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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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상품 … 무대 위 숨쉬는 인형

치밀한 스토리텔링으로 콘셉트 판매 … 말 한마디·행동까지 사전에 철저히 준비

  • 김범석 동아일보 산업부 기자 bsism@donga.com

    입력2009-09-11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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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돌=상품 … 무대 위 숨쉬는 인형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를 담은 일본의 옥외광고판.

    # 1 일본 남성 5인조 아이돌 그룹 ‘스마프(SMAP)’의 멤버 구사나기 쓰요시가 4월 말 도쿄 경찰에 체포됐다. 혐의는 ‘공공외설’. 이른 새벽, 도쿄의 한 공원에서 체포됐을 때 그는 술에 취한 채 알몸 상태로 소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 소식이 전해진 날 아침, 일본 열도는 발칵 뒤집혔다.“착하고 성실한 이미지였는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한국 팬들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2002년 한국에서 ‘초난강’이란 이름으로 싱글 음반을 냈고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에도 출연해 ‘곧바른’ 이미지를 쌓아놨기 때문이다.

    # 2 1987년 아이돌 가수로 데뷔해 현재 배우로 활동 중인 사카이 노리코가 최근 마약 성분 각성제를 복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데뷔 초 밝은 느낌의 노래를 부르며 깜찍한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터라 팬들은 “상큼한 이미지에 각성제라니…”라며 한숨만 내쉬었다.

    한국만큼이나 늘 시끌시끌한 일본 연예계. 최근 아이돌 스타들의 사건, 사고가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유독 아이돌 스타들의 사건에는 몇 배의 충격이 뒤따른다. 평소 이미지와 조금만 다른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이 냉혹해지기 때문.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상향, 꿈을 대입하며 위안을 얻던 아이돌 스타. 그래서 아이돌은 잘 만들어진 ‘조각상’이라 불린다. 때로는 “자기 것은 없는 거품이요, 이미지에 불과하다”라는 비판도 받는다. 그럼에도 일본 대중문화의 주연은 철저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콘셉트가 만들어진 아이돌 스타다.



    ‘아이돌=이미지’, 한 단계 더 나아가 ‘아이돌=상품’이 나오게 된 것은 바로 콘셉트 때문이다. 아이돌은 사소한 표현방식 하나에도, 무대 위 사회자의 질문 하나에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사전에 철저히 정해진다. ‘콘셉트 전쟁’이 본격화한 것은 1980년대. 일본 아이돌 역사의 전성시대라 불리는 이 시기를 이끌어나간 쌍두마차가 있었으니, 바로 여성 아이돌계 대표 스타이자 라이벌인 마쓰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다.

    1980년 데뷔한 마쓰다 세이코는 일본 오리콘차트에서 24장의 싱글 음반을 연속으로 1위에 올려놓는 기록을 세웠고, 1982년 데뷔한 나카모리 아키나는 연말 가요대상 격인 일본 레코드 대상에서 여가수로는 최초로 1985년, 1986년 2회 연속 대상을 받는 등 두 가수의 활약은 대단했다.

    하지만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까닭은 콘셉트에 있었다. 마쓰다 세이코는 밝고 경쾌한 장조 노래만 부르는 반면 나카모리 아키나는 슬픈 단조 음악 위주로 노래를 불렀다. 무대 퍼포먼스 역시 마쓰다 세이코는 경쾌하게 손을 흔들거나 웃음 띤 얼굴로 남성 팬들을 유혹했고, 나카모리 아키나는 허스키한 목소리, 카리스마가 묻어나는 몸짓으로 여성 팬들을 불러모았다. 마쓰다 세이코를 ‘태양’, 나카모리 아키나를 ‘달’에 비유하는 것도 이 때문.

    이는 두 가수의 의지라기보다 데뷔 이전부터 계산된, 소속사의 의도에서 비롯된 결과다. 하지만 ‘밝거나 혹은 어둡거나’라는 두 사람의 2강 구도도 1980년대 후반 2인조 여성 듀오 ‘윙크(Wink)’가 등장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 듀오의 콘셉트는 ‘절대침묵’이었다. 그전까지 여성 아이돌 스타는 TV에 나와 핑크빛 미소를 보여주고 백치미 풍기는 표정으로 “전 아무것도 몰라요”를 외치는 것이 공식처럼 여겨졌다.

    반면 이 듀오는 진지하리만큼 굳은 표정으로 곱게 노래를 불렀다. 곧바로 “특이하다” “신기하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남성들은 “뭔가 슬픔이 서려 있다” “보호해주고 싶다”며 이들의 팬이 됐다. 이른바 아이돌 스타 홍수기에 틈새 콘셉트를 노린 이들은 급기야 1988년 발표한 세 번째 싱글을 오리콘 싱글차트 1위에 올리며 A급 스타로 각광받았다.

