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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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선덕여왕을 꿈꾸나

최고권력자의 딸·40대 정치 입문·영남 기반 등 ‘닮은꼴’ 세간 이목 집중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06-17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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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는 선덕여왕을 꿈꾸나
    진흥왕에 이어 중고기(中古期)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키운 진평왕이 632년 세상을 떴다. 진평왕의 죽음으로 성골 남성이 없어져 장녀 덕만이 40대 후반에 즉위하니 그가 바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585~647, 재위 632~647)이다.

    여성으로 최고의 통치권자가 된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생각해보자.(‘화랑세기’는 덕만을 차녀로 보지만 정사인 ‘삼국사기’는 장녀로 돼 있다. 여기서는 ‘삼국사기’를 따른다)

    첫째는 신라의 전통적인 여성관으로,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혁거세와 알영의 이성(二聖) 지배구조다. 둘째는 골품제도에서 진흥왕-동륜(진흥왕의 태자)-진평왕으로 이어지는 성골 왕실, 즉 불교의 신성개념인 석가족(釋迦族)의 왕실을 칭하는 진종설화와 왕즉불(王卽佛) 사상이다.

    그리고 셋째는 불교의 영향으로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불성을 가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여성 성불론(成佛論)이다.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



    그러나 여왕의 즉위가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대내적으로는 즉위 1년 전인 진평왕 53년(631) 덕만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모반이 일어났으며, 대외적으로는 당 태종이 여왕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천명해 신라와 냉랭한 기류가 조성됐고, 백제와는 잦은 전쟁으로 긴장 국면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복잡다단한 정황에서 즉위한 선덕여왕은 어떤 캐릭터였을까. ‘삼국사기’는 그의 성품을 “관인명민(寬仁明敏)하여 국인(國人)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라고 전하니 너그럽고 어질며 밝고 민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진위논쟁 중인 ‘화랑세기’ 필사본도 “용과 봉황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있었다(龍鳳之姿 天日之表)”라고 기술, 여왕의 위엄이 치국의 요체를 체득했음을 보여준다.

    여왕의 총혜(聰慧)와 인자(仁慈)를 보여주는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와 ‘지귀설화(志鬼說話)’도 전해진다. 먼저 ‘삼국유사’ 기이편과 ‘삼국사기’에 일부가 전하는 ‘지기삼사’, 즉 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부터 살펴보자.

    제1화는 아버지 진평왕이 당으로부터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얻어와 덕만에게 보이니 “이 꽃은… 향기가 없겠습니다”고 한 것이다. 왕이 웃으면서 “네가 어떻게 아느냐” 하니 “꽃을 그렸는데 봉접(蜂蝶)이 없으니 그래서 압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그의 ‘미리 아는 지혜’가 이와 같았다.

    제2화는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3, 4일간 울자 나라 사람들이 이를 괴이 여겨 여왕에게 물었는데 각간 알천 등에게 “정병 2000명을 뽑아 빨리 서교로 가서 여근곡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덮쳐서 죽여라” 한 것이다.

    가보니 과연 그대로라 나중에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그런 사연을 미리 알았느냐고 묻자 “개구리의 성낸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이란 것은 여자의 생식기니 여자는 음이고, (음은)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방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남자의 생식기는 여자의 생식기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이로써 쉽게 잡을 줄 알았소”라고 답해 여러 신하가 모두 그 성지(聖智)에 감복했다고.

    제3화는 왕이 병 없이 건강할 때 여러 신하에게 “내가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 속에 장사 지내시오”라고 이른 것이다. 여러 신하가 그곳을 알지 못해 여왕에게 물었더니 “낭산 남쪽이다”라고 답했는데 그달 그날에 이르러 여왕이 정말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하들이 그곳에 장사 지냈다. 10여 년 후에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여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는데,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다소 황당무계한 내용이지만 ‘지기삼사’를 분석해보면 제1화는 즉위 전 후계자 수업을 받던 공주 시절 선덕여왕의 세심한 관찰력과 종합적인 판단력을 보여주며, 제2화는 선덕여왕이 와성(蛙聲)을 듣고 백제군의 매복 사실을 미리 알아 토벌했다는 설화로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광범위한 정보망을 구축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제3화는 선덕여왕이 도리천의 천신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는 호국염원이 담긴 선지적 예언으로 ‘샤먼적 여왕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설화는 선덕여왕 통치에 대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관념공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선덕여왕의 미모와 신라 남성의 자유분방한 애정표현, 선덕의 애민의식 등을 엿볼 수 있는 지귀설화를 살펴보자. ‘삼국유사’와 조선 선조 때 권문해가 엮은 ‘대동운부군옥’에 전한다.

