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7

2010.10.11

8년간 끔찍한 볼모 생활 자나깨나 ‘북벌의 꿈’꾸었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0-10-11 1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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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간 끔찍한 볼모 생활 자나깨나 ‘북벌의 꿈’꾸었다

    멀리서 보면 영릉은 옆으로 누운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

    영릉(寧陵)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 5~1659. 5)과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능이다. 같은 능선 위에는 왕의 능침을, 아래에는 왕비의 능침을 조성하는 동원상하봉 형식의 쌍릉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동원상하봉 능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 동측 능선 너머에 있다.

    효종은 1618년(광해군 11) 5월 22일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서울시 종로구 종로 3가 부근) 사저에서 16대 왕 인조와 인열왕후의 5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효종의 이름은 호(淏)이며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다.

    효종이 태어난 날 저녁에 흰 기운이 침실로 들어와 오래 머물다 흩어졌다고 한다.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과일, 채소 같은 흔한 것이라도 반드시 아버지 인조에게 올린 뒤에야 먹으니 인조가 늘 효자라고 칭찬하며 사랑과 기대가 높았다. 인조의 병세가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호를 효종이라 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볼모로 끌려가 청나라 심양에 8년간 머물렀다.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봉림대군은 그대로 청나라에 있다가 그해 4월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 세자에 책봉됐다. 그리고 인조 승하 5일 후인 1649년 5월 13일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해 1659년 5월까지 꼭 10년간 재위했다.

    효종은 조귀인(趙貴人·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키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해 나라의 중요 정책목표로 삼았다. 또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날로 강해지는 청의 군사력에 눌려 북벌을 실천하지 못했다. 대신 두 차례에 걸친 나선(러시아) 정벌에서 군비를 확충하는 효과를 보았다. 한편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을 훈련도감에 수용해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고자 염초(焰硝) 생산에 주력했다.



    효종은 두 차례의 외침으로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충청도,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지방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던 것을 쌀, 베 혹은 돈으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제도)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고, 전세(田稅)를 1결(結)당 4두(斗)로 고정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유통시켰으며, 역법(曆法)을 개정해 태음력의 구법(舊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해 만든 시헌력(時憲力)을 도입했다.

    대동법 실시·상평통보로 경제 질서 확립

    8년간 끔찍한 볼모 생활 자나깨나 ‘북벌의 꿈’꾸었다

    조선 왕릉 재실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아서 보물로 지정된 영릉의 재실.

    효종은 ‘진풍(秦風)’의 황조장(黃鳥章)을 강할 때 “중국에서는 잔인하게 신하로 하여금 광중에 들어가게 하고, 자기는 죽기 싫어하면서 사람(신하)을 죽인다. 또한 광중에 보화를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유익함이 없고 오히려 도굴의 참화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여후(呂后)의 무덤이 모욕을 당하고 진나라 황제의 무덤이 도굴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문제(漢文帝)는 검약하게 해 참화를 당하지 않았고, 광무제(光武帝)의 수릉도 겨우 빗물만 흐르게 했으니 어찌 후세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이 말에서 조선 왕릉이 검소하고 간결하며 부장품을 화려하게 넣지 않아 도굴을 방지하고, 능역 조영에 드는 국력의 손실을 줄였음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위한 이러한 문민정치 덕분에 조선 왕조는 518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에서는 능침 현궁의 안쪽에서 빗장을 치기 위해 능침에 산 사람을 넣었고 부장품도 많이 넣었다. 실제로 필자가 중국의 어느 능역을 방문했을 때 관리자로부터 “중국의 능은 능원 조영 다음 날부터는 도굴범과의 전쟁이었다”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조선 왕릉이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산릉도감의궤’ 등에 부장품의 종류와 내용이 자세히 소개돼 있으며, 실물보다는 간소화한 부장품과 모조품을 매장했기 때문이다. 엽전도 종이를 이용한 모조지폐를 사용했다.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효종은 능을 배알(참배)할 때도 간소화할 것을 명했다.

    1659년 5월 4일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가 심하게 부어서 안포(眼胞·눈가)에 산침을 놓았으나 혈락(血絡)을 찔러 피가 멈추지 않은 채 효종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41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의료사고로 추정되는데, 이 일로 의관들은 국문을 당하고 유배됐다.

    그해 지금의 구리시 동구릉 내 건원릉 서쪽 원릉(元陵) 자리에 병풍석으로 효종의 영릉을 조성했다. 그러나 부실공사인지 예송(禮訟) 논쟁에 휘말린 탓인지, 능침에 틈이 생기고 빗물이 스며들어 수차례 수리를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1673년 10월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초장지를 조성했던 총호사와 산릉도감 등은 관직이 삭탈돼 유배됐다.

