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6

2010.05.10

日 아이코 공주 이지메 “아이쿠”

3학년 신학기 마사코비가 함께 등교 … 일왕부자 불화까지 일본 왕실 흔들

  • 이종각 =도쿄 jonggak@hotmail.com

    입력2010-05-10 14: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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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도심의 한적한 주택가인 메지로(目白)의 넓은 녹지에 ‘가쿠슈인(學習院)’이란 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황족과 화족(구 막부시대 다이묘 등) 자녀에게 근대식 교육을 시키기 위해 1877년에 세웠다. 1920년대에 ‘황족취학령’이 제정돼 황족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 학교에 다녔다. 일제 강점기에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도 이 학교에 다녔는데, 친일파가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내려고 조선총독 등에게 부탁했다는 기록도 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황족취학령이 폐지되고 이 학교는 사립이 됐지만, 황족은 대부분 유치원부터 대학원 과정까지 있는 이 학교를 다녔다. 현 아키히토(明仁) 천황(일왕)을 비롯해 나루히토(德仁) 황태자와 동생들도 모두 이 학교를 나왔다.

    지난 3월 초 이 학교 초등과 2학년에 재학 중인 황태자의 외동딸 아이코(愛子) 공주가 남학생에게 ‘난폭한 행동’을 당해 장기 결석한 사실이 밝혀져 한바탕 소동이 일었으며 그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궁내성의 황태자 일가 담당책임자인 동궁대부(東宮大夫)가 3월 5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밝힌 아이코 공주의 결석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이번 주 들어서 통학할 때 복통 등과 심한 불안감을 토로해 학교 측과 협의해 원인을 조사했다. 같은 학년 다른 반에 난폭한 행동을 하는 아동들이 있는데, 이들이 ‘아이코 사마(樣)’를 포함해 다른 아동에게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이 원인으로 판명됐다. 이번 주엔 거의 학교에 가지 못했다.”

    황족 자녀 ‘가쿠슈인 신화의 붕괴’

    이 사실이 알려지자 개교 이후 130여 년간 황실 스스로 만들어온 ‘가쿠슈인 신화의 붕괴’라는 개탄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이 같은 사실이 조용히 해결되지 않고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공표’된 것이 더욱 문제였다. 두 사안 모두 과거 같으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학교 측은 동궁대부 발표 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직접 폭력행위나 ‘이지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없으며 과거에 같은 학년 남학생 중 수명이 상당히 난폭한 행위를 했는데, (오랜만에 등교한 아이코 공주가 그 생도를 보고) 아마도 그때 일을 떠올려 불안감을 느낀 것으로 해석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난폭한 행위에 대해서도 “물건을 던지거나 복도를 뛰어다니거나 큰 소리로 떠드는 생도가 수명 있었으나 지난해 11월 이후로는 잠잠해 이번 일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난폭한 아동이 아이코 공주의 목을 비틀었다는 보도도 나와 학교 측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난폭한 행위의 진위가 무엇이든 초등생들 사이에서 있을 수 있다고 넘길 법도 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동궁대부가 사실상 황태자 부부의 뜻에 따라 공식 발표를 하고 이를 매스컴이 대대적으로 보도해 큰 소동으로 비화됐다. 황실이 난폭한 행동을 한 아동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일자 급기야 천황 부부가 아이코 공주, 학교, 아동 가운데 “어느 쪽도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해결하라”는 당부(3월 11일 궁내청 발표)를 하기에 이르렀다.

    4월 초 신학기가 시작돼 3학년으로 진급한 아이코 공주는 어머니인 마사코비가 함께 등교해 수업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학교를 다니고 있다. 일본 황족으론 사상 처음 학교에서 이지메를 당한 아이코 공주는 3년 전 사촌동생 히사히토(悠仁) 왕자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미래의 여성 천황으로 부상한 주인공이었다.