    “신라에 지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사모해 고민한 나머지 몸이 점점 여위어갔다. 하루는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다. 지귀는 탑 밑에서 여왕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여왕이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팔찌를 빼놓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지귀는 팔찌를 보자 자신이 잠든 사이에 여왕이 다녀갔음을 알고 사모의 정이 더욱 불타올라 마침내 화귀(火鬼)로 변해버렸다.”

    설화가 끝나는 부분에 왕이 술사(術士)에게 명해 주사(呪詞)를 짓게 했다는 대목이 있다. 주사의 내용은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네. 멀리 바다 밖에 내쫓아 가까이하지 않으리”였다. 당시 이 주사를 문에 붙여 화재를 막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선덕여왕에 대한 이 같은 미화는 당시 시대 상황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가 있다. 선덕여왕 즉위 시기는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후 신라가 불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정립해가는 과정이었다. 진평왕은 석가의 아버지인 백정(白淨), 왕비는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摩耶)의 이름을 사용했고, 덕만도 아들로 태어났다면 석가의 이름인 실달다(悉達多)를 썼을 것이다.

    사실 ‘덕만’도 열반경에 나오는 ‘덕만우바이(德曼優婆夷)’의 준말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일부러 여자로 태어난 보살의 이름이고, ‘선덕’도 선덕바라문(善德婆羅門)의 준말로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의 정점인 도리천을 주재하는 천신을 가리킨다. 이처럼 불교가 치국이념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선덕여왕은 재위 3년(634)에 분황사를 건립하고, 이듬해 영묘사를 건립해 위상을 굳혔다.

    여왕은 즉위 초기부터 최측근 세력으로 용춘(남편), 원관(여왕의 외삼촌), 을제(상대등), 염장(용춘의 동생) 등을 발탁했으며,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진휼(賑恤)하는 한편 주군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하는 민심 수습책을 시행했다. 진평왕의 3년 국상이 끝난 뒤엔 부왕이 시용한 건복(建福) 대신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당에 대해 자주정신을 견지했다.

    그러나 선덕여왕 11년(642) 이후 백제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 성을 빼앗겼고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도 고구려·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 백제 장군 윤충의 침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합천)에서 벌인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 품석과 딸 고타소 부부가 살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곳곳서 ‘현대판 도참 신앙’ 만연

    박근혜는 선덕여왕을 꿈꾸나
    국가적 위기에 직면한 선덕여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원병을 청하고 김유신을 압량주(경산) 군주에 임명해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청했다.

    이 무렵 당에서 귀국한 자장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구원을 요청하는 신라 사신에게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됐다’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당 태종이 제기한 여왕 통치의 문제점이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선덕여왕 16년(647) 정월에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진압했으나 여왕은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고 말았다. 그 후 측근인 용춘, 염장도 잇따라 죽고 몇 해 후 자장도 죽었다. 여왕은 재위기간 중 불교문화 사업에 진력을 다했고, 일통삼한(一統三韓)의 초석을 닦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요즘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이 시청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선덕여왕이 어린 틈을 타서 미실(547~621)이라는 여인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미실은 누구인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성덕왕 때 진골 출신 역사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 전하는 신라 최고의 절세가인으로 신라 왕실의 혼맥인 인통(姻統·혼인 혈통) 중 하나인 대원신통(大元神統·신라 왕실의 혼인계보)을 대표하는 색공지신(色工之臣)이다. 당시 신라는 유교적 금욕주의가 안착되기 전으로 성문화가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근친혼, 형사취수(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함)제, 자매혼 등이 성행했다.

    미실은 이사부의 아들 세종과 결혼했으나 일찍이 터득한 방중술로 동륜, 풍월주 사다함, 설화랑과 관계를 맺고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3대에 걸쳐 색공(色供)으로 신라를 자신의 치마폭에서 주무른 ‘팜므파탈’이다.

    박근혜는 선덕여왕을 꿈꾸나

    선덕여왕 영정(위)과 ‘화랑세기’ 필사본.

    드라마는 미실의 이런 위험한 이미지에 비해 선덕여왕을 모성의 여신인 데메테르 같은 평온한 이미지로 연출, 전혀 다른 페르소나를 보여줄 것이다.

