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1

2017.03.29

정치

이순자가 그린 남편 전두환의 초상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출간

  • 정리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사진 출처 · 이순자 자서전

    입력2017-03-27 09: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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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정권’은 한국 현대사에서 논쟁이 가장 많은 정권이다. 그 정권의 심장부에서 영부인으로 권부(權府)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던 이순자(78) 여사가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를 펴냈다. 전두환 부부가 청와대를 나온 지 약 30년 만이다. 23장(章) 719쪽에 달하는 자서전은 크게 세 기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본인의 성장사와 전두환-이순자 부부의 가정사, 6장부터 14장까지는 제5공화국 청와대 시절 경험, 15장부터 23장까지는 대통령 퇴임 이후 한 세대 가까이 계속된 전두환-이순자 부부의 고난사가 담겨 있다.


    이 여사는 “청와대와 일반 사람들의 거리가 멀어진 이유가 서로를 너무 모르기 때문”이라며 “7년간 청와대에 머물렀던 경험 등을 비디오테이프 찍어서 보여주듯 소개하고 싶었다”고 집필동기를 밝혔다. 또 그는 기록과 기억 등 ‘사실’에 기초해 기술했다고 강조했다. 물론 그의 사실이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의 글에서 제5공화국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4월 초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되면 이들 부부는 또 한 번 논란의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여사가 쓴 자서전의 주요 대목을 발췌했다(호칭은 생략). 



    이순자의 국보급 순애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가.”
    이화여대 의과대학에 진학한 이순자는 전두환과 연애 시절, 일기 속에 사랑의 기쁨을 이렇게 적곤 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전두환은 ‘헤어지자’며 이순자에게 절교편지를 보낸다. 급성맹장염으로 사경을 헤매던 이순자를 등에 업고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가 수술을 받게 한 전두환은 왜 절교를 선언했던 것일까.

    “사랑은 감정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고 책임이고 현실이라는 걸 깨달았어. 결혼 적령기인 대위 봉급이 겨우 쌀 한 말을 살 정도에 불과하다 보니 이상을 실현하기는커녕,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형편이어서 결혼한 장교들의 생활은 정말 눈뜨고 보기 힘들 수밖에.”
    이순자는 이런 전두환 식 절교 선언에 도리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저는 어떤 난관이든지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것은 순간적인 감상이 아니라 제 결심이에요.” 전두환과 이순자는 1959년 1월 24일, 대구 경북고 앞 제일예식장에서 이순자의 아버지 이규동 씨의 상관인 최영희 제2군사령관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국회의원 제안을 뿌리치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책에는 ‘군사혁명’으로 기술됐다) 이틀 뒤 전두환은 ‘5·16 혁명 지지를 위한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을 주도했다. 이 시가행진을 계기로 박정희는 전두환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얼마 뒤 전두환은 당시 고급장교에게 필수 과정이던 ‘광주보병학교 고등군사반’ 입교를 위해 박정희에게 민원비서관 사임 결심을 밝힌다.

    박정희 의장은 “현역 군인만이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예 이 기회에 군복을 벗고 나라를 위해 일해보도록 하는 게 어떤가. 국회의원 출마 준비를 하게. 내가 모든 지원과 뒷받침을 해줄 생각이야.”

    그러나 전두환은 군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순자는 “박 의장을 보좌하는 일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해도 (전두환이) 천직을 버리고 인생의 방향 전환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1973년 1월 1일, 전두환은 장군으로 진급했다. 이순자는 “임관 이후 줄곧 ‘나라 위해 이 생명을’이라는 충성의 횃불을 태워온 남편의 어깨와 가슴에 불꽃이 타올라 별이 되어 내려앉았다”고 회고했다.



    12·12, 그리고 5·18

    “아버지(전두환)는 이 역사적인 대사건의 수사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 사건이 미궁에 빠져들지 않도록 철저히 진상을 규명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크게는 국민들과 역사에 대한 책임이고, 또 작게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오늘의 내가 있도록 보살펴주신 박 대통령에 대한 의리이고 신의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끝까지 소신을 지킨 아버지를 제대로 기억해야만 한다.”

    1979년 보안사령관으로 박정희 시해사건 수사를 맡은 전두환이 이순자와 네 자녀에게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12·12사태를 하루 앞둔 12월 11일 밤 전두환은 이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일은 하늘에 맡깁시다. 사심 없이 하는 일이니 하늘의 보살핌이 있을 것이오.” 10·26과 12·12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순자는 1980년 1월 15일 대학 편입시험을 치렀고, 연세대 어학당에 다녔다.

