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7

2009.05.26

58년 전 약속 지킨 老해병 “전우야, 잘 자라”

6·25 참전 탁학명 씨 증언, 가매장 전우 4인 발굴 … 본인도 복부 관통 상이용사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유두진 프리랜서 기자 tttfocus@naver.com

    입력2009-05-20 1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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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년 전 약속 지킨 老해병 “전우야, 잘 자라”

    유해 발굴에 참가한 해병대 장병들이 발굴한 유해를 위해 노제를 지내고 있다.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겠어요. 짐승도 안 찾는 외딴 산속에 묻혀서. 그나마 다행이지요. 이제라도 좋은 곳으로 보낼 수 있게 됐으니….”

    6·25전쟁 참전용사 탁학명(78·해병대 3기, 경북 포항시 송도동) 씨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억누르려는 듯 부르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전우들이 묻힌 먼 산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망막에는 58년 전인 1951년 1월 어느 날 팔각산의 모습이 맺혀 있었다. 경북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에 있는 팔각산 일대에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던 그는 달려드는 적들을 조준하며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픽픽 쓰러져가는 전우들과 멀리서 달려오는 적들만 보였다. 어느새 탁씨의 전투복은 전우들의 선혈로 물들었다.

    매장 후 소나무 깎아 표시목 꽂아둬

    중과부적. 해병 1연대 1대대 6중대 소속 이등수병(현재의 일병)으로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치던 탁씨와 부대원들에게 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사한 전우들은 팔각산 골짜기 곳곳에 참혹하게 버려져 있었고, 이를 발견한 탁씨와 동료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그들을 묻었다. ‘언젠가 꼭 찾으러 오겠다’고 맹세하며. 시신을 묻은 장소 옆에 소나무를 깎아 만든 표시목을 꽂아둔 것도 맹세의 징표였다.



    58년 전 약속 지킨 老해병 “전우야, 잘 자라”

    6·25전쟁 당시 팔각산 전투에 대해 말하는 탁학명 씨.

    “수십 년을 잊고 지냈지요. 그런데 지난 3월 TV를 보는데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뉴스가 나오더군요. 곧장 인근 해병대 사단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팔각산 교전 때 내 손으로 묻은 전우들의 장소를 알고 있다고.”

    국방부는 2000년부터 6·25전쟁 전사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을 벌여왔다. 그간 육군 전사자나 학도병 전사자의 유해는 상당수 발굴됐다. 하지만 해병은 전쟁 전반에 걸쳐 맹활약을 펼쳤고 그 때문에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했지만 유해 발굴에는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3월 중순경 탁씨가 5명의 해병대원이 묻힌 장소를 안다고 제보하면서 유해 발굴이 시작됐다.

    해병대는 위치 확인에 나섰고, 탁씨의 증언과 인근 주민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유해 4구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나머지 1구는 이미 수습된 뒤였다. 인적 없는 산속에 외로이 누워 있던 노(老)해병들이 58년 만에 가족 품으로, 혹은 국립묘지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매장을 도운 전우들은 이미 죽었거나 기억을 하지 못하더군요. 전투 상황을 잘 아는 마을 주민들은 말을 안 하고…. 당시 후퇴하지 않고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행여 북한군을 도왔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다행히 국군 출신 주민 한 명이 전해들은 얘기와 내 기억을 따라간 끝에 발굴했지요.”

    포항시 구룡포가 고향인 탁씨는 전쟁 초기인 1950년 8월5일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군 면제도 가능한 처지였지만, 전쟁터로 끌려가는 동네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과 쓰러져가는 조국에 대한 의무감을 저버릴 수 없었다. 4주간의 기초훈련만 받고 곧바로 전장에 투입된 그는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며 그들과의 현격한 기량 차이를 실감했다.

    “우리야 겨우 4주 훈련받고 M1 소총이나 쏠 수 있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북한군은 달랐어요. 전쟁 일으키기 2∼3년 전부터 집중적으로 훈련받은 애들이어서 실력이 아주 뛰어났지요.”

