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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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깨나 술愛 빠진 두 남자

브랜드 매니저들, 주당 사로잡기 24시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9-05-29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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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나깨나 술愛 빠진 두 남자

    롯데주류 조판기 차장(왼쪽)과 페르노리카코리아 김상훈 차장이 자사 주류 샘플을 시음해보고 있다.

    “그래, 이 맛이야. 이거야. 음… 좋다. 어, 안 돼. 다가오지 마!”

    스윽~ 헉! 꿈이었다. 회사가 개발한 소주를 시음하다 정말 환상적인 맛을 느꼈다. 그러다 술이 엄청난 파도로 변해 몸을 휘감았다. 길몽 같기도 하고 살짝 가위에 눌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 상황이 아니라서 아쉬움도, 불길한 느낌도 없다. 매일 꾸는 꿈이기 때문이다. 꿈을 꾸면서도 꿈이라고 의식할 정도다. 좋은 맛을 느낀 꿈이 현실로 재현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오히려 기분이 좋다. 싱글벙글. 출근길 발걸음이 가볍다.

    롯데주류BG 마케팅팀 조판기 차장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됐다. 조 차장은 매일 술꿈을 꾼다. 요즘엔 소주 ‘처음처럼’이 단골손님. 첫사랑마저 뒷전이다. 꿈에 첫사랑이 마지막으로 등장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는 소주를 사랑한다. 소주에서 희망을 얻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조 차장은 회사 주류제품의 광고·홍보, 시장 조사, 제품 개발을 담당하는 브랜드 매니저다. 정말 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무실 책상 위엔 술병들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마치 난을 관리하듯, 술병에 묻은 먼지를 정성스럽게 닦아낸 뒤 본격적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대작’의 추억 … 입에 술 마를 날 없다!



    1991년 두산그룹 공채로 입사한 조 차장은 사내 기술원과 마케팅 부서를 두루 거쳤다. 회사에서 작정하고 브랜드 매니저로 육성한 케이스다.
    출근한 뒤 무슨 일을 먼저 할까.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대작’인 ‘처음처럼’을 떠올린다. 2년간의 연구 및 개발 끝에 2006년 출시한 ‘처음처럼’. 그 한 방울 한 방울은 술이 아니라 그의 땀이다.

    “소주는 79%가 물, 20%가 알코올, 나머지 1%가 당과 아미노산 등의 첨가물로 이뤄집니다. ‘처음처럼’ 개발에 착수하기 직전 다른 회사들이 ‘나머지 1%’에 무엇을 쓸지 골몰해 있을 때 우리는 물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죠. 당시 소비자들이 프리미엄 생수, 녹차 등 건강음료를 선호하는 추세여서 시기도 잘 맞았기 때문에 물에 관한 스터디를 집중적으로 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알칼리 환원수라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이게 제대로 히트한 겁니다.”

    기존 소주시장의 패러다임과 소비자 트렌드 연구의 고정관념을 깬 당시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그는 업무 시작 전 황홀했던 추억부터 되살려본다. 그리고 흐뭇한 회상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숨 가쁜 일과가 이어진다. 먼저 각 지역 영업지점이 보고하는 일간 및 주간 리포트부터 살펴본다. 자사의 주류 매출, 판매 액수부터 소비자 트렌드 동향, 행사 소비자 반응, 라이벌 주류 업체 홍보, 판매 상황 등의 정보가 망라돼 있다.

    ‘홍대입구 피카소 거리 좌측 지역은 최근 업소들이 문을 빨리 닫는 반면, 우측 지역에는 24시간 영업 주점이 계속 생겨남.’

    강북지점에서 보낸 주간 리포트 내용이 조 차장의 눈에 띈다. 곧바로 달력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에 빨간색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현장을 방문할 날짜다. 홍보대행사가 정리해 보내준 업계 뉴스와 해외 주류업체 사이트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 지금껏 출시된 제품을 모아놓은 방을 둘러본다. 옛 제품을 다시 살펴보고 외부에서 만난 소비자들의 반응을 떠올리면서 새로운 포장이나 판촉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짜내는 시간이다. 여기서 ‘처음처럼’ 미니어처와 소주 온도를 시원하게 유지하는 ‘쿨팩’ 등 기발한 판촉물이 나왔다.

