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1

2009.01.27

시청률? ‘막장 지수’에 물어봐!

‘명품 막장 드라마’의 여섯 가지 법칙 … 비법은 ‘독한 설정’

  • 최지은 10아시아 기자

    입력2009-01-29 12: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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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률? ‘막장 지수’에 물어봐!
    요즘 가장 잘나가는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다. 언제부턴가 멜로드라마나 의학드라마처럼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막장 드라마’는 스토리와 캐릭터에 개연성이 없고 억지스러운 드라마를 총칭하는 말이다.

    과거에 어머니를 버리고 재혼한 아버지와 그 가족에게 복수하는 딸(MBC ‘인어 아가씨’), 친딸을 양아들과 결혼시켜 며느리로 삼으려는 모정(SBS ‘하늘이시여’) 등 무리한 설정으로 비판받았던 임성한 작가가 ‘막장 드라마’의 대표 주자였다면, 최근 몇 년간 앞다퉈 독한 설정을 내놓으며 시청률 경쟁에 뛰어든 아침드라마와 일일드라마는 소리 없이, 그리고 도도하게 ‘막장’으로 흐르고 있다.

    MBC ‘그래도 좋아’와 SBS ‘그 여자가 무서워’가 한 획을 그었고, SBS ‘조강지처 클럽’ 등 주말 드라마에서도 각광받은 이 장르에서 외도나 불륜은 초보적이고 심심한 소재일 뿐이며 낙태, 교통사고, 살인미수와 각종 음모를 얼마나 맵고 짜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흥행이 좌우된다. 최근 종영한 KBS ‘너는 내 운명’ 역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연장됐지만 드라마 종반, 주인공 새벽(윤아)의 시어머니와 생모가 동시에 백혈병에 걸리는 황당한 우연을 등장시켜 ‘막장 가족드라마’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요즘 ‘막장’을 넘어 ‘명품 막장 드라마’라는 칭송 아닌 칭송을 받으며 시청률 30%를 넘겨 승승장구하는 SBS ‘아내의 유혹’에는 이 모든 요소가 골고루 담겨 있다. 남편 교빈(변우민)과 친구 애리(김서형)의 불륜으로 모든 것을 잃고 목숨까지 잃을 뻔한 은재(장서희)는 자신을 구해준 건우(이재황)의 죽은 여동생 소희(채영인)로 변신한다. 은재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하고 팜므 파탈로 변신, 교빈과 애리의 눈앞에 나타나 그들을 파멸로 몰아가기 시작한다. 이렇듯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세계, 몰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법칙이 존재한다.

    [첫째] 가족은 원수다.



    “남이 안 보면 내다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고 말한 사람은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지만 ‘막장 드라마’에서는 그 이상이다. 엄마가 딸을 버리고, 딸이 생모의 존재를 모른 채 증오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배다른 자매가 한 남성을 좋아하면 자살 자작극이 벌어지거나, 언니가 동생을 납치 감금하는 강력 사건으로도 이어진다. 여기에 동생은 형부와 딴살림을 차리는 것으로 대응한다. 경제력 없이 무능하거나 금전 사고를 저지르는 가족 정도는 이에 비하면 고맙다. 물론 가족뿐 아니라 친구도 원수다. 특히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지낸 친구는 남편을 빼앗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라이벌이니 경계해야 한다.

    [둘째] 서류와 절차 따위는 무의미하다.

    자살로 위장해 죽은 사람으로 처리된 주인공이 가명으로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는 데는 어떤 어려움도 없다. 주민등록등본, 건강검진 내역 등 입사 시 필요한 자질구레한 서류를 챙기느라 부산을 떨었던 일반인으로서는 부러울 따름이다. 외부인이 비서실을 통하지 않고 기업 회장실에 직통으로 전화를 걸 수 있으며, 동사무소 직원이 아니면 알기 힘든 신상 정보도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듯 간단히 얻어낸다.

    [셋째] 현대과학은 기적을 이룬다.

    ‘막장 드라마’의 세계에서는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눈 밑에 점을 찍는 것만으로도 전남편조차 알아보지 못할 완벽한 변신을 꾀할 수 있다. 특히 의학의 발전이 눈부시다. 교통사고로 얼굴을 포함해 온몸에 화상을 입었어도 미국에서 수술만 받고 돌아오면 자신을 차버리고 부잣집 딸과 결혼한 옛 애인의 장인을 유혹할 정도의 미모를 얻을 수 있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남편을 피해 숯불 위로 뛰어내렸다가 입은 다리의 화상 자국도 ‘그냥 이것저것 섞어 만든’ 파운데이션으로 완벽하게 감추고 수영장까지 다닐 수 있으니 전 세계 화상 환자들에게 이 이상 희망적인 소식이 있을까.

    [넷째] 서울은 만원이다.

    인구 1000만이 넘는 이 도시가 너무 좁아서일까. 주인공들은 서로를 피할수록 자주 마주친다. 수영장에 가도, 골프 연습장에 가도, 레스토랑에 가도 원수지간이거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대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약속하고 만나도 그렇게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이는 서울에 상류층을 위한 수영장과 레스토랑이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현실의 반영일 수도 있다. 요즘 서울에서 영업 중인 뷰티숍은 ‘민 뷰티숍’과 ‘밸라 뷰티숍’ 둘뿐이냐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다.

    [다섯째]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악인은 완전범죄를 꿈꾸지만 모든 범죄와 음모의 현장에는 목격자가 있다. 남의 일에 끼어들기 싫어하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제보 본능이 투철한 이들은 친구를 위해 증언하려다 폭행을 당해 폐인이 되기도 하고, 남편이 아내를 죽이려 하는 현장까지 따라가 폰카로 촬영해 증거를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증거를 쥔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그것이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지 않고 주위를 빙빙 도는 탓에 일을 복잡하게 만들며, 결국 가해자가 또 다른 음모를 꾸미는 계기가 된다.

    [여섯째]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남편의 배신으로 이혼당한 여성은 대부분 살림에서 얻은 노하우와 타고난 재능을 살려 사업에 성공하고, 특히 ‘복수’라는 동기가 부여돼 있는 주인공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사나흘만 독학하면 중국어와 일본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고, 물 공포증 환자가 수영선수로 탈바꿈하며, 몸치에서 매혹의 탱고 댄서로 변신하는 데도 한 달이 채 걸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조만간 서점에 ‘중국어, 일주일만 하면 구은재만큼 한다’나 ‘진정한 복수를 위한 자기경영 노트’ 같은 자기계발서가 등장할 날이 오지 않을까.

    이상의 조건들을 하나씩 충족시킬 때마다 드라마의 ‘막장 지수’가 올라간다. 그리고 아마 시청률도 높아질 것이다. 혹시 드라마 작가를 꿈꾸는 독자가 있다면 ‘참고’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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