원찮은 부처님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이것이 밀운 스님에게 화두가 됐고, 이 화두가 밀운 스님을 따라다녔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행하거나 머무르거나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조용히 있거나) 한결같았다.

    그러던 중 스님에게 ‘불행불(佛行佛)’이라는 말이 스쳐 지났다. “부처님이 시원찮은 게 어디 있나? 부처님처럼 행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지!”였다. 그래서 스님은 동암 스님에게 달려갔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동암 스님은 크게 웃었다. 당신들의 뜻이 잘못 전달돼 밀운 스님에게 화두가 됐고, 그 화두 참구 끝에 ‘한 소식’을 해왔으니 대견했을 것이다.

    밀운 스님은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 자비를 실천해야 부처”라며 “이때의 불행불과 후에 덧붙인 승행승(僧行僧) 인행인(人行人)은 지금까지 지켜오는 삶의 지표가 됐다”고 전했다. 즉 ‘부처님처럼 행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고, 스님답게 행동하면 (그것이 바로) 스님이며, 사람답게 행동하면 (그것이 바로) 참사람’이라는 것이다. 밀운 스님은 “부모가 죽은 자식 잊지 못하는 심정으로 공부해야 한 경계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며 후학들의 쉼 없는 정진을 당부했다.

    ▼ 근현대 불교의 대강백 운허 스님을 법사로 건당(建幢)하셨습니다. 운허 스님과의 일화도 들려주시지요.

    “운허 스님은 참선도 좋고 주력도 좋으니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함께 매일 108참회를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아침 108배를 합니다. 운허 스님은 남의 허물을 보지 않는 분으로 유명했습니다. 경(經)을 번역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오역한 것은 그대로 두고 따로 당신 의견을 적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랬습니다. 운허 스님이 봉은사 주지로 계실 때, 하루는 독일인 목사가 방문했습니다. 운허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 목사가 운허 스님에게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운허 스님이 웃으며 ‘그러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의아해서 ‘스님,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운허 스님은 ‘저 목사는 예수밖에 모르지 않느냐? 당신 뜻을 알겠다’는 의미로 얘기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뒤늦게 운허 스님의 뜻을 알게 됐습니다.”

    운허 스님은 월운 스님 못지않게 밀운 스님도 아꼈다. 밀운(密耘)이라는 법호도 운허 스님이 내려준 것이다. 남모르는(密) 수행정진(耘)을 칭찬했던 운허 스님의 뜻이 담겨 있다. 스님의 원래 법명은 부림(部林)이었다.

    ▼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어떤 망념이나 삿된 생각이 들어올 수 없는 마음 말입니다. 이 마음을 얻기 위해 우리는 정진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깨달음에 대한 말씀을 이어가다, ‘열반경’의 한 구절을 꺼냈다. “반드시 전해달라”며 말이다.

    스리랑카 순례길에서 ‘무원근(無袁近)’ 환희심

    “‘열반경’을 보면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항상한 것은 없다. ‘생하면 반드시 멸하는 법.생하고 멸함이 끊어진 뒤에야,적멸의 즐거움을 안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문제가 많은 해석입니다. 항상하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 ‘생하고 멸함이 끊어진 뒤’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이(已)는 마침이 아닌 기(己)로, 樂은 ‘락’이 아니라 ‘악’이라고 읽습니다. 이 ‘악’은 자성 가운데의 핵을 말합니다. 즉 적멸 가운데서 만법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생하고 멸할 것도 없으니 단멸(斷滅)이 없다는 뜻이 되고, 적멸 가운데서도 한 생각 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이니 ‘락’보다 ‘악’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스님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1985년 성수 스님, 고산 스님, 원담 스님, 정무 스님 등과 스리랑카 불치탑 순례를 갔을 때라고 한다. 스님은 1980년대 불교 성지인 스리랑카를 자주 찾았다. 스리랑카 승가사범대학과 국립 푸리베나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도 받았다. 당시 스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리랑카에서도 108배를 했다. 스님은 “새벽 108배를 마치자 불현듯 무원근(無遠近)이 떠올라 환희심이 일어났는데 나중에 원담 스님에게 게송을 보여드리고 ‘락’이 아니라 ‘악’으로 읽어야 한다는 뜻의 내용을 말씀드렸더니 ‘언제 그렇게 공부했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스님은 그때 시를 지어 수덕사 만공 스님 기일 때 제문으로 올렸다. ‘허공진뢰(虛空震雷) 우주생기(宇宙生起) 일월괴멸(日月壞滅) 시무원근(是無遠近).’ 즉 ‘만공 스님이 한 생각 일으키니 우주가 생겨나고, 또 한 생각 일으키니 일월이 무너졌다. (그러니) 자성은 나고 죽음이 없다’는 뜻이다.

    ▼ 어떤 화두로 공부를 하셨나요?

