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3

2008.09.16

2008 대한민국 친척 보고서 핏줄의 재발견

남다른 경쟁상대인가, 꼭 필요한 우군인가 아니면 의례적 명절 멤버?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08-09-08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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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 대한민국 친척 보고서 핏줄의 재발견

    지난해 9월 추석을 앞두고 송편을 빚고 있는 경북 고령군 쌍림면 개실마을 주민들.

    서울 강남구의 성형외과 의사 A씨는 지난 8월 20대 초반 여성에게서 ‘특이한 수술 의뢰’를 받았다. 또래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다짜고짜 자신의 수술 성공 여부를 말해달라고 했던 것. 사진 속 여성보다 더 예쁘게 코 성형을 해달라는 주문과 함께 말이다.

    “수술 전후 옆모습과 앞모습 사진을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했더라고요. 코의 돌출 각도(이마와 코의 각도)와 코 길이는 물론, 성형에 쓰인 재료가 자가 연골조직인지 고어텍스인지 알려달라는 거예요. 황당했죠.”

    상담 결과 사진 속 여성은 의뢰인보다 한 살 많은 사촌 언니였다. 사촌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해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는데, 지난 설에 코 성형을 하고 나타나 친척들에게 예뻐졌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결국 A씨는 ‘추석 데뷔전’을 위해 코 성형을 했다고 한다.

    평소 멀리 떨어져 지내다 명절 연휴 때나 모이는 친척. 현대인에게 친척은 어떤 의미일까. 코 성형 ‘따라쟁이’를 만드는 경쟁 상대일까, SOS 요청 1순위인 피붙이일까, 아니면 집안 대소사를 함께하는 의례적 관계일까. 현대인의 친척관을 들여다봤다.

    # 재산에 울고 웃고



    중소 전자업체를 운영하는 김모(68) 씨는 최근 10여 년간 사업이 성공하면서 친척들이 자주 모이게 된 사례다. 4남3녀 중 둘째인 김씨는 번 돈의 5%를 ‘친척 인재개발비’로 사용했다. 사촌과 조카들의 대학 이상 학자금 및 유학비용을 댄 것. 국내 대학에서 공부하면 학자금, 유학을 가면 최대 3년치 학자금과 생활비(월 1500달러)를 대줬다. 10년이 흐르면서 조카 12명 중 10명이 미국과 캐나다에서 석사학위를, 그중 5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은 김씨 회사에서 연구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아이들의 교육비를 대주니까 형제자매들이 열심히 일하고, 조카들도 성실히 공부했다”면서 “2년 전부터는 처가 식구들에게도 인재개발비를 지급하고 있다”며 웃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친척 모임도 항상 전원 참석이라고.

    부산지방법원 민사13단독 채시호 판사는 8월26일 한 소송의 판결문에 이례적으로 ‘후기(後記)’를 적었다. 이 소송은 작고한 Y기업 설립자의 장남이 빚을 갚기 위해 회사 주식을 제3의 인물에게 판 것에 대해 설립자의 사위이자 Y기업 공동대표인 B씨가 무효라며 제기한 법정 다툼이었다. 피고(사위) 측은 장남이 정신이 혼미한 어머니를 설득해 주식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아 한 행위인 만큼 주식거래는 무효라고 주장했다. 결국 채 판사는 장남의 손을 들어줬지만 후기를 통해 이렇게 적었다.

    “자식과 사위의 싸움을 지켜보는 할머니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부디 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데리러 올 때까지 여생을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만 생각하고, 지금의 자녀들이 아니라 옛날의 착하고 어린 아기들만 생각하길….”

    ※숭실대 정재기 교수(정보사회학)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27개국 3만4544명의 설문 결과를 비교, 분석한 뒤 한국에서만 부모의 소득이 많을수록 자녀와 자주 만난다는 특소성이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발표한 ‘한국의 가족 및 친족간의 접촉 빈도와 사회적 지원의 양상 : 국제간 비교’ 논문에서다. 논문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부모 소득이 1% 늘어나면 자녀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만날 확률이 2.07배 이상 높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4개 회원국은 오히려 부모 소득이 많을수록 대면 접촉이 줄었다.

    # 왕이모는 있어도 왕고모는 없다?

    2008 대한민국 친척 보고서 핏줄의 재발견

    조선시대 대표적 저택인 강원 강릉시 선교장(지방민속자료 제5호).

    초등학교 1학년 딸을 둔 회사원 최성욱(37) 씨는 최근 아내의 말에 ‘깼다’. 2학기 시작과 함께 날아온 알림장을 보고 ‘학부모 교실 청소’에 참가한 최씨의 아내.

    “엄마들이 조를 짜 보통 한 달에 한 번 교실 청소를 한다고 해요. 그날 ‘조장(각 조의 연락담당) 엄마’가 청소도 청소지만 선생님도 한번 뵙자고 해서 갔는데….”

