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2

2009.06.30

국군포로, 죽어서도 분단에 통곡한다

故 이규만 씨 유해 상반신은 북에, 하반신은 남에 안치 … 기막힌 사연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9-06-25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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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노예였습니다. 입은 밥 먹을 때만 놀려야 했디요.”

    감정이 북받칠 때면 그의 입에선 ‘북한말’이 튀어나왔다. 여러 차례 눈물이 맺혔지만 떨어뜨리진 않았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으며 살았는데 이까짓 눈물쯤 못 참겠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6·25국군포로가족회 이연순(47) 대표는 2004년 10월 북한 함경북도 회령시에 묻혀 있던 아버지의 유해를 파내 같은 해 12월 대전 현충원에 안장했다. 아버지의 ‘유해 탈북’을 혼자 기획하고 실행했다. 그런데 유해의 하반신만 남한으로 돌아왔고, 상반신은 북한에 다시 묻혔다.

    “× 같은 새끼들이 아버지 유해를 반으로 나눴어요. 쳐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그는 죽어서라도 남한에 묻히고자 했던 아버지 얘기를 꺼내면서 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아버지 고(故) 이규만(1931~2000년) 씨는 6·25전쟁 당시 국군 이등중사였다. 1953년 7월 휴전을 며칠 앞두고 마지막 전투가 치열하던 강원도 김화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아버지는) 회령의 학포 탄광으로 끌려갔어요. 그곳에서 수백명의 국군포로와 발파공으로 일했죠. 3년 뒤 ‘내각결정 43호’에 따라 국군포로에게도 가정을 꾸리도록 했어요.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는데, 가족에게는 모두 ‘43호 집’이라는 낙인이 찍혔죠.”

    휴전 앞두고 포로로 잡힌 이등중사

    실제로 북한은 1956년 6월 ‘내각결정 143호’라는 명칭을 붙여 국군포로에게 공민증을 내주고 사회인으로 환원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때부터 북한에서는 국군포로라는 말이 사라지고 ‘143호’ 또는 ‘43호’라는 말이 사용됐다.

    국군포로, 죽어서도 분단에 통곡한다

    현충일을 앞둔 6월4일 탈북한 국군포로와 그 가족이 대전 현충원의 고(故) 이규만 중사 묘역을 찾아 넋을 달랬다(좌측사진). 지난해 9월 강원 화천군에서 발견된 북한군 유해가 판문점에서 북측으로 송환되는 광경. 국군포로 가족들은 북한 내 국군포로 유해도 이처럼 판문점을 통해 들여와야 한다고 지적한다(우측사진).

    어쨌든 이등중사였던 이 대표의 아버지는 전쟁고아였던 어머니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이 대표를 포함해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 당시 어머니는 “(결혼하면) 밥을 먹여준다”는 말에 남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결혼했다고 한다.

    국군포로, 죽어서도 분단에 통곡한다

    이연순 대표는 국군포로와 그 가족이 당한 차별과 천대를 말할 때면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 유해 송환으로 풍비박산 난 북한의 가족 얘기를 할 때는 한동안 말문을 닫았다.

    국군포로가 대부분인 탄광촌에서는 ‘남한말’이 표준어였다. 가끔 평양말을 쓰는 사람들은 ‘죄짓고 들어온 사람’이었다는 게 이 대표의 기억이다.

    이 대표의 아버지는 1964년 탄광 발파작업 중에 일어난 사고로 얼굴뼈가 함몰되고 오른쪽 대퇴부를 크게 다쳤다. 1년여 치료를 받은 뒤 이듬해 회령시에서 40여km 떨어진 까치봉 기슭 산골에서 벌목공으로 일했다.

    “한쪽 다리가 마비된 아버지는 혼자 움막을 짓고 나무를 베고 숯을 굽는 야인생활을 했어요. 인민복을 군데군데 기워 입어 윗옷 무게만 5kg이 넘었죠. 그렇게 혼자서 30여 년간 생활하다 보니 나중에는 언어장애가 왔어요.”

    벌목일은 이 산 저 산으로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외롭게 혼자 생활했다. 한두 달에 한 번 집에 올 때는 늘 안색이 어두웠으며, 밥 먹고 잠만 잤다.

    “입은 밥 먹을 때만 놀리는 거야, 함부로 놀리면 안 돼.”
    ‘모처럼 왔는데 놀아주지 않는다’고 칭얼대면 으레 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웃에게 주요 감시 대상이던 ‘43호 집’의 안전을 위해 철부지 자녀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이 대표가 이해하게 된 것은 어른이 되고 나서였다.

    영하 40℃의 추위에 눈보라가 몰아치면 아버지의 식량을 들쳐메고 어머니와 산 중턱을 올랐다. 아버지와 만날 수 있는 기회였지만 추워서 서로 말도 못한 채 헤어지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봤어요. 오늘 나무를 얼마 하고 담배를 몇 대 피웠고 다른 벌목공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를 매일 기록했더라고요. 세상에 이런 노예가 있나 싶었죠. ‘43호’는 무조건 참아야 했어요.”

    어느 날 아버지가 곰을 잡았다. 혼자 벌목 작업을 하다 곰과 맞닥뜨렸고, 아버지는 살기 위해 도끼로 곰을 쳐죽여야 했다. 당 간부들은 ‘보호동물’을 잡았다며 아버지에게 6개월간 급여를 주지 않더니, 자기들끼리는 곰발바닥까지 챙겨서 ‘파티’를 했다.

    ‘43호’ 딱지 붙여 감시하고 ‘왕따’

    한번은 회계일을 보던 아버지의 친구가 집에 놀러 와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 새벽 그 친구가 죽었다. 친구의 가족들은 ‘43호 집’에 들이닥쳤고 세간을 다 때려부쉈다. “‘43호’가 죽였다는 거예요. 그 일로 아버지는 보름간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이웃들은 우리에게 침을 뱉었죠. 그런데 보름 뒤 심장마비사로 밝혀졌고 아버지는 돌아왔어요.”

