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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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도 ‘연필 같은 사람’ 있었네

음유시인 故 강영권 부장검사의 삶 … 관대하게 베푸는 소통 실천한 ‘영원한 검사’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9-08-13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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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에도 ‘연필 같은 사람’ 있었네

    고 강영권 부장검사의 생전 모습. 산과 막걸리를 사랑한 소탈한 검사이자 시인이었다(좌측사진). 강 검사가 생전에 블로그에 쓴 문학평론과 시, 수필 등을 후배들이 묶어 출간한 유고집. 그 안에는 스스로 약자의 입장에서 검찰 수사기록을 보고 느낀 자성의 글도 있다(우측사진).

    검사가 검사 대접 못 받는 게 요즘이다. 검찰총장 인선 과정에서 튀어나온 ‘귀족검사’ ‘웰빙검사’라는 타이틀도 일선 검사들을 부담스럽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 내에선 고인이 된 한 검사의 이름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검찰 한편에서 일고 있는 소명의식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 틈에서 그의 인성과 소박함을 되새겨보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이다. 때마침 그가 생전에 검찰 내부통신망,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에 쓴 일기와 글이 가족, 동료들에 의해 유작(‘그의 글에 기대어 웃고 울다’ ‘그의 길에 기대어 웃고 울다’ 전 2권, 넥서스북 펴냄)으로 발표되면서 그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올해 3월14일 간경화로 51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故) 강영권 의정부지검 전문부장검사(사시 23회). 강 검사는 검찰총장, 고검장, 지검장 등 화려한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었다. 번번이 승진에서 밀려나 한직을 떠돌았다. 세상을 뒤흔든 사건을 수사한 경험도 없는 검사였다. 그렇지만 그가 검찰뿐 아니라 법조계에 남기고 간 흔적이 준 감동과 교훈은 어떤 검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게 그를 아는 법조계 인사들의 평이다. 유작과 선후배 검사들이 말하는 강 검사의 삶은 어떠했을까.

    문학을 즐긴 자유롭고 소박한 영혼

    그는 문학평론과 글쓰기를 즐겼다. 시를 직접 쓰기도 했는데, 특히 기존 문학작품에 나타난 작가의 의중과 감정을 자신의 상황과 연결해 현시대 흐름에 맞게 재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 흔적이 글 곳곳에서 묻어나온다. ‘아킨도’ ‘이건희, 세계의 인재를 구하다’ 등을 저술한 작가 홍하상 씨도 “강 검사는 검사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치켜세울 정도다.

    ‘적벽부(赤壁賦)’든, 서정주 시인의 ‘행진곡’이든, 연암 박지원의 기행문이든, 정약용의 이별시 ‘경안(驚雁)’이든 그는 자신의 처지와 작가의 심정을 절묘하게 오버랩해 가족과 일상의 소중함, 세상 사람들의 슬픔과 괴로움에 관한 철학을 얻어냈다. 문학에 대한 자유로운 동경, 이는 그에게 스스로를 정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실제 법조인, 검사로서 자신의 처지를 여러 작품에 빗대 자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대검찰청에서 기념품으로 만들어준 연필을 바라봤습니다. 연필심도, 연필심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도, 지우개까지도 새카맣습니다. 문득 파울로 코엘료의 수필집 ‘흐르는 강물처럼’ 중 ‘연필 같은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중략-연필은 가끔 쓰는 것을 멈추고 칼로 깎아야 할 때도 있고, 실수를 지울 수 있도록 지우개가 달려 있고, 외피를 감싼 나무가 아닌 그 안에 든 연필심이 중요하게 들어 있고, 또한 흔적을 남긴다는 내용) 처음엔 무심코 읽었던 수필 한 편이 대검찰청에서 보낸 연필 때문에 생생하게 의미가 되살아났습니다. 천지만물이 다 스승이고 법문을 설하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삽니다.”(‘그의 길에 기대어 웃고 울다’의 2장 ‘꾹꾹 눌러쓴 삶의 흔적’ 중 ‘연필 같은 사람’ 일부)

    그의 문학적 재능은 소박한 일상과 궤를 같이했다. 막걸리를 좋아했고, 운전면허증은 있지만 장롱에 놔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호화’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골프도 그에겐 사치였다. 법무부 감찰담당관실 송삼현 검사는 “본인 스스로 ‘영백회’(영원히 100타를 칠 수 없는 모임) 멤버라고 선을 그었을 정도”라며 강 검사의 소탈한 매력을 전했다.