    2006년 5월20일. 5·31 지방선거를 열흘 앞두고 서울 신촌사거리에서 서울시장 후보 지원 유세를 하던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당하는 불의의 사고가 벌어졌다. 박근혜 전 대표는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담담히 털어놨다.

    “수술대에 오르자 부모님 생각이 났다. 총상으로 고통스러우셨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수술하는 내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부모님도 이와 같이 암담한 심정이셨으리라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살아오면서 남들이 겪지 못한 고통을 수없이 겪었지만, 이런 육신의 고통이 또다시 찾아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제부터 남은 인생은 하늘이 내게 주신 덤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나에게 할 일이 남았기에 거둬갈 수 있었던 생명을 남겨둔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잃을 것도, 더 욕심낼 것도 없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처음 정치를 시작할 때, 이제부터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고 했던 결심, 오로지 국민과 나라만 바라보자는 그 초심만큼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한국 현대사에서 1952년 임진생으로 이렇듯 운명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는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역사’로 10년 남짓한 정치 일정 중 갖은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뜻을 초지일관하는 냉철함을 견지해왔다 하겠다. 그는 ‘국민의 희망’ ‘무관의 제왕’ ‘얼음공주’ ‘수첩공주’ ‘구원투수’ ‘아테네 여신’ 등으로 불리면서 박근혜 신드롬을 불러일으켜 국민의 두터운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런 그가 요즘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그가 ‘제2의 선덕’이 되리라는 ‘현대판 도참신앙’이 만연하고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박정희가 지어놓은 밥 다 먹었으니 이제 박근혜가 채워야 한다”라는 주문이 곳곳에서 들린다고 한다. 정녕 박근혜는 선덕여왕을 꿈꾸는가.

    대구 동화사의 말사인 부인사에 가면 선덕여왕의 영정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의 미소에 박근혜의 미소가 오버랩되면서 1400년 전에 죽은 선덕여왕이 환생한 듯 보인다. 공교롭게도 박근혜의 정치적 기반 또한 옛 신라의 영토인 대구다.

    선덕여왕과 박근혜는 여러 면에서 ‘닮은꼴’임이 확인되는데, 무엇보다도 애민의식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여왕이 즉위년에 진휼책으로 백성을 구제했듯 박근혜도 외할머니 이경령(李慶齡), 어머니 육영수(陸英修)의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베풂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덕분에 후덕한 인심을 지녔고 불우한 소외계층을 위한 복지사업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

    선덕과 박근혜는 둘 다 최고지도자의 장녀로 태어나 일찌감치 알게 모르게 대권수업을 받았으며, 독실한 종교인이라는 점도 닮은꼴이다. 또한 두 사람 다 무자(無子)로 40대 중반 이후 정계에 입문해 여성 최고지도자가 됐으며, ‘조국과 결혼했다’는 투철한 국가관을 가졌고, 통일을 지향한 것도 닮은꼴이라 하겠다.

    박근혜에겐 ‘준비’가 필요하다

    이처럼 선덕과 박근혜는 닮은꼴이나 두 사람이 엄연히 다른 점이 있다. 선덕은 권력을 가졌고 박근혜는 권력의지만을 가졌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박근혜 신드롬을 분명한 현상으로 바꾸고, 권력의지를 권력으로 승화시키려면 더 이상 화병 속의 꽃이 아닌 수풀의 초목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와 같은 여성 지도자를 귀감으로 삼아 경쟁력을 키우고 정의롭고 지혜로운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지금 박근혜가 속한 한나라당은 지난 4·29 보선 참패 후 당 쇄신위원회의 지도부 사퇴론, 조기 전당대회 개최 등을 놓고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과거 박근혜가 ‘한나라호(號)’의 선장으로 키를 잡았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양상이다. 더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정국은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고, 북한은 연일 핵위협으로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있다. 진정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주려면 바로 이럴 때 자신의 잠재력을 폭발시켜야 하지 않을까.

    짧은 줄의 두레박이 깊은 우물에 미치지 못하듯(短汲深), 박근혜도 준비를 하지 않고는 집권의지를 실현할 수가 없다. 지도자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강조된 동양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A(Ability), B(Body), C(Control), D(Diligence), E(Education) 등이 됨직하니, 박근혜가 선덕여왕을 꿈꾼다면 수기치인(修己治人)하고 인문학적 교양을 겸비해 르네상스적인 인간성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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