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62

2008.11.25

‘역경 극복’ 만화 같은, 만화가들의 삶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8-11-20 19: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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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 극복’ 만화 같은, 만화가들의 삶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 장상용 지음/ 크림슨 펴냄/ 484쪽/ 1만9000원

    한국 만화는 잘나가는가? 그렇다. 지금 현상만 보면 정말 잘나간다고 할 수 있다. 문학성이 뛰어난 소설이나 로맨스 판타지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드라마 원작은 언젠가부터 ‘궁’ ‘다모’ ‘풀하우스’ ‘식객’ ‘타짜’ 등 인기만화로 대체됐다. 강풀 강도하 양영순 등이 인터넷에 연재하는 온라인 만화는 장대한 서사적 이야기 구조와 핵심 테마로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휴대전화로 책을 내려받는 전자책 시장에서도 만화는 가장 잘 팔리는 장르다. 어디 그뿐인가. 만화는 글로벌 호환성이 가장 높다. 잘 만들어놓으면 전 세계인의 관심을 이끌어내기가 쉽다. 또 게임, 애니메이션, 영화, 캐릭터 산업으로 퍼져나가면서 경제적 수익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땅의 만화는 현재 수준으로 성장하기까지 수많은 질곡을 거쳤다. 황미나 김수정 고우영 김동화 박인권 방학기 김용환 고행석 신문수 김성환 양영순 지현곤 김성모 이현세 박봉성 허영만 하승남 박기정 신일숙 등 한국을 대표하는 19명의 만화가가 어떻게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했는지, 그 감동적인 인생을 정리한 ‘나는 펜이고 펜이 곧 나다’는 우리 만화가 걸어온 고난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절절하게 들려준다.

    만화방에 간 것이 들통나면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을 정도로 만화를 천대하던 시절 만화에 입문한 이들을 키운 것은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과 그로 인한 가난이었다. 삶의 밑바닥에서 체험한 끔찍한 고통은 만화가들의 삶에 채찍질을 가했으며, 그것은 늘 새로운 상상력을 낳았다. 매년 어린이날이면 공무원들이 만화책을 잔뜩 쌓아놓고 불태우는 이벤트를 벌였지만, 이런 박해는 만화가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더욱 부추겼다.

    ‘다모 남순이’ ‘바람의 파이터’ 등을 그린 방학기가 대표적이다. 그는 어린 시절 일본인 주둔지였던 마산에서 겪은 체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베트남전 등 고난의 시기를 관통한 덕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스타일을 확립할 수 있었다. 1950, 60년대 마산의 지리적 특성에서 우러나온 밑바닥 경험을 만화 속에 고스란히 되살려냈기에 2000년대 들어 그의 전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 판권 획득 경쟁의 주 타깃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인이 다니던 마산 제일고보의 후신인 마산고는 양서(良書)뿐 아니라 장안의 화제가 된 최신 소설까지 모조리 갖춘, 어지간한 대학 도서관보다 많은 장서량을 자랑했다. 방학기는 그런 도서관에서 장서를 독파했다. 이런 단단한 지식의 밑그림이 그를 최고의 만화가로 키워낸 것이다.

    1960년대 독점 만화 출판사의 횡포와 70년대 과도한 검열, 그리고 문하생들의 인기작 흉내내기와 대필 등 내부 경쟁마저 이겨낸 만화가들은 1980년 초부터 90년 말까지 잠시 ‘만화계의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하지만 1990년대 초 만화시장이 개방되면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와 도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을 앞세운 일본 만화의 공격으로 한국 만화는 초토화된다. 그리고 이런 암흑 같은 세상은 1990년대 말 데라사와 다이스케의 ‘미스터 초밥왕’과 하나사키 아키라의 ‘맛의 달인’ 등 음식만화의 열풍 때까지 계속된다. 처음에는 일본 만화가 단지 재미 면에서 낫다고 생각하던 독자들은 결국 한국 만화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 결과 일본 만화 점유율이 80%에 이르렀다.

    이런 질곡의 순간을 이겨내고 한국 만화가 다시 인기를 회복한 원인은 무엇일까? 한국 스타일의 음식만화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식객’을 창조해낸 허영만의 탁월한 장인정신 같은 불굴의 투혼이 그 해답이다. 그는 견지낚시 장면을 그리기 위해 900여 장의 사진을 찍어 450장을 현상했다. 이 가운데 실제 작품에 사용한 사진은 30장에 그쳤지만, 적절한 소재 발굴과 실감 있는 장면 연출에 쏟은 그의 열정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박인권은 1000권의 독서로 ‘방황 10년, 성공 10년’의 주인공이 됐다. 다른 작가들이 전성기를 누리던 80년대, 그는 무인도에서 문하생들과 합숙까지 하며 심기일전했지만 산들바람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은 살인적인 독서였다. 모든 장르의 책을 1000권 이상 독파하자 스토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지금 세계 경제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우리 모두는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묘안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각자 나름의 묘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어차피 인생이란 항상 외줄타기인 동시에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고통스런 순간의 연속이 아닌가. 개인에게는 자신이 경험하는 매 순간이 소중한 역사다. 그리고 그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이 바로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게 마련이다. 물론 그 운명을 주도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고난을 이겨낸 만화가들의 인생 이야기는 그 명백한 사실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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