    군사력 차이도 현저한 데다 갑작스런 남침으로 기선을 제압당한 국군은 남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벼랑 끝까지 밀리던 국군이 반격의 기회를 잡은 것은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 작전 성공으로 적의 허를 찌른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에 있던 북한군을 하루아침에 ‘고립 군인’으로 만들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탁씨도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작전 총지휘관인 맥아더 장군을 직접 본 생생한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한껏 사기가 오른 때였습니다. 대원들과 함께 김포비행장에 있었는데 키가 크고 당당한 체구의 미국 사람이 비행기에서 내리더군요. 그분이 맥아더 장군이었어요. 사병들을 격려해주기 위해 왔는데 ‘고생이 많다, 열심히 해라’고 했지요. 통역을 통해 들었지만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었어요.”

    기억이 살아나는 듯 탁씨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러면서 일부 좌파세력이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철없는 행동’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피 흘린 세대 소외, 그게 서운해”

    인천상륙작전 이후 국군은 북으로 진격했다. 탁씨 또한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겠다는 일념으로 북진 대열에 동참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투입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다시 남으로 후퇴했고, 탁씨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팔각산 일대에 고립된 북한군 색출을 위한 작전에 투입됐다.

    “팔각산 인근에서 시도 때도 없이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동료가 죽었지요. 어느 날 수색작업을 벌이는데 사망한 해병대원들이 산속에 널브러져 있더군요. 그런데 인민군들은 전술상 적군 사망자의 유품을 남겨놓지 않아 전사한 동료들은 완전 알몸상태였어요. 차마 그냥 두고 갈 수가 없더군요. 함께 있던 대원 중 일부는 망을 보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대원들은 땅을 파서 시신을 묻어줬지요. 어찌나 떨리던지.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팔각산에서의 피 말리는 교전 이후 탁씨는 강원도 영월로 이동했다. 이후 휴전 때까지 강원도 지역에 머물며 북한군과 맞섰다. 1953년 7월27일 휴전 이후에도 계속 해병에 남아 근무하다 60년 12월 중사로 전역했다. 제대 이후엔 기계임대업, 장사 등을 하며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시켰다. 그러나 자식들을 출가시킨 후 서로 의지하며 살아오던 부인이 10년 전 세상을 떴고, 지금은 포항 송도동 자택에서 홀로 살고 있다.

    탁씨는 계속 해병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전쟁부상 후유증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날이 늘어나자 결국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1952년 6월 치러진 강원도 오솔산 전투에서 북한군에게 안면을 강타당해 이마가 깨지고 코뼈가 주저앉는 부상을 입었기 때문. 52년 9월 강원도 양구 김일성고지 쟁탈 전투에서는 복부 관통상을 입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 후유증으로 탁씨는 7급 상해유공자가 됐다. 그는 아직도 이마의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며, 코뼈 손상으로 냄새를 거의 맡지 못한다.

    탁씨는 7급 유공자에게 지급되는 월 41만원의 생활보조금으로 빠듯하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마와 코뼈 부상도 인정받는다면 상해등급이 높아져 보조금도 늘겠지만, 당장은 방법이 없다. 이마와 코뼈 부상이 워낙 위중해 급하게 치료를 받느라 한미 해병대 야전병원에 진료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 그러나 그의 아픔은 따로 있었다.

    “조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우리 세대들이 자꾸 소외되고 있어요. 우리가 피 흘려 한 발 한 발 넓힌 국토가 오늘의 대한민국이지요. 그런데 이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한편 해병대는 3월9일부터 4월24일까지 경북 영덕·청송·포항지역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여 유해 79구, 유품 827점을 발굴했다. 5월6일부터는 경기 김포·강화지역에서 2차 발굴을 벌이고 있다. 해병대 사령부는 유해 발굴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5월11일 탁씨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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