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8

2010.01.05

철도노조 파업은 사측의 육참골단(肉斬骨斷)?

2009년, 공공기관 12곳 단협해지 … 무단협 상태에서 노조활동 규정은 효력 잃어

  •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입력2009-12-29 11:5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철도노조 파업은 사측의 육참골단(肉斬骨斷)?

    11월24일 철도공사가 단협해지를 통보하자 철도노조는 26일부터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으로 열차가 지연되면서 시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인기리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신라군 총지휘관 설원랑은 백제군의 침략에 맞서 ‘육참골단(肉斬骨斷)’ 전략을 구사한다. 내 살을 내주고 적의 뼈를 끊는 전법이다. 이때 설원랑의 ‘살’은 경쟁자인 김서현 부대이고, 적의 ‘뼈’는 속함성의 백제군이다.

    자신의 일부를 희생해 상대방에게 결정타를 가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망라한 전략이다. 지난 11월26일부터 8일간 이어진 철도노조 파업도 사실상 철도공사 측의 육참골단이 아니었느냐는 주장이 철도노조와 노동단체 일각에서 제기된다. 이른바 ‘파업 유도 단체협약 해지 기획설’이다.

    ‘철도공사는 단체협약 해지(이하 단협해지)를 통보하면 철도노조가 파업할 것을 예상했다. 파업으로 어려움을 겪지만(내 살을 내주지만), 파업에 참여한 이들을 고소하고 징계 절차를 밟으면서 단협해지의 정당성을 확보해 노조를 무력화한다(적의 뼈를 끊는다)’는 것이 기획설의 요지다.

    기획설은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철도공사의 대외비 문건을 공개하고 “철도공사가 노조 파업을 유도했다”고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이 의원이 공개한 ‘전국 노경담당팀장회의 자료’ 임금단체협상(이하 임단협) 교섭 전략 부문에는 3가지 예상이 제시돼 있다. △‘예상1’은 임단협이 노동위의 조정과 교섭, 산발적인 투쟁이 지속되면서 연말까지 이어지는 경우 △‘예상2’는 조정과 교섭국면에서 파업행위를 전개하는 경우 △‘예상3’은 노조의 소극적 양보가 이뤄지는 경우다. 단서로 “노조는 파업 찬반투표 찬성률, 대외 노동정세, 공사 측의 대응 수위에 따라 ‘예상1’과 ‘예상2’ 투쟁을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공사는 ‘예상1’ 상황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단협해지’를 통한 압박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대외비 문건 공개 노조측 ‘발끈’



    이 밖에 노조가 공사 측 안을 수용하지 않는 경우 단협해지 통보를 하며, 조정 종료 후에도 쟁의행위를 계획하고 쟁의에 돌입할 경우 해지통보를 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 각종 파업대책이 제시돼 있으며 불법파업 참가자에 대한 중징계 방침도 분명히 했다.

    문건이 공개되자 철도노조 측은 발끈했다. 철도노조 관계자는 “11월24일 몇몇 기자가 ‘허 사장이 중대 발표를 한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어왔다. 오후 2시 30분경 교섭이 있었고, 25일에도 교섭이 있을 예정이었다. 잘못 안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결국 그날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단협해지를 통보했다”며 “10월 초 만들어진 문건의 내용과 동일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지 않나. 사측은 처음부터 교섭을 원하지 않았고, 단협해지의 명분을 철도노조 파업에서 얻으려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등 야당은 이번 사건이 1999년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면서 의혹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고 나섰으며, 상황은 일파만파 커졌다. 이에 철도공사는 12월17일 “철도노조는 지난 8월부터 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연맹단체) 및 공공노조와 11월 연대투쟁을 결의하고 수순을 밟아왔다. 따라서 여러 경우의 수를 놓고 나름대로 대책을 준비했으며, 이는 공사의 당연한 조치”라고 반박했다.