    강 검사가 광주지검 특수부 부장검사로 재직할 당시 초임검사로 만나 이후 10여 년을 막역한 사이로 지낸 대검찰청 김범기 검사(연구관)는 후배들에게 격려와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강 검사에 대한 추억을 이렇게 털어놓는다.

    “아무리 어린 평검사라도 극진히 챙기셨어요. 매일 야근하는 평검사들의 방을 꼭 들러 격려를 해주고 가셨죠. 같은 부서가 아닌 검사들까지요. 보통 부장급 검사들은 그러지 않는데, 마음이 참 따뜻한 분이셨어요.”

    김 검사는 감동의 순간으로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전했다.

    “어느 날 갑자기 검사들을 아침 9시에 부르셨어요. 알고 보니 미리 검사들의 도장을 도장가게에 주문해 파놓으셨더라고요. 그러고는 검사들에게 도장을 하나씩 건네주면서 ‘좋은 사건, 영장 많이 올리라’고 격려해주시던 기억이 나네요. 후배 검사들이 야근할 때 방에 들어오셔서 ‘너희가 일을 못하도록 긴급 체포한다’며 농담하시던 모습도 생각나고요.”

    강 검사는 생전에 동료, 선후배와의 관계에 대해 확실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소동파가 22세에 과거시험에 낸 답안을 인용하면서 ‘남의 장점은 칭찬하되, 실수와 단점에 대해 관대를 베푸는 소통’을 실천했다. 검사로서 일반인을 상대할 때도 이와 똑같은 마음가짐이었다. 택시 운전기사들과 국밥집 아줌마 만나기를 좋아했다. 이런 그를 광주지검 순천지청 김웅 검사는 ‘어린 검사들의 친구’이자 ‘카페 아줌마들의 로망’으로 표현했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해 잔인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그의 길에 기대어 웃고 울다’ 중 ‘공직자의 자세와 직업윤리’에서 소동파의 답안을 인용하며)

    검사 선후배 “그가 흔적 남겨 참 다행”

    서울 동부지검 형사4부장을 맡은 이후로는 변변한 자리에 올라보지 못하고 한직을 맴돌았다. 특수, 형사, 공안 등 주요 사건 부서에서 소외된 전문부장직만 세 번이나 맡았을 정도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검사로서 일반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으니 만족스럽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고 한다.

    그는 검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와 절친한 선후배 검사들은 강 검사가 초임검사 시절 처음으로 모신 부장검사가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설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심 전 고검장 역시 검찰을 떠난 지 오래지만 아직도 검사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하는 검사’로 꼽힌다.

    미래의 꿈도 ‘영원한 검사’라는 타이틀 아래서 꿨다. 승진이 안 돼 후배들이 변호사로 나갈 것을 권유하거나 유명 로펌에서 변호사 영입 제안이 와도 “벽에 ×칠할 때까지 검사로 살 것”이라는 말로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무능하기는커녕 후배들에게 노련한 선배 검사로 불렸다. 특히 후배 검사들이 민감한 사건을 수사할 때 외부에서 압박이 들어올 때면 독특한 재치와 기지를 발휘해 후배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고 한다. 김 검사는 “그럴 때면 ‘송곳론’으로 후배들이 수사를 하는 데 부담을 갖지 않도록 해주셨다”고 전했다. 송곳론의 핵심은 송곳은 끝에서부터 사물에 박힌다는 것. 자신은 송곳 뚜껑이므로 아무리 사정해봐야 소용없음을 의미한다. 그는 후배들의 기를 살려주면서 외부 상대에겐 검찰 수사의 정당성에 대해 기분 나쁘지 않게 설득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알려진 사실만 봐도 요즘 검사들과는 참 다르다. 남긴 흔적마다 의미가 있어 검사의 ‘교본’이라 부르는 법조인도 많다. 그가 떠난 지 5개월. 이제야 검사 선후배들의 입에서 ‘그가 남기고 간 것이 있어 참 다행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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