    선생님은 청소를 마친 엄마들과 음료수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시계는 거꾸로 돌아, 며칠 전 수업시간. 추석을 주제로 수업하던 중 선생님이 최씨의 딸(7)에게 질문을 했다.

    “엄마의 언니를 뭐라고 부르나요?”(선생님) “이모요. 우리 이모 정말 예뻐요.”(딸)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요, ‘아빠의 여동생’과 ‘아빠의 오빠’(큰아버지를 지칭한 듯)는 농부예요. 멀리 사세요.”

    선생님은 아빠의 여동생은 고모라고 일러줬는데 딸은 ‘고무’ 같다며 친구들과 깔깔댔다고. 최씨의 아내는 순간 ‘시숙, 제수 방에 들어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해요. 제가 차남인데 고향(전남 영암군)에 자주 내려가지 못했거든요. 어렸을 때부터 딸아이는 서울에 사는 이모가 많이 돌봐줬어요.”

    그는 “육아 때문에 ‘왕고모는 있어도 왕이모는 없다’는 옛말은 이제 바뀐 거 같다”며 웃었다.

    “회사 앞에도 ‘이모 식당’은 있는데 ‘고모 식당’은 없잖아요.”

    ※서울대 왕한석 교수(인류학)의 논문 ‘친척 관련 속담의 민족지적 연구’(사회언어학 제10권 1호, 2002)를 보면 흥미롭다. 그는 전통적인 반촌(班村) 사회인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1년여 체류하면서 그곳 주민의 일상적인 언어생활 모습을 관찰했다. 그 결과 개평리는 존댓말, 호칭어, 친척 용어 등 호칭체계(address system)가 다른 조사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발달해 있었고, 속담의 주제도 친척(kinship)과 관련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다(채집된 속담 60수 가운데 40수가 친척과 관련됐다). 반면 민속언어(folk speech)나 전설, 민담(folktale)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왕 교수는 개평리라는 언어공동체의 사회조직적 특성, 다시 말해 위계적이고 친척들이 많이 모여 사는 개평리의 사회조직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 처삼촌(妻三寸) 묘 벌초하듯

    부산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는 김모(42) 씨. 그는 “지난해 ‘추석 사건’ 때문에 올 추석이 불편할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지난해 이맘때, 평소 제사상으로 사용하던 교자상이 너무 커 아내가 ‘아담 사이즈’로 바꿨다.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가 30여 년간 사용한 교자상이었지만 크기와 무게 때문에 보관과 이동이 쉽지 않았던 것(취재 이후 김씨는 기자의 요청에 정확한 사이즈를 알려왔다. 원래 있던 교자상 크기는 150×90cm, 새로 구입한 교자상은 90×75cm). 평소 거실에서 찻상이나 자녀 공부용 책상으로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교자상 2개를 나란히 놓아 제사상으로 사용하려다 보니 폭은 좁고 길이는 길어져 ‘홀쭉이 제사상’이 됐다. 경북 경주에서 역(逆)귀성한 아버지는 짐짓 ‘상차림 모양새가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차례를 지내고 음복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육적 맛이 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김씨의 아내는 육적을 맛본 순간 ‘넘어가는 줄’ 알았다. 갓 차례 지낸 제수음식이 시큼했던 것.

    “올해 설 차례 때 집사람이 처음 혼자 제수음식을 장만했어요. 힘이 드니까 제수음식 일부를 주문했는데 상했던 거죠. 아버지와 자주 만나 상의 드렸어야 했는데….”

    자초지종을 들은 아버지의 얼굴은 굳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처삼촌 묘 벌초하듯’ 성의 없이 차례를 지낸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상지대 안혜숙 교수(생활과학산업학과)는 논문 ‘도시 기혼남녀의 전통적 효 규범의식과 친척유대간의 관계에 관한 연구’(대한가정학회지 제43권 5호, 2005)에서 현대인의 친척 유대관계는 애정을 바탕으로 한 사교적 유대보다 의례적 유대가 더 강조된다고 주장한다. 친척과 멀리 떨어져 사는 현대인은 빈번한 왕래가 어렵고, 입시 위주의 교육환경은 자녀를 친척들로부터 고립시키는 사례로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그는 의무적 유대관계는 친척간 결속력 강화에 한계가 있다며 잦은 왕래 등 애정을 통한 사교적 관계가 친척간 유대관계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분석한다.

    # 나는 새는 굶어죽어도 종손(宗孫)은 굶어죽지 않는다?

    2008 대한민국 친척 보고서 핏줄의 재발견

    파평 윤씨 종중시제 모습. ‘주간동아’ 설문에서 한국인들이 친척과 만나는 경우는 ‘명절이나 관혼상제 때’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위). 경기 파주시 용미리 가족묘지 공원을 찾은 한 가족이 조상의 묘를 정성스레 벌초하고 있다.