    소속사, 칼날 마케팅 통해 이미지 관리

    아이돌=상품 … 무대 위 숨쉬는 인형

    지난 3월 새로운 싱글 앨범을 발매한 아무로 나미에.

    콘셉트 경쟁이 여성 아이돌 스타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1987년 데뷔해 엄청난 인기를 모은 7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히카루 겐지(光 GENJI)’는 데뷔 초부터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무대를 누벼야 했고, 17년 후 같은 소속사에서 데뷔한 후배 아이돌 그룹 ‘칸자니 에이또’ 멤버들은 댄스 그룹을 연상케 하는 수려한 외모와는 딴판으로 구성진 엔카(演歌)만 불러야 했다. ‘엔카도 젊고 스타일리시해질 수 있다’는 게 이 그룹의 모토였다.

    일본 아이돌의 경우 콘셉트 못지않게 음악의 스타일이 다양하고, 수준이 매우 높다. 이런 분위기는 남성 아이돌, 특히 ‘자니스’ 소속 가수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새 그룹이 데뷔할 때면 실력파 싱어송 라이터들을 섭외해 그들에게 곡을 받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1990년대 아이돌 스타 아무로 나미에는 수준 높은 음악은 물론 앨범 전체의 콘셉트, 춤, 무대 의상까지 프로듀서가 관여해 만들어낸 ‘상품’이다. 데뷔 초 그저 그런 댄스 가수였던 아무로 나미에는 명프로듀서 고무로 데쓰야를 만나면서 유로 테크노를 부르는 스타일리시한 가수로 거듭났다. 1996년 고무로와 함께 만든 그의 데뷔 앨범 ‘스위트 19 블루스’는 370만장 판매 기록을 세웠고, 아무로 나미에는 A급 스타로 급부상했다.

    일본 아이돌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는 소속사다. 소속사 캐스터가 발탁한 연예계 지망생은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은 뒤 데뷔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콘셉트에 따라 이미지를 완성해가고, 차트 1위에 오르기 위해 음반 발매 날짜까지도 신경 쓰는 치밀한 마케팅 계획에 맞춰 움직인다. 스마프를 비롯해 V6, 아라시, 캇툰 등 일본 최고 인기 아이돌은 소속사 자니스가 스토리와 이미지, 콘셉트 등을 불어넣은 ‘작품’이다.

    아이돌에 대한 소속사의 이미지 관리는 무시무시할 만큼 철저하다. 1986년 4월8일 낮 12시5분. 일본 도쿄 시부야의 7층 건물에서 오카다 유키코라는 스타가 창문을 열고 몸을 던져 사망했다. 그의 소속사 ‘선뮤직’이 입주해 있던 건물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근처 식당으로 가던 사람들은 피투성이로 땅바닥에 처박힌 그의 처참한 모습에 비명을 질러댔고, 일본 열도는 이 아이돌 스타의 자살로 발칵 뒤집혔다.

    인기 절정을 달리던 갓 스물의 아이돌 스타는 왜 비운의 여주인공이 됐을까. 중년 남성 탤런트와의 교제설, 연예계 왕따설 등 소문만 무성할 뿐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가 자살 직전까지 썼다는 일기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지금껏 그의 일기장은 소속사 비밀금고에 들어 있다.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뜻에서 공개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이돌의 사후까지 이미지를 관리하는 소속사의 철저한 태도가 엿보인다.

    치밀한 마케팅 역시 ‘소속사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1985년 데뷔한 여성 아이돌 그룹 ‘오냥코 클럽(おニャン子クラブ)’이 그런 단면을 잘 보여준다. 1987년까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이 그룹은 20세기 일본 여성 아이돌계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을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오냥코 클럽은 5인조, 7인조 같은 기존 그룹 개념에서 벗어나 20여 명의 멤버를 고무줄처럼 늘였다 줄였다 하거나 마음 맞는 멤버들끼리 음반을 내는 등 전례 없는 시스템에 따라 움직였다. 이들의 소속사는 또 평균 17~18세인 어린 여성 멤버들을 청순하고 발랄한 모습으로 꾸며놓고는 노골적인 가사의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들의 데뷔곡 ‘세라후쿠오 누가사나이데’(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는 “세라복을 벗기지 말아요. 지금은 안 돼요… 친구들보다 빨리 성 경험을 하고 싶지만…” 등의 가사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이른바 ‘오냥코 현상’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만큼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남성 팬들은 순진무구한 외양과 목소리로 섹스를 논하는 이들의 노래에 시선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튀어야 하는 것이 아이돌의 숙명이요, 인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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