    단협해지는 노사관계에서 극약처방으로 통한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2조 3항에는 ‘단체협약 만료 6개월 전에 상대방에게 사전통고하면 종전의 단체협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2008년까지만 해도 실제로 단협해지를 단행한 곳은 거의 없었다. 노사 간 쌓아온 신뢰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면서 노사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단협해지 입법 목적 또한 교섭의 장기화를 막자는 데 있다.

    단협 내용이 기관장 평가 좌우

    철도노조 파업은 사측의 육참골단(肉斬骨斷)?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공개한 ‘전국 노경담당 팀장회의 자료’와 ‘조직 안정화를 위한 전국 소속장회의 자료’.

    하지만 2008년 11월 노동부가 ‘단체교섭 및 단체협약 체결 관련 지도지침’을 각 공공기관에 내려보내면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후 공공기관에서 단협해지 규정을 악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2009년 한 해 단협해지가 빈발했다. 철도공사 이외에도 한국노동연구원, 해양수산개발원, 직업능력개발원, 5개 발전회사 등 12곳의 공공기관에서 단체협약이 취소됐다.

    전국공공연구노조 이광오 정책국장은 “단협해지는 단협 안에 사회통념상 인정받기 힘든 조항이 들어 있거나, 최선을 다해 협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결렬된 경우에 행해져야 비로소 인정받는다. 지금은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 사측의 일방적인 단협해지가 남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단협해지 통보 후 6개월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무(無)단협 상태가 된다. 이 상태에서도 개인에게 보장된 근로조건, 임금 및 여러 퇴직금 규정은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노조활동과 관련된 조항은 단협해지 통보 후 6개월부터 효력을 상실한다. 이때 사측은 노조 사무실 폐쇄, 조합비 공제 중단의 조치를 내릴 수 있다. 노조 관련 회의도 인정되지 않으며, 사측은 노조 전임자에게 현업 복귀를 명령할 수 있고 이에 불응하면 징계도 내릴 수 있다.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관계자는 “개인에게 보장되는 부분도 단협이 아닌 취업규칙에 따르게 된다. 이때 사측이 개인과 근로계약 내용을 변경할 경우 그대로 효력이 인정된다. 사측에서 ‘해고되기 싫으면 변경안을 받아들이라’고 협박할 때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라면서 “결국 단협보다 취약한 조건에서 근로자의 권리가 규정된다”고 지적했다.

    공공기관들이 독단적 단협해지라는 안팎의 비난에도 이를 강행하는 이유는 단협 내용이 기관장 평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2009년 공공기관 기관장평가는 리더십(20%), 공공기관 선진화(40%), 기관 고유과제(40%) 3개 부문으로 나눠 실시됐다. 공공기관 선진화 부문은 2008년엔 7개 세부지표로 나눠 평가됐으나, 2009년엔 경영 효율화와 노사관계 선진화 2개 지표로 구분됐다.

    기획재정부는 “노사관계 선진화 부문에서는 합리적이고 적법한 노사관계 구축을 위한 기관장의 노력과 의지, 그리고 단협 내용 및 그 개선도를 평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2010년 6월 말로 예정된 공공기관장 경영평가에서는 노사관계 항목의 비중을 지금의 15%에서 25%로 높인다는 방침이다. 이광오 국장은 “단협 내용이 기관장의 직위와 연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서 공공기관장으로서는 현행 단협을 개정하거나 해지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단협해지 통보를 하고 무단협 상태가 됐더라도 성실교섭 의무는 유지된다. 무단협 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막고, 설령 무단협 상태가 되더라도 이를 최소화해야 한다. 하지만 사측은 오히려 이를 즐기는 형국이다. 실제 철도노조 파업이 끝난 지 3주가 지났지만 제대로 된 교섭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성실교섭이 뒤따라야 “무단협 상태까지 가서 노조를 무력화한 다음, 새로운 단협에서 사측이 칼자루를 쥐려는 것 아니냐”는 노조 측의 의구심도 사라질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