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5

2010.09.20

플래그풋볼 효과? 외고생들만 안다

미국 대학 진학용 스펙 쌓기로 인기 … 미식축구·라크로스·조정 등 비인기 종목에도 몰려

  •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입력2010-09-17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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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래그풋볼 효과? 외고생들만 안다

    용인외고 플래그풋볼 팀.

    8월 14일 경기 포천군. A대 미식축구부 합숙훈련장에 한 아주머니가 아들의 손을 잡고 나타나 “미식축구를 가르쳐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미국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이 미국 사립대학 입시에 필요한 ‘스펙’ 관리를 위해 미식축구를 배우려 한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 고등학교 미식축구부에 들어가려면 당장 ‘한국에서 미식축구를 했다’는 경력이 필요했다. 학생은 방학을 맞아 한국에 찾아와 미국대학수학능력평가시험(SAT) 학원을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 미식축구와 조정을 배웠다. 이 학생은 단 하루 미식축구를 배웠고 어머니는 “약소하다”며 5만 원권 40장을 놓고 갔다.

    대학 입시에 입학사정관제가 일찍 자리 잡은 미국에서는 교과 성적 이외의 활동이 중요한 변수다. 특히 봉사활동과 체육활동의 가산점이 크다. 미국 명문 공과대학에 다니는 재미교포 이모(24) 씨는 “SAT 성적만으론 진학하기 어려웠다. 고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던 경력을 에세이에 잘 녹여내 합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에는 아직 고등학교 미식축구부가 없다. 그 대신에 미국 유학 열풍을 타고 플래그풋볼(Flag football)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미식축구와 비슷한 구기 종목

    플래그풋볼은 미식축구와 비슷한 구기 종목이다. 미식축구공보다 조금 작은 공을 사용하는데, 공을 가진 선수가 허리에 매달린 깃발을 빼앗기지 않고 상대 진영에 들어가면 점수를 얻는다. 미식축구는 헬멧, 숄더패드 등 장비를 착용하고 거친 몸싸움을 한다면, 플래그풋볼은 맨몸으로 하기에 부상의 위험이 적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부상 위험은 줄이고 미식축구 특유의 ‘전략의 묘미’는 살린 것이다.

    최근 졸업 후 미국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학생이 많은 수도권 외국어고등학교(이하 외고)를 중심으로 플래그풋볼의 인기가 확산되고 있다. 용인외고, 대원외고 등에 이미 창단됐고 한영외고, 국제고, 민족사관고도 창단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현재 80여 개 초·중·고등학교에 창단됐다. 박재식 한국플래그풋볼연맹 회장은 “외고 학부모들이 먼저 연락해 자녀의 학교에 팀이 창단되도록 도와줄 수 없는지 묻는다. 미국 대학 입시에 플래그풋볼, 미식축구가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고 말했다.



    한국외국어대 부설 용인외고 플래그풋볼팀의 졸업생이 거둔 입시 성과도 한몫했다. 2008년 제4회 캐나다 몬트리올 국제플래그풋볼 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용인외고 학생들은 비록 대회 성적은 꼴찌였지만 미국 스탠퍼드대, 시카고대, 버클리대, 펜실베이니아대 등에 진학했다. 명문대에 자녀를 보낸 용인외고 학부모는 “합격에 플래그풋볼이 결정적 요소였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시작된 플래그풋볼을 하며 미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고 리더십을 기를 수 있었다는 점이 점수를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플래그풋볼 효과’는 플래그풋볼계 바깥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청담유학원 유학담당 관계자는 “미국 사회에서는 미식축구가 가장 중심에 있다. 동양에서 온 학생이 미국의 상징인 미식축구나 플래그풋볼을 했다고 에세이에 쓰면 평가자들은 호감을 갖고 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VVIP들이 회원으로 가입한 ‘반얀트리서울’ 호텔도 플래그풋볼 클래스를 열고 회원을 모집했다. 미국 생활 경험이 있는 회원들의 플래그풋볼 클래스 개설 요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한 고등학교 플래그풋볼 팀에는 대기업 회장 아들도 선수로 활약 중이다.