    학교에서도 43호는 ‘사상적 분석 대상’이었고 ‘왕따 1호’였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순시하는 이른바 ‘1호 행사’ 때는 단체로 이동해 있다가 행사가 끝나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많은 천대와 차별을 어떻게 다 말하겠습니까.”

    61세까지 벌목일을 하던 아버지는 퇴임 후 노동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두 동생이 군에 입대해 병 수발은 큰딸의 몫이었다. 어느 날 북한 내 ‘탈북 브로커’가 접근해 탈북을 돕겠다고 나섰다. 반신반의했지만 그를 통해 남한의 호적등본을 건네받았다. 유일한 혈육인 고모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눈에 빛이 나더니 꼭 전해달라며 편지를 건넸다. ‘사막의 청수(淸水)처럼 그리운 내 동생에게’로 시작하는 편지였다.

    “시름시름하셨는데, 어디서 힘이 나셨는지 남한에 가야 한다며 흥분하셨어요. 다리에 마비가 와 두만강을 건널 수 없어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죠.”

    아버지의 바람은 거기까지였다. 고대하던 남한행(行)이 불발하자 2000년 4월13일 아버지는 큰딸을 불렀다. ‘또박또박’ 몇 마디 한 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울지 마라. 고향에 가고 싶지만 살아서는 어렵겠다. 내가 죽으면 베개를 뜯어봐라.”

    베개 안에는 삭은 비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엔 ‘군번 8812170, 수도사단 1연대 2대대 7중대’라고 쓰인 수첩과 고향(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 약도,‘경주 이씨’ 가계도가 담겨 있었다. 이 대표는 경악했고, 탈북을 결심했다.

    4월15일 김일성 생일에 곡소리가 나면 안 된다며 당 간부들은 4월14일에 서둘러 장례를 치르라고 고함쳤고, 이 대표는 분을 삭이며 달구지를 빌려 장례를 치렀다.

    결국 그는 단신으로 탈북을 감행했다. 2003년 6월 두만강을 건너 태국을 거쳐 아버지의 ‘유언의 땅’ 한국을 밟았다. 서울 국립현충원에 모셔진 아버지 위패를 보고는 또 한 번 목 놓아 울었다. 아버지는 1953년 9월 회령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아버지 유해가 대전 현충원에 신속히 안장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기록 때문이다).

    삭은 비닐에 담긴 군번과 가계도

    그러던 중 2004년 4월 국군포로 백종규(1997년 사망) 씨의 유골이 탈북한 딸의 품에 안겨 한국에 왔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 뉴스를 본 이씨는 아버지가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었으면 언어장애임에도 또박또박 유언을 남겼을까라는 생각에 며칠을 울었다.

    국방부와 외교부에도 여러 차례 문의했다. 북한은 좀 어렵지만 중국에서 한국으로의 유해 송환은 돕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래서 이 대표는 2004년 9월 중국으로 건너갔고, 지인을 통해 북-중 접경지역에서 아버지 유해를 건네받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반신 유해 송환’이라는 기막힌 ‘영화’를 찍을 줄은 몰랐다.

    밤에 택시를 타고 유해를 옮기던 중 룽징(龍井) 인근 초소에서 중국 공안에게 들켜 여권을 빼앗겼다. 유해 냄새가 진동하자 공안은 유해를 치우라고 했고, 그는 인근 과수원에 유해를 몰래 가매장했다. 일주일 뒤 공안 측에서 조사를 받으러 오라고 해 그는 베이징(北京) 한국대사관의 영사와 상의했다.

    “영사는 일이 잘 진행될 테니 중국 공안의 지시에 따르라고 했어요. 공안 측에서는 유해를 보관소에 넣어두라고 하더군요.”

    그는 한밤중에 다시 과수원으로 가 유해를 꺼냈다. 냄새가 나지 않게 유해를 랩으로 서너 겹 쌌고, 한국에서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아버지의 하반신 유해를 따로 챙겼다. 자칫 일이 잘못됐을 때에 대비한 것이기도 했다. 며칠 뒤 여권을 찾으러 간 그는 공안의 말대로 상반신 유해를 보관소에 넣어두었다. 중국 공안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당황해했다.

    며칠 뒤 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영사는 “(유해 송환이) 어렵겠다”며 말을 바꿨고, 때마침 중국 내 탈북 브로커가 북한 보위부에서 이 대표를 잡으러 온다고 알려줬다. 사정은 급박했고 여비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부랴부랴 하반신 유골만 챙겨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국군포로가 51년 만에, 그것도 하반신만 조국의 품에 안긴 기막힌 스토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5년이 지났지만, 그는 당시 영사의 이름을 대며 문제가 생기자 발을 뺀 외교부의 행태에 치를 떨었다.

    아버지의 유해 일부를 가져왔지만 이 대표에겐 슬픔의 나날이 이어졌다. 다행히 그의 두 딸은 탈북에 성공했지만, 아버지의 유해 상반신은 북송됐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남동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005년 9월 남한 측에서는 비전향 장기수의 유해를 군사분계선을 통해 북으로 보냈어요. 그런데 이 나라를 지킨 ‘전쟁 영웅’은 이렇게 모시기 어려워서야…. 나라를 지킨 국군포로들은 죽어서도 남의 땅에 묻힌 포로입니다. ‘유해 포로’라도 모셔와야죠.” 그는 또 한 번 눈물을 참으며 인터뷰를 끝냈다.

    한편 정부는 현재 북한에 국군포로 560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귀환한 국군포로는 70명이며 그중 13명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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