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0

2017.03.22

르포 |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 1박 2일

“태극기 아래서 답답한 마음 나눌 뿐”

“다 죽여야 돼”부터 “슬프지만 승복한다”까지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입력2017-03-17 17: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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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재판소고 국회고 할 것 없이 (박근혜) 대통령님 탄핵인용에 관여한 놈들을 절대 살려둬선 안 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매국노보다 더 나쁜 놈들이다.”

    3월 13일 저녁 서울광장 태극기 천막촌에서 만난 박모(76) 씨의 말이다. 이처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던 ‘태극기집회’는 최근 그 규모보다 과격한 언사와 폭력적인 행동으로 더 주목받고 있다. 일부 태극기집회 참가자가 태극기를 들지 않은 채 현장에 왔다는 이유로 행인을 폭행하거나 취재기자, 경찰관을 집단 구타하는 등 돌발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 또 박 전 대통령이 파면된 10일에는 반대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2명이 숨지고 일부가 다치는 사고도 있었다(최종 사망자는 3명).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의 사저와 태극기 천막촌에서 만난 집회 참가자들은 박 전 대통령 지지자가 모두 과격한 행동을 일삼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사람들도 탄핵인용 이후 정치 문제와 관련해서는 각자 생각이 다르듯, 태극기집회 참가자들도 탄핵인용에 대한 안타까움 외에는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3월 13일 오후 7시 무렵 서울광장 앞 태극기 천막촌은 고요했다. 이른 저녁인데도 본부와 식당으로 쓰는 대형천막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천막 밖에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은 천막촌 한편에 설치된 ‘애국분향소’뿐이었다. 빨간 베레모에 군복을 입은 농성시위 참가자들이 경광봉을 들고 분향소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애국분향소는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탄핵반대를 외치고 투신한 조모(65) 씨와 10일 집회에서 사고로 숨진 김모(72) 씨 등 2명을 추모하려고 세운 것이다.

    시간별로 2~3명이 돌아가며 애국분향소를 지켰다. 이들은 복장도, 하는 일도 같았지만 탄핵인용 후 정국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태극기 천막촌에서 만난 정모(74) 씨는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라 안보가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대통령의 업 적보다 대통령이 가진 사상이 중요하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작은 잘못을 꼬투리 잡아 현재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민주우파 지도자인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다. 좌파의 촛불민심에 휘둘려 역사에 오점을 남긴 헌법재판소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위에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늦은 밤 만난 이모(70) 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씨는 “대통령 탄핵은 이미 결과가 나온 일이다. 박 전 대통령 지지자로서 마음은 아프지만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지금 천막촌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막상 대화를 나눠보니 대다수가 이미 인용된 탄핵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지도자를 잃은 슬픈 마음을 서로 위로하고자 모여 있는 것이다. 물론 분한 마음에 과격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일부 있는데, 우리도 그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태극기집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모두 그런 언사와 행동을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태극기 천막촌 강제퇴거 조치 검토와 관련해서는 한목소리로 반대의견을 냈다. 철거하려면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월호 천막부터 걷어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정씨는 “세월호 천막은 좌파세력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안다. 우리가 농성까지 하면서 서울광장에 남아 있는 이유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에 반대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저 좌파세력의 천막을 걷어내려는 의도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애국분향소에서 추모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국가를 바로잡으려다 목숨을 잃은 분들이다. 그런데 서울시가 사고 피해자인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천막은 몇 년째 묵인하면서 숭고한 뜻을 품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분향소는 한 달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분개했다.

    박 전 대통령이 3월 12일 청와대를 빠져나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로 들어간 이후 태극기집회의 중심지는 시청 앞이 아닌 사저 앞이 됐다. 13, 14일 저녁 서울광장에는 태극기를 든 집회 참가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삼성동 사저 앞은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시위대와 경찰로 붐볐다. 사저 입구를 빠져나오면 우측 인도에는 시위대가 모여 있었고, 좌측 인도는 취재진과 구경하러 나온 동네 주민이 주를 이뤘다. 한 집회 참가자는 “우리는 우파니까 오른쪽에 서야 해”라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3월 14일 늦은 저녁 사저 앞 시위대는 예상했던 바와 달리 조용했다. 낮에 크게 외치던 ‘탄핵 무효’ 같은 구호도 들리지 않았다. 포스트잇에 박 전 대통령을 위한 응원 메시지를 써서 사저 앞 도로 벽에 붙이거나 준비한 손팻말을 들고 서 있을 뿐이었다. 간혹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대통령 탄핵 이후 북한이 벌써 문재인과 접촉을 시도 중이다” “사회 지도층이 종북세력으로 채워지고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입에 올리긴 했지만 그들마저도 금세 흩어졌다.