    그해 5월 이순자는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서 ‘전두환 화형식’을 목격했다. 이순자는 ‘아니, 남편이 없어져야 하다니. 남편이 언제 정치무대에 등장이라도 했단 말인가’라는 생각에 남편에게 씌워진 엄청난 오해와, 화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죽음의 저주가 무척 억울하고 무서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결국 전두환은 그해 9월 11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이순자는 “지난 25년 동안 자신의 모든 땀과 열정을 바쳐 헌신했던 군인으로의 삶과 작별하게 만든 후 상상해본 적도, 소망해본 적도 없는 엄청난 새 소명을 남편에게 안겨주었다”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것을 ‘운명’으로 돌렸다.


    영부인 이순자의 세일즈 외교담

    “청와대에서의 새 생활은 내게도 그 분의 새 임무만큼이나 많은 투자와 분발을 요구했다. 양념 냄새에나 익숙해 있던 평범한 주부로부터 한 나라의 대통령 영부인으로의 갑작스러운 변신은 책임감과 불안감으로 나를 잠 못 이루게 했다.”

    이순자는 1980년 9월 초 초보 영부인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겪어야 했던 실수담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참석했던 행사가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되는 경우 실망은 더욱 컸다. 연설문만 너무 들여다보면 청중에게 결례가 되는 것 같아 연설문에서 자주 눈을 뗀 날은 화면에 비친 나의 시선이 한없이 불안하고 분주해 보였다.

    평범한 화장은 카메라 조명을 받으면 번쩍거리기 때문에 훨씬 더 꼼꼼하게 분을 발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반복되는 실수와 낭패한 심정 속에서 괴로워하다 깨달은 일이었다. 조언자가 없으니 결국 시행착오를 통해 스스로 배워가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이순자는 영부인으로서 한국 세일즈 활동에 나선 일화도 소개했다. “당시 ‘경제 되살리기’를 정부의 당면 최대 목표로 삼고 있던 남편은 지금처럼 나라 형편이 어렵고 무역만이 살 길인 나라에서는 대통령 가족도 세일즈맨이 되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반복해 강조하곤 했다.

    그래서 외교사절 부인들과 만날 때 단아한 선과 담백한 멋을 지닌 백자 다기에 인삼차 같은 우리 전통차를 담아 내놓고, 적당한 기회에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우리나라 백자라든가 인삼의 효능에 대해 은근한 자랑을 시도하는 역할이 필요했다. 아무리 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던 힘겨운 과제였다.”

    1981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전두환 당시 대통령 내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워싱턴을 방문했다. 워싱턴에서 전두환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했다. 이순자는 미국 방문 때 교포들과 만난 후일담을 이렇게 회고했다.

    “미국 방문 도중 우리 내외는 몇몇 장소에서 반정부 단체들의 거센 시위와 대면해야 했다. 심지어 정상회담이 있던 날도 백악관 밖에서는 반정부 세력들의 시위가 계속되는 서글픔이 있었다. 당연히 친북세력의 선동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중에는 북한과 아무 상관없이 새 지도자가 된 남편에 대해 깊은 오해와 비판의 감정을 지닌 사람도 많았던 것으로 짐작됐다.

    장영자 사건과 아웅산 테러사건

    이순자는 1982년 불거진 장영자 사건에 대해 “사실상 나도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한 여자의 대담한 사기행각의 피해자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내용이야 어찌됐건 남편으로서는 처삼촌이 연루가 되어 구속된 사건이었다. 조금씩 민심도 안정되고 경제도 생기를 되찾아 겨우 자신감을 얻고 있던 시점에 날벼락같이 찾아온 횡액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아웅산 테러사건에 대해 이순자는 두 가지 천행 덕에 남편 전두환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나는 중공(현 중국) 등 공산권을 근접해 지나는 항로를 변경하는 것이 좋겠다는 우방 관계당국의 조언으로 우회 항로를 택해 아웅산묘소 참배 일정이 도착 다음 날로 바뀐 것.

    당초 일정대로 도착 직후 아웅산묘소를 참배했다면 일행이 동시에 움직여 아무도 참화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다른 하나는 행사장 출발 시간이 늦춰진 일이다. 행사장까지 안내해야 할 미얀마 외무장관이 승용차 고장으로 지각하는 바람에 출발 시간이 3분 정도 지체됐고 그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6·29 선언과 1987년 대선

    “국민의 뜻이 직선제라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전두환)
    “직선제 개헌을 선택할 경우 대통령 후보직을 사퇴하겠다.”(노태우)
    1987년 6·10 민주화운동 당시 두 사람의 의견이 이렇게 갈렸다는 게 이순자의 회고다.

    결국 직선제를 비롯해 야당과 국민이 요구하는 모든 민주화 조치를 적극 수용하는 과감한 구상을 전두환이 책임지고 만들고, 그로 인해 거둘 수 있는 모든 수확과 영광을 노태우에게 양보했다는 게 이순자가 기억하는 6·29 선언이다.