    공기업 연구원 배모(56) 씨의 책상 달력은 여느 직장인과 다르다. 까만색 날짜 칸에는 ‘관계자 미팅’ ‘보고서 마감일’ 등 듬성듬성 일정이 적혀 있지만 파란색과 빨간색 칸에는 ‘○○아들 돌’ ‘뒷산 벌초’ ‘문중 벌초’ ‘△△결혼’ ‘조부 제사’ 등 일정이 빼곡하다. 6대째 내려온 집안 장손인 데다 막내 삼촌과 터울은 불과 10년.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친지 연락책으로 활동한 지도 40년이 다 됐다.

    “며칠 전 벌초를 하다가 벌초가 안 된 묘를 보고 비석을 확인했더니 종증조(증조부의 형제) 묘였어요. 재종백숙부(종증조의 아들·7촌)에게 연락했는데, 올해는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별수 있나요? 제가 했죠.”

    벌초도 벌초지만 집안 맏형으로서의 부담도 만만찮다. 5촌 이상 친척들의 결혼도 집안 대표로 ‘필참(必參)’. 친척 중 돌아가신 분이 있으면 호상주로서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시골에서 장례를 치를 때는 천막이나 전등 설치, 음식 장만 등 일도 많다. “4년도 안 된 자동차가 12만km를 넘었다”며 “종손은 다 그렇다”는 배씨. 그는 종손 살림이 어려우면 종사(宗事) 유지를 위해 지손(支孫)들이 발 벗고 돕는다는 것도 이젠 옛말이라면서 “요즘 종손은 굶어죽기 ‘딱’”이라며 웃었다.

    ※안 교수의 논문 중 ‘사회인구학적 변인별 친척유대관계’를 보면 장남(녀)의 친척 유대관계(M=3.51)가 가장 높았고 그 다음 외동, 차남(녀) 순으로 조사됐다. 가족형태별로는 확대가족(3.76), 부부가족(3.35), 핵가족(3.33) 순이었다.

    # 친척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

    서울 서초구의 정신과 의사 C씨는 요즘 몇 달 전 ‘친척 스트레스’로 병원을 찾은 20대 중반의 한 여성을 치료 중이다. 의뢰인에게는 어릴 때부터 늘 칭찬만 받아온 또래 사촌이 있는데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에 대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아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그(사촌)를 칭찬할 때마다 마치 자기와 비교하는 것 같아 창피하고, 어른들의 질문에도 대답을 피하게 됐다고. 의뢰인은 대학 중퇴 후 수년간 하는 일 없이 지내다 최근 마음을 다잡고 3개월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은 “‘친척 스트레스’의 주범은 경쟁을 부추기는 부모”라고 말한다.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친척과 비교해 ‘○○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1년 내내 그 잔상이 이어진다는 것. 초등학교 동문을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생각이 초등학생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부모가 무심코 내뱉거나 자극을 주려고 한 말이 소극적인 아이에게는 ‘나는 늘 그런 사람이구나’라고 받아들여지기도 한다고.

    “명절은 친척간 갈등 유발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조건에서 자란 친척간에 경쟁의 관점만을 부각하다 보면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죠.”

    또한 손 원장은 “자녀가 친척 만나길 꺼린다면 집안 어른(할아버지 할머니)이 손자들을 모두 불러모아 각자의 장점을 얘기해주거나 타이르면서 완충 구실을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 친척은 바늘방석

    회사원 박모(38) 씨는 명절만 되면 신문 사회면에 등장하는 ‘추석 때 가장 듣기 싫은 인사말’ 설문조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 노하우(?)가 쌓였을 법하지만 “시집 언제 갈래?”라는 말은 여전히 듣기 싫은 인사말이다.

    “친척들이 타박할 때 대처하는 방법도 점점 바뀌더라고요. 처음엔 ‘소개 한번 시켜주지 않으면서 재촉만 한다’고 짜증냈죠. 친척 몇몇이 소개시켜주더라고요. 다음부터는 ‘때가 되면 만나겠죠’라고 웃어넘겼어요. 요즘엔 ‘저는 미혼(未婚)이 아니라 비혼(非婚)이에요’라고 대응해요.”

    비혼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을 폭넓게 아우르는 말이라 한결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그는 이번 추석에도 차례를 지낸 뒤의 ‘오후 당직’을 자처했다.

    직장생활 7년차인 강모(30) 씨는 작은어머니가 부담스러운 경우. 작은어머니가 ‘급여는 얼마인지’ ‘그동안 얼마 모았는지’ ‘사는 집은 얼마인지’ 등을 물어올 때면 “개인적인 질문은 삼가주세욧!”이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비혼가구는 미혼가구와 배우자의 사별이나 이혼 등으로 싱글이 된 1인 가구를 포괄하는 개념. 2005년 기준 우리나라 비혼가구는 280만2636가구로, 1995년 144만3439가구에 비해 59%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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