    그러나 현궁을 열어보니 완벽했다. 그래서 온전한 재궁은 열지 않고 그대로 여주로 옮겼다. 천봉 시 새 능터에 있던 민가 25채, 묘소 60여 기를 옮기고 조성했다. 천봉 시 작성한 ‘효종천봉 도감의궤’에는 반차도(국장 시 장례행렬도)가 채색도로 그려져 있어 현존하는 조선시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8년간 끔찍한 볼모 생활 자나깨나 ‘북벌의 꿈’꾸었다

    (왼쪽) 영릉은 능침과 정자각이 일직선에 있다. (오른쪽) 효종의 능침은 위에, 인선왕후의 능침은 아래에 놓인 조선시대 최초의 동원상하 쌍릉.

    곡선미 아름다운 동원상하릉

    효종의 정비인 인선왕후는 성이 장씨(張氏)이며 본관은 덕수(德水)다. 아버지는 우의정 신풍부원군 장유(維)이고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인선왕후는 1618년 12월 25일 안산(安山)에서 태어났다. 13세에 12세인 봉림대군의 아내로 간택돼 다음 해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봉해졌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에 갔을 때 함께 머물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효종이 여주로 천봉된 다음 해 인선왕후는 질병으로 고생하다 1674년 2월 24일 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이때 시어머니인 인조의 비 조대비(趙大妃)가 복(服)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기년복(1년복), 대공복(9개월복)을 둘러싸고 서인인 송시열과 남인인 윤휴, 윤선도 등이 대립했다. 결국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큰며느리로 대우하는 기년설을 따라 1년간 상복을 입기로 했다.

    발인에 3690여 명을 동원해 150여 척의 배로 강나루에서 한강과 남한강을 이용해 3일 만에 여주에 도착했다.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同原)에 택정(擇定)돼 왕릉 앞에 비릉(妃陵)을 써서 위아래로 쌍분을 이루는 조선시대 최초의 동원상하릉(東原上下陵)이 만들어졌다.

    효종의 능침은 천장하면서 병풍석을 없애고 난간석을 사용했다. 이후 이러한 제도가 한동안 지속됐다. 또 동자석주에 글씨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동원상하의 능은 하나의 강(岡)에 광(壙)의 넓이가 좁아 아래위에 풍수상 혈의 자리에 능침을 조성한 조선시대의 특이한 형식이다. 또 상하 능이 나란한 일자형이 아니라 약간 사선에 놓였는데, 자연의 지형을 잘 이용한 곡선미와 조형미가 아름답다.

    8년간 끔찍한 볼모 생활 자나깨나 ‘북벌의 꿈’꾸었다

    영릉의 석호들은 해학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동원상하릉은 성북구의 의릉(경종)과 더불어 2개뿐이다. 동원상하릉은 왕의 능침만 곡장을 두르고 왕비의 능은 두르지 않는데, 정자각과 곡장 사이를 하나의 공간으로 해석해 왕과 왕비가 같은 방을 쓰고 있다는 의미다.

    영릉의 능침 석물은 사회적 안정기에 조성한 것이어서 조각의 기교가 뛰어나고 아름답다. 특히 무석인의 모자 표현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시대상을 읽을 수 있으며, 석호의 눈망울이 크고 해학적이며 발톱과 꼬리가 생동감을 준다.

    영릉은 재실에서 하천을 따라 곡선을 이루는 배향로를 걸으면 위요감(圍繞感) 속에 능원이 숨어 있음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은 성역의 공간과 속세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정자각의 배치가 왕의 능침과 일직선으로 있으며,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교를 놓은 유일한 능원이다. 일반적으로 금천교는 홍전문 앞에 있다. 이렇게 자연의 지형에 조화롭게 시설물을 배치한 것이 조선 왕릉의 특징이다.

    영릉의 재실은 현재까지 소실된 전사청 외에는 온전히 보전돼 재실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됐다. 영릉 재실의 건물들은 전반적으로 민도리 홑처마 집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부 수법을 보면 짜임새가 있다. 그리고 제기고, 재방,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의 시설이 유기적으로 적정하게 배치돼 있다. 또한 경내의 제향과 관계있는 향나무와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그 의미를 더한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전통 담과 어우러져 자라고 있어 고풍스러움을 준다. 느티나무는 정승을 나타내는 나무다. 효종 영릉은 인조의 장릉(長陵)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 능원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 1명의 후궁 사이에 1남 7녀를 두었다. 첫째가 18대 왕 현종(顯宗)이다. 그의 능호는 숭릉(崇陵)이고 구리시 동구릉 내 서측 능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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