    “무자(無字), 이뭣고(是甚),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등 여러 화두를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화두를 해보니 오매일여(寤寐一如)에 들어야 본인의 생각이 나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화두를 하더라도 ‘자기 화두’를 해야 합니다. 남의 화두를 붙들고 있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러면서 스님은 하나의 게송을 읊었다. ‘무량공안(無量公案) 불조망어(佛祖妄語) 중생망상(衆生妄想) 불조본성(佛祖本性)’. 즉 ‘무량공안은 부처와 조사의 뜻이 다른 데 있어 모두 거짓말이요, 망상을 일으키는 그놈이 바로 부처와 조사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스님은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연꽃을 들어 보인 그 모습에 속아서는 안 되고, 가섭존자가 그 꽃을 보고 웃었는데 그 웃음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이 왜 연꽃을 들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가섭존자가 왜 웃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 불국사, 해인사, 통도사, 수덕사, 봉선사 선원에서 정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해인사 선방에서 살 때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성철 스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당시 대중이 선원의 원주(院主)를 기피했습니다. 빠듯한 살림살이를 책임져야 하니 서로 맡지 않으려 했습니다. 제가 원주를 자처했습니다. 소임을 살아보니 살림이 부족한 게 아니었습니다. 적자를 흑자로 돌려놨더니 성철 스님이 ‘밀운 스님은 해인사 선원의 전무후무한 원주가 될 것’이라며 칭찬해줬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열심히 소임을 보며 정진했습니다, 허허.”

    “부처님처럼 행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인 것을”

    한글로 된 현판이 걸린 운악산 봉선사.

    한 발짝 물러서는 마음 있으면 사회 통합

    ▼ 우리 사회 갈등이 심해지면서 부처님의 ‘자비정신’을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부처님 말씀대로만 살면 됩니다. 생사 없는 도리를 전하러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자비를 몸소 실천할 때 불자들이 그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스님은 자비에 대해 더 설명하기 위해 옷장 문에 붙은 글을 가리켰다. ‘산포금수족(山抱禽獸族) 수마어해군(水摩魚蟹)’이다. 산은 모든 짐승을 가족으로 안아들이고, 물은 어해(물고기와 어패류)를 어루만져준다는 말이다. “산은 짐승이든 나무든 말없이 모두 품어줍니다. 물은 드러내지 않고 물속에 사는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산과 같고 물과 같은 마음이 바로 자비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의견이 다른 집단과 마주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산과 물의 정신을 생각하며 한 발짝 물러서는 마음을 낸다면 우리 사회는 좀 더 화합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님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 모두 조금씩 실천해나간다면 아름다운 사회가 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스님이 결혼식 주례를 하면 꼭 들려주는 말이 있다. ‘화소군봉(花召群蜂) 봉락화향(蜂樂花香) 화봉상조(花蜂相助) 종고불변(終古不變)’이다. ‘꽃은 벌떼를 불러모으고, 벌은 꽃향기를 좋아하니, 꽃과 벌은 서로 돕기에,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서로 나빠질 일이 없다’는 말이다.즉 부부는 꽃과 벌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스님은 “부처의 마음을 일으키는 놈이나 중생의 망상을 일으키는 놈이나 똑같이 나 자신”이라며 “진흙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스스로 생각을 돌이켜 심성을 정화하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피우정을 나오니 어느새 비가 그쳤다. 비를 피한 곳, 피우정. 중생의 마음도 비를 피해 잠깐 쉬었다. 부처의 마음이 된 것은 아니지만, 중생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시간이었다.

    교종본찰 봉선사

    월초-운허-월운 스님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강맥(講脈)


    “부처님처럼 행하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인 것을”

    월초 화상, 운허 스님, 월운 스님(왼쪽부터).

    “조선시대에는 봉선사에 ‘교학 시험’을 관장하던 승과(僧科)가 있었고, 봉은사에 ‘선학 시험’을 관장하던 승과(僧科)가 있었습니다. 근대에 들어 월초 스님, 운허 스님, 월운 스님으로 이어지는 강맥(講脈)에서 알 수 있듯 봉선사가 한국불교의 명실상부한 교종본찰(敎宗本刹) 가풍을 잇고 있습니다. 월운 스님께서는 80세가 넘으셨지만 아직도 학인을 직접 가르치십니다. 앞으로도 봉선사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밀운 스님은 교종본찰 봉선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교학의 본찰로서 봉선사는 지금도 수많은 학인이 공부하고 싶어 하는 곳으로 꼽힌다. 교종본찰 봉선사의 실질적인 중창주는 월초 스님이다. 스님은 서울에서 태어나 15세 때 경기도 양주의 봉인사 부도암에서 환진 스님에게 출가했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발전을 위해 근대적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1905년 원흥사 자리에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했다. 1906년에는 봉선사의 교종판사가 된 후 줄곧 봉선사에 머물며 1926년까지 가람을 중수하고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스님은 한국 근대불교의 선각자였고, 당대 제일의 강백(講伯)으로서 운허 스님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한글대장경의 시원(始原)을 연 운허(耘虛) 스님은 청년기에는 일제의 침략에 맞선 항일투사로, 스님으로서는 경전 번역가로 살았으며 교육자로서는 후학 양성에 전념한 분이다. 오늘날의 봉선사를 만든 주인공이기도 하다. 1926년 서울 개운사에서 청담 스님과 함께 전국불교학인대회를 열어 학인연맹을 조직했고, 1929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봉천 보성학교의 교장에 취임했다. 1930년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36년 남양주 봉선사에 홍법강원(弘法講院)을 설립해 후진 양성에 노력했다.

    봉선사 조실인 월운 스님 역시 동국역경원장을 지내며 한글대장경 편찬 사업에 진력해왔으며, 지금도 현장에서 학인을 가르치고 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