    이날 태극기를 들고 사저 앞을 지킨 송재열(64) 씨는 “대통령 탄핵은 시작부터 절차, 인용까지 모두 잘못됐다. 따라서 훗날 반드시 법적 정당성을 재평가받아야 한다. 이 사건이 이대로 묻혀 재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막으려고 이 자리에 나왔다. 그러나 탄핵에 반대하는 것이 아무리 정당하다 해도 늦은 밤까지 구호를 외쳐 인근 주민들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3월 12일부터 매일 사저 앞을 찾는다는 최모(61·여) 씨는 “좌파 언론에 선동된 국민을 다시 계몽하려면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그래서 집회에 참여하더라도 최대한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저녁 10시가 넘어 밤이 깊어지자 시위대 수는 빠르게 줄었다. 사저 앞에서 태극기를 든 사람은 한눈에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40, 50대로 보이는 참가자들의 설득 때문이었다. 이들은 시위대에게 “건강해야 내일도 모레도 집회에 나올 수 있다”며 나이가 많은 참가자들을 설득해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일부가 “네가 뭔데 나에게 집에 가라 마라 하느냐”며 고성을 지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조용히 태극기를 말아 들고 귀가했다. 사저 인근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홍모(41) 씨는 “낮에는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차도에 눕는 등 난동을 피우지만 저녁이 되면 추워서인지 대거 귀가한다. 남은 사람들도 큰소리를 내지 않고 사저 앞을 지키기만 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어르신들이 떠난 뒤에는 ‘비교적 젊은 태극기’가 빈자리를 채웠다. 퇴근길에 태극기를 들고 사저 앞을 찾은 윤모(55) 씨는 “국민에게 보이는 모습은 취재차를 막으려 도로에 눕고 경찰에게 욕을 일삼는 과격한 행동들이지만, 실제 나와 보면 대부분 적법 절차에 따라 조용히 집회에 참가하는 분들이다. 이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탄핵인용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빨리 보수의 새 구심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내 젊음 부정당하는 기분”

    밤이 깊어지면서 기온도 떨어졌지만 저녁 11시가 훌쩍 넘을 때까지 몇몇 참가자는 자리를 지켰다. 오전 11시부터 사저 앞을 지켰다는 황모(76) 씨는 “우리 세대는 반공을 위해 젊음을 바친 세대다. 어릴 때는 6·25전쟁에서 북한과 맞서 싸웠고, 젊을 때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섰다. 그런데 최근 전쟁 한 번 겪어보지 못한 젊은 친구들이 나라 귀한 줄 모르고 종북세력의 감언이설에 휘말려 촛불집회가 일어났다. 이를 틈타 종북 좌파들이 흉계를 꾸며 평생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박 대통령님을 쫓아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내 젊은 날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집회에 참가한 고령층의 이와 같은 인식에 대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젊은 층에서는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범죄를 저지른 세력에 대한 법적 단죄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일부 고령층은 박 전 대통령에게 과거 근대화에 참여했던 본인의 기억과 감정을 이입했다. 따라서 그들은 이번 탄핵을 단순히 대통령 파면이 아니라 자신들을 향한 젊은 세대의 공격이자 부정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한편 박재흥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는 “탄핵인용을 찬성하는 집회와 반대하는 집회 참가자의 세대가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고령층은 탄핵에 반대하고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라고 예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 교수 역시 “민주적 절차와 법적 규범에 따라 점차적으로 세대갈등을 해소해야 하지만, 세대 간 협력 의지도 중요하다. 지금 소외된 노인들도 차츰 포용하고 존중해 이들이 사회적 문제 해결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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