    플래그풋볼이 스펙 쌓기에 도움이 되는 또 하나 이유는 국제 경험이다. 인기 스포츠인 축구, 야구, 농구를 통해 국제대회에 나가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특히 체육 특기생 중심의 국내 학원 스포츠 풍토에서 미국 대학입시를 준비할 만큼 공부하면서 국제대회에 나갈 운동 실력을 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1990년대 말 한국에 도입된 플래그풋볼은 아직 저변이 좁아 국가대표에 선발되기가 훨씬 수월하다. 또 세계미식축구연맹(IFAF)이 미식축구, 플래그풋볼의 저변 확대를 위해 전파에 앞장서고 있어 국제 교류를 위한 환경이 조성됐다. 플래그풋볼 선수들은 꾸준히 해외 대회에 나가고 외국 선수들과 정기적으로 교류전을 하는 등 국제 경험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

    2010년 IFAF 선수위원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용인외고 장준영 군이 뽑혔다. 장군은 앞으로 플래그풋볼 대회 운영과 관련해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장군은 “처음 접하는 운동이라 신기해서 플래그풋볼을 시작했다. 대학 입시에 도움을 받으려고 하진 않았지만, 세계기구에 위원으로 선정된 경험이 나중에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플래그풋볼의 효과가 알려지자 국가대표 선발을 둘러싸고 잡음이 나오고 있다. A학교 플래그풋볼 담당교사는 “외고에 팀이 생기는 일은 환영한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을 해야 하는데, 학생 중에는 경력에 한 줄 넣으려고 대표팀에 무임승차하는 경우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상목 플래그풋볼연맹 사무국장은 “우리 아이가 국가대표가 되는 데 돈이 얼마나 드느냐, 국가대표 확인증이 있으면 돈을 줄 테니 만들어달라는 식으로 요구해오는 학부모 있다”고 말했다.

    대표팀의 외고 출신 독식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대표팀 선출 과정의 폭을 넓혀 좀 더 실력 있는 선수를 선발해야 공정하고, 실력에 따라 뽑을 때 미국 대학도 한국에서 플래그풋볼 선수로 활약한 경력을 계속 인정해줄 것이란 주장이다. 이 사무국장은 “처음 국제대회를 나갈 때 비용은 모두 선수가 부담했다. 그래서 실력보다는 상당한 경비를 부담할 수 있는 형편의 학생이 나갈 수 있었다. 이제는 경기력을 우선해 국가대표라는 스펙 한 줄 노리는 선수가 아닌, 실력이 걸출한 선수를 선발할 계획이다”고 해명했다.

    다양한 종목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

    플래그풋볼 효과? 외고생들만 안다

    2010년 8월 14일 제5회 캐나다 오타와 국제플래그 풋볼 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이 덴마크 대표팀과 경기를 치렀다.

    플래그풋볼 등 다양한 종목에 대한 일선 교육 현장의 관심이 대학 입시용이 아니냐는 비판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될 것이란 시선이 지배적이다. 용인외고 플래그풋볼 담당 박영신 교사는 “좋은 대학을 가려고 시작하는 학생도 있지만, 교사와 코치가 노력한다면 순수한 열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일부 인기 종목에 편중된 스포츠계 현실에 다양한 종목의 보급 기회도 된다”고 주장했다.

    용인외고에는 플래그풋볼과 함께 비인기종목 라크로스 팀도 인기를 끌고 있다. 남녀 학생 통틀어 1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그동안 외국 명문대학 진학 성적에서 두각을 나타낸 민족사관고는 ‘지덕체가 아닌 체덕지다’고 강조할 정도로 운동에 열심이다. 10여 년 전통의 민족사관고 조정부는 강원도민체전 2부리그 횡성군 대표로 나갈 만큼 공부와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테니스, 조정, 골프, 마라톤 등 다양한 종목이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한 학부모의 말이다.

    “외고에는 대학 입시를 고려해 1인 1종목 체육 바람이 불고 있다. 입시를 위한 활동이라 해도 이를 통해 부족한 체력을 기르고, 운동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한다. 요트 등 최고급 스포츠 활동이 아니라면 다양한 종목을 준비하는 학생들의 노력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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