    포장 라벨 글씨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도 고민 중이다. 조 차장이 매일같이 고심한 끝에 얻은 아이디어는 100여 개. 그중 소비자 트렌드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TFT를 구성해 시장 검증 테스트에 들어간다.

    브랜드 매니저 업무의 꽃이자 하루 일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술 테스트다. 소비자들은 소주의 도수나 맛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회사로선 소비자 입맛 트렌드의 작은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현장에서 각계각층 소비자들의 취향을 분석한 뒤 자사 연구소 측에 도수와 맛에 조금씩 변화를 준 샘플을 요청해 가장 먼저 시음해본다.

    샘플 정보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번호만 적힌 샘플의 맛을 본 뒤 보고서를 쓴다. 미각이 가장 예민하다는 오전 10시와 오후 3시에 테스트를 하는데, 정확한 느낌을 분석하기 위해 한 자리에서 샘플 3종류까지만 시음한다. 테스트해야 할 샘플은 무려 140여 개. 조 차장은 “‘처음처럼’을 개발할 무렵엔 집에서 하루 24개까지 테스트해봤다. 아내가 옆에 붙어 앉아서 그때그때 안주를 대령했다”며 웃었다.

    테스트는 밤까지, 사무실 밖에서도 이어진다. 특히 최근엔 삼겹살 등 소주에 잘 어울리는 안주와 어떤 술맛이 가장 맞는지를 분석하고 소비자들의 반응을 듣기 위해 연일 회사 배지를 뗀 채 주점을 드나든다. 경쟁사의 제품도 맛본다. 매달 경쟁사의 제품과 자사 제품을 번갈아 시음하고, 3개월에 한 번씩 경쟁사 제품의 맛 변화를 세밀하게 살핀다. 이게 다가 아니다.

    “커뮤니케이션 툴(tool)도 만들어야 하고, 광고 스터디도 해야 하고, 새로운 패키지 판촉물의 론칭 계획도 짜야 하고, 일본 술 잡지를 뒤적거리며 디자인 분석도 해야 하고…, 휴.”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됐지만 꿈에서 ‘처음처럼’과 이효리를 만날 생각에 다시 시동을 건다.

    네트워크 관리에 올인 … ‘가짜 양주와의 전쟁’

    양주업계 판매 1위 제품인 ‘임페리얼’ ‘발렌타인’ 등을 생산 및 판매하는 페르노리카코리아 마케팅팀 김상훈 차장은 브랜드 매니저로서 고객을 철저히 살피는 업무로 하루 일정을 짠다. 양주는 상대적으로 고가의 술이라 소비자 사이에서 비용 대비 만족과 불만족이 극명히 엇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보다 현장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주류 도매상, 나이트클럽, 단란주점 등 양주를 취급하는 곳을 쉴 새 없이 찾는다. 굳이 사무실에 나가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영업사원 출신이라 주류업계 곳곳에 인맥이 깔려 있어 전화 몇 통만 돌리면 업계 현황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다.

    김 차장의 브랜드 관리 철학 역시 ‘고객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업소를 돌아다니며 판매 동향보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집중적으로 듣고, 여기에 포커스를 맞춰 새로운 마케팅 전략을 짠다. 술을 많이 마시는 헤비유저들은 따로 일주일에 몇 번씩 접촉해 소비자 보호와 관련된 심도 있는 요구사항을 듣는다. 업계 최초로 개발한 ‘임페리얼’의 위조방지캡은 소비자 보호 철학을 실천에 옮긴 사례.

    “어느 술집에 가봐도 고객들은 ‘위조 안 되는 양주가 어디 있냐’며 한목소리를 냈어요. 또 업소에서 양주를 따줄 때 ‘남이 먹다 남은 것을 섞어서 내놓는지 어떻게 믿냐’라고도 하죠. 이 말을 듣고 곧바로 양주병 캡을 납품하는 회사와 개발에 들어갔어요. 가짜 양주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고객의 말이 아이디어가 된 거죠.”

    이후 수년에 걸쳐 위조방지캡이 업그레이드됐고, 최근엔 세계 최초로 3중 위조방지캡이 달린 ‘임페리얼’을 출시했다. 과거 양주 영업을 하면서 업소 주인에게 소금 세례를 받고 쫓겨난 경험도 있다는 김 차장. 그때 의미심장한 교훈을 얻었던 걸까. 브랜드 매니저로서 그의 목표는 ‘소비자들의 소금이 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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