    일본에는 역대 8명의 여성 천황이 있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주도해 헌법과 황실전범을 만들면서 천황 계승자를 ‘황남자손(皇男子孫)’으로 규정,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나루히토 황태자(1960년생)가 외무성에 근무하던 마사코(雅子, 1963년생)비와 1993년 6월 결혼해서 2001년 12월 1일 딸 아이코가 태어났고, 황태자의 동생 아키시노노미야(秋篠宮)와 기코(紀子)비 사이에도 딸 둘(1991년, 1994년생)밖에 없어 황통을 이을 아들이 없었다.

    2000년대 중반 당시 집권당인 자민당은 천황이 전립선암 제거수술(2003년)을 받은 데다 70대(1933년생)에 들어섰기 때문에 후계 문제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됐다. 자민당은 당내에 신헌법기초특위를 구성해 여제(女帝), 즉 여성 천황을 용인하는 방향으로 황실전범을 개정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총리 자문기구인 ‘황실전범에 관한 유식자회의’도 여제 용인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2005년 11월). 매스컴에서 여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됐고 여론도 영국, 네덜란드 등 여왕이 있는 서구제국처럼 여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러나 2006년 2월 뜻밖에도 39세의 기코비가 회임한 사실이 알려져 여제 허용을 위한 법안 제출이 연기됐다. 아들이 태어나면 천황이 된다는 집념의 결실일까. 기코비는 40세 생일을 앞둔 2006년 9월 6일 아들 히사히토를 낳았다. 일본 황실로선 아키시노노미야 이래 41년 만에 태어난 남아다. 이로써 황위 계승 순위는 1위 황태자, 2위 아키시노노미야, 3위 히사히토 왕자로 이어지면서 황위 계승 문제는 한숨 돌렸고 여제 논의도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만약 사촌 남동생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아이코 공주는 여제가 됐을 가능성이 컸다.

    황태자 부부 둘러싼 부정적인 소식들

    아이코 공주의 결석파동 이전에도 황태자 부부와 관련해 부정적인 소식이 많았다. 황태자가 결혼한 지 10년쯤 지났을 무렵부터 마사코 황태자비를 둘러싸고 천황과 황태자 간 불화설이 터져 나왔다. 외교관의 딸로 하버드대학을 나와 도쿄대학 법학부에 학사 편입해 재학 중 외무성에 들어간 마사코비는, 황태자비로서의 중압감이 큰 데다 궁중제사 등 황실문화와 환경에도 적응하지 못해 ‘적응장애’란 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진단(2004년 7월)돼 지금도 요양 중이다. 앞서 황태자가 기자회견에서 “마사코의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는 발언을 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사코비가 황실과 궁내청 등 주변으로부터 인격을 부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이뿐 아니라 황태자가 아이코 공주를 데리고 천황 부부에게 자주 인사를 가지 않아 천황이 자주 들를 것을 당부하고, 황태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뒤에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궁내청 장관이 회견에서 밝혀(2008년 2월) 천황가의 불화가 심상치 않음을 말해주었다.

    천황을 신격화하며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벌였던 1945년 이전의 쇼와(昭和) 정권과 달리, 패전 후 일본 천황은 헌법상 국정에 대한 권한 없이 ‘일본국 및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된 ‘상징 천황’에 불과하다. 이 같은 천황제를 일본 국민 대다수는 여론조사에서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천황을 절대적으로 존경하거나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층이 줄어드는 가운데, 특히 젊은 층은 천황과 황실에 무관심하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천황제가 없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외국 전문가들은 본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천황제가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현재 나타나는 일본 황실의 불화와 혼란상은 부모에게 무조건 복종하던 가부장적 사회에서 벗어나는 자연스러운 시대 변화 중 하나일지 모른다. 이런 와중에 일어난 아이코 공주의 결석파동은 황실에 대한 일본 국민의 의식변화를 말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과거와 같이 천황에 대한 절대복종이나 추종이 아닌 민주화와 자유분방이 우선하는 이때, 일본 황실은 적응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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