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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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도 기가 막힌 ‘금도장 로비’

4대 국새 제작과정 비리 의혹 쏟아져 … 국가 기강 세우려면 차라리 새로 만들자!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10-08-30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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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새도 기가 막힌 ‘금도장 로비’

    옥새 장인 민홍규 씨가 만든 대한민국 국새. 하지만 이 국새와 관련한 비리 의혹은 커지고 있다.

    조선 태종 3년(1403) 4월 8일 명(明)나라 영락제의 즉위를 축하하러 간 등극사(登極使) 하륜(河崙, 1347~1416)이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가지고 한양에 도착했다. 고명은 중국 황제가 주변 제후국 왕을 임명하는 임명장이고, 인신은 왕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 금으로 만들거나 도금한 도장인 금인(金印)이다. 이른바 고명과 금인은 조공책봉 관계의 표징으로 중국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비로소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편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 개국 이래 태조 이성계는 명태조 홍무제에게 고명과 인신을 요청했으나 종계변무 문제(宗系辨誣問題·이성계 계보를 바로잡기 위한 문제), 표전 문제(表箋問題·정도전이 작성한 외교문서로 명태조가 정도전 소환 요구), 양국 간 국경 마찰 등 외교 현안으로 불편한 관계가 계속돼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험악한 조명관계가 홍무제의 훙거와 정도전의 죽음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홍무제 사후 명나라는 2대 황제인 건문제가 즉위했으나 3년 후 삼촌 영락제에게 숙청되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러한 명나라의 복잡한 내부 상황은 조선에 유리하게 작용해 태종이 2대 황제에게 고명과 인신을 받았음에도 새 황제인 영락제에게 새로운 고명과 인신을 요청하자, 영락제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조선에게 바로 고명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 새겨진 금인을 보냈다. 이성계는 말로만 조선 국왕이었고, 조선 국왕이란 명칭은 태종 때부터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로써 조선과 명의 사대외교가 정립됐으니 이른바 존명사대(尊明事大) 정책으로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면서 조공무역을 통해 경제적 실리를 추구할 수 있었다.

    조선 초, 명나라 영락제가 ‘조선국왕지인’ 금인 보내

    조선 국왕이 중국 황제로부터 받은 금인은 흔히 옥새(玉璽)라고 통칭했는데, 정확하게 따지면 옥새는 옥으로 만든 인장이다. 진시황제 때 화씨벽(和氏璧)을 얻어 천자의 인장으로 제작한 것이 그 유래인데 중국으로부터 내려진 옥새에는 ‘예왕지인(濊王之印)’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 혹은 ‘조선국왕지인’ 등의 인문(印文)이 새겨져 있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이 출범하면서 자주적 의미의 옥새가 처음으로 제작·사용됐는데 ‘대한국새(大韓國璽)’와 ‘황제지세(皇帝之璽)’의 두 가지 인문이 새겨졌다.



    옥새는 왕조시대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문서(외교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됐고, 왕위 계승 시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됐다. 또 국왕 행차 시 행렬 앞에 봉송돼 위의당당(威儀堂堂)을 과시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옥새제도가 폐지되고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국새(國璽) 제도가 마련돼 1949년 5월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가 제작됐다. 1970년 3월 인문을 한글 전서체(篆書體)로 고쳐 ‘대한민국’으로 했다.

    옥새도 태평성대에는 정상적인 왕위 교체로 차기 왕에게 전수됐으나 난세에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는 순조 원년(1800) 아버지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의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가 즉위했으나 어린 나이 탓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

    정순왕후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장헌)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영조의 외척인 벽파(僻派) 김구주(金龜柱)의 누이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순왕후는 옥새를 거머쥐자 친정인 경주 김씨 일가를 요직에 발탁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세자의 외척세력인 시파(時派) 세력을 대대적으로 타도했다. 그때 천주교 탄압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엄청난 피바람이 불었는데, 남인시파 정약용(丁若鏞) 집안도 예외는 아니어서 다산의 셋째 형인 정약종은 순교하고,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유배 길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정순왕후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파였던 안동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이미 정조 때 간택됐다가 순조비가 된 것이다. 그 후 벽파 정권은 시파 정권으로 교체되고 말았다.

    순조는 재위 27년(1827) 2월 장남 효명세자(익종, 1809~1830)에게 대리청정을 맡겼으나 효명이 4년 만에 죽자 그의 장남인 8세의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이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했다. 헌종이 어려서 할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의 비, 1789~1857)의 수렴청정이 시작됐고, 헌종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권력 암투의 와중에 호색군주로 전락해 1849년 6월 6일,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 1808~1890)의 무릎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그때 순원왕후는 나인에게 명령해 옥새를 가져오게 하고는 “국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 시급하다. 전계군 제3자 이원범(李元範)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라고 천명했다.

    세도정치 그늘에 국새 수난…민주주의 시대에 웬 국새 수난?

    국새도 기가 막힌 ‘금도장 로비’

    고종이 1903~1905년 러시아, 이탈리아 등에 보내는 비밀외교문서에 사용했던 황제어새.

    헌종 10년(1844) 형 이원경(회평군)의 옥사로 천애고아가 돼 강화에 유배된 14세의 이원범은 나무를 하고 농사짓다가, 5년이 지난 19세에 별안간 명을 받아 창덕궁 인정문에서 옥새를 받고 국왕에 즉위했다. 그가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이다. ‘강화도령’ 철종은 나이는 어리지 않았으나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왕이 돼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던 19세기 3대 63년에 걸친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수렴청정의 시대였고, 정상적으로 옥새가 전수되지 못한 혼돈의 시대였다. 세도정권의 그늘 아래 국왕은 하나같이 유약한 군주로 자신의 경륜을 펼치지 못하고 술과 여색에 탐닉해 국정을 그르쳤다.

    최근 2007년에 제작한 대한민국의 상징인 국새에 대한 비리 의혹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제4대 국새의 주조 과정,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의 국새문화원 건립 지원, 황금 횡령, 금도장의 정·관계 로비, 국새 제작 단장이 옥새전각장이 아니라는 이력 등 국새 의혹에 국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고, 3년간 수면 아래 잠복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니 대한민국이 유린당한 느낌이 든다. 2007년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말이고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해인데, 국새를 제작하고 남은 금으로 16개 도장을 만들어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와 행정자치부 공무원 등에게 13개를 돌리고 3개는 일반인에게 판매했다니 범법행위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누구에게 왜 금도장을 돌렸을까. 책임부서인 행정안전부는 빠른 시일 안에 하얀 가면 뒤에 숨겨진 검은 실체를 샅샅이 밝혀 국가의 얼굴인 국새에 대한 진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2000만 원 상당의 금도장이 누구에게 전달됐는지, 그 실명을 공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세도정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금의 금도장 로비를 보면서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 사주 박흥식(朴興植, 1903~1994)이 순금 명함을 만들어 총독부 고위 관료를 접견해 면담을 성공시켰다는 추악한 이야기가 떠으로기도 한다. 국민의 일부를 끝까지 속이고, 국민의 전부를 한때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의 전부를 끝까지 속일 수는 없는 것이 역사의 정의가 아닐까. 이명박 정부는 이런 국새라면 하루라도 빨리 폐기하고 새로운 국새를 만들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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