    이순자는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뒤 두 부부끼리 만난 축하 자리에서 김옥숙이 싸늘하게 “민정당이 얼마나 인기가 없던지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고 말해 놀랐다고 썼다. 그는 40년 지기 ‘노태우 부부’를 애증관계라고 표현했다.


    족쇄가 된 추징금

    내년 2월이면 전두환-이순자 부부가 청와대를 나온 지 꼭 30년이 된다. 그동안 백담사 유배, 5공 청문회, 5·18 특별법 제정으로 전두환은 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1997년 12월 사면복권됐지만, 이번에는 추징금 환수가 부부의 발목을 잡았다. 이순자는 “어떻게 박정희의 딸이 우리한테 이럴 수 있나”라고 썼다.

    이순자는 “나는 진짜 죽으려고 했다. 이렇게 몰면 ‘죽음으로써 보복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추징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해도 둘째 아들의 이혼한 전처 집까지 가서 돈 될 만한 것을 다 가져갔다. 그게 비자금과 관계 있는 건지는 실사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순자 여사 인터뷰 | “대통령 탄핵, 안타깝기 그지없다”자서전 발간을 계기로 동아일보와 채널A는 이순자 여사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두 차례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본 적 있나.
    “(박정희 대통령) 돌아가시고 직접 본 적이 있는데, 침착하고 나이에 비해 카리스마가 있었다. 보통 사람에게서 느낄 수 없는 뭔가가 있더라.”


    탄핵 대통령이 됐는데.
    “정말 안타깝기 한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배출한 여성 대통령인데,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무리하고 나왔다면 양성평등 차원에서도 참 좋은 예가 됐으련만, 잘잘못을 떠나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많다.”

    박근혜 정부에서 ‘전두환 추징법’을 만들었는데.
    “좀 과하다 생각했다. 정치 지지기반이 없는 상태로 (청와대) 들어가 정말 잘해놓고 나오려고 있는 힘을 다해 임기를 마치고 나왔는데, 이후 30년 동안 진짜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어떤 사람은 나라를 외환위기 사태로 몰고 가도 나쁜 소리를 안 듣더라.”




    장영자 사건으로 별거에 이혼까지 생각했다고 책에 썼는데, 아직도 세간에서는 이순자와 장영자가 많이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거꾸로 질문하겠다. 친정 작은어머님의 동생하고 교분이 있는지. 없지 않나. 나도 그랬다. 세상 살다 보면 별 억울한 일이 다 있다. 내가 (장영자 사건 소문이 떠돌기에) 알아보라고 했는데, 거꾸로 피해는 내가 봤다. 그 사건 후로 별의별 소리가 다 돌았다. 장영자하고 내가 빨간바지 입고 빨간모자 쓰고 부동산 보러 다닌다고. 아휴, 청와대는 갈 곳이 못 되는 것 같다. 근데 대통령이 되면 별의별 사람이 다 애를 먹인다.”

    “이희호 여사 존경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데.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우리가 제일 편안하게 살았던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은 1년에 매분기마다 중요한 국가 현안이 있을 때면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관계장관으로부터 현안을 상세하게 보고하게 해줬다.”

    이희호 여사에 대한 존경심이 깊다고.
    “참 존경한다. 설, 추석, 그이 생일, 내 생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난과 장뇌삼을 보내주시는데, 꼭 서명을 한 편지를 함께 보내온다. 모든 걸 떠나 같은 전직 대통령 부인으로서 본받을 점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왕래는?
    “전화는 한 번 드린 적 있다. 감사하다고.”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인 김옥숙 여사에게 서운한 마음을 책에 썼던데.
    “백담사 갔을 때가 서운함의 클라이맥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거 없다. 최근에도 (김옥숙 여사가) 집에 다녀갔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전두환 표창장’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비판받고 있는데.
    “표창장 줄 때는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이다. 그런 것까지 정치 선거에 이용되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그이가 대통령에 재임할 때 표창, 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그 시대에 정말 뭐든지 잘해서 국가에서 준 것이지 전 아무개가 준 것이 아니다. 그런 걸로 전 아무개가 줬으니까 집어던져야 한다는 것은 조금 편협한 생각 아닌가.”

    6  ·  29 선언은 시민들이 쟁취한 것 아닌가.
    “시민이 쟁취한 건 맞다. 그런데 시민이 쟁취한 건 직선제다. 직선제 자체가 민주화는 아니지 않나. 대통령이 때가 되면 헌법을 막 바꿔서 장기집권하던 시절에서 (전두환 퇴임으로) 대통령도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게 민주화 아닐까. 우리나라에 그런 (권력의) 선순환이 시작됐다는 게 민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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