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1

2008.09.02

다시 보는 색 바랜 그 시절 일기장

  • 조용신 뮤지컬 평론가

    입력2008-08-25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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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보는 색 바랜 그 시절 일기장

    ‘내 마음의 풍금’은 산골학교 선생님과 여학생의 사랑을 그린 소박한 뮤지컬이다.

    뮤지컬 ‘내 마음의 풍금’은 1960년대 강원도 시골의 한 초등학교에 갓 부임한 총각 선생과 그를 짝사랑하는 늦깎이 초등학생 여제자 홍연의 사랑을 담은 서정적인 멜로드라마다. 이 작품은 1981년에 발표된 하근찬의 소설 ‘여제자’를 각색해 1999년 개봉된 영화를 다시 뮤지컬로 만든 것이다. 선생님을 짝사랑한 산골소녀의 이야기라고 해봤자 소박한 이웃 사이에서의 사소한 사건들이 전부다. 게다가 삼각관계라고 하기에도 코웃음이 쳐지는 소녀와 총각 선생, 양호 여교사의 구도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풍금’이 이렇듯 서로 다른 매체를 넘나들며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누구나 기억 한편에 간직한 아련한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휴먼 드라마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원작 소설에 비해 화재사건 등 새로운 사건을 추가하며 이병헌 전도연 이미연 등 유명 배우들의 연기와 산골마을의 풍경을 담은 영상 연출에 비중을 두었다면, 뮤지컬은 원작에 좀더 충실하며 몸에 잘 맞게 재단된 음악과 무대장치로 매체적 특성을 살리는 데 노력했다. ‘여제자’의 경우 총각 선생의 1인칭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자전소설이지만, 무대에서는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홍연의 심리상태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히 적절한 송 모멘트(Song Moment·대사 사이에 음악이 들어가는 지점)는 이러한 관점을 유지해준다. 예컨대 강동수(오만석/조정석 분) 선생이 처음 양수정 선생을 보고 반해 교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부르는 노래 ‘커피향’의 경우, 한쪽에서는 적절히 곁들여진 대사와 노래, 안무가 혼합되어 이어지는 가운데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홍연을 배치해 음악이 드라마에서 분리되는 것을 막고 오히려 드라마를 주도하도록 했다. 이런 구도는 강 선생과 홍연이 각자 다른 사랑을 꿈꾸는 ‘나의 사랑 수정’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기억 한편에 숨겨둔 아련한 추억과 향수 자극



    멜로디 라인도 아기자기한 작품 콘셉트에 맞춰 때로는 발라드로, 때로는 아역 배우들의 앙상블로 배치해 형식미를 느끼게 한다. 현악기와 관악기의 풍성한 음색이 도드라진 라이브 오케스트라가 주는 감동도 크다.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잔뼈가 굵은 김문정의 첫 번째 창작 뮤지컬 작곡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또한 가요계에서 활동하다 공동 작곡가로 나선 최주영과의 협동 작업도 서로의 장점이 조합된 것 같다. 극중 강 선생이 아끼는 LP 음반의 주인공 케니 브라운은 가공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창작진은 그의 곡으로 설정된 ‘Spring Time’을 통해 1960년대 재즈풍의 팝송을 훌륭하게 재현했다.

    뮤지컬로서의 형식미를 완성시키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시각적 효과가 극대화된 무대장치다. 무대디자인을 맡은 정승호는 추억을 무대에 재현하기 위해 상투적인 리얼리즘을 배격했다. 소품으로 칠판, 책걸상이 등장하는 무대 대신 파스텔 질감의 황토빛 무대를 일체형 포털(Portal)로 처리해 모던한 무대를 만들었다. 특히 전환 음악을 적절히 배치해 전환속도가 느린 극장 상부구조의 문제를 해결했다. 무대 양편에 아담하게 놓인 홍연과 강 선생의 방은 중앙 세트와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았고, 극의 핵심 오브제인 풍금은 존재감을 보여줬다.

    또한 극이 진행되는 사계절에 맞게 기승전결의 구조를 이룬 무대는 계절별로 다른 정서와 시각화를 만들어냈다. 예컨대 봄은 산들바람 속에서 처음 사랑에 빠지는 계절이며, 여름은 따가운 햇살 아래 사랑이 익어가는 계절이고, 가을은 예고 없는 이별과 상처를 받는 계절로 표현했다. 그리고 겨울은 작별 이후를 감내해야 하는 시간인데, 이를 각각 봄소풍, 여름밤의 야외영화, 가을운동회, 눈 내리는 겨울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까지의 창작 뮤지컬에서 보기 힘들었던 무대장치와 음악, 안무가 단일한 콘셉트 아래 잘 맞물려 있다.

    세대를 초월한 관객 다 같이 감동

    다시 보는 색 바랜 그 시절 일기장

    극 중의 가을운동회 장면. 이정미는 조숙한 여학생 홍연 역을 만족스럽게 표현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매끄러웠는데, 특히 강 선생 역의 오만석은 동료 교사에게 연정을 품는 순수함을 잃지 않는 캐릭터를 무난히 소화했다. 홍연 역의 이정미는 연기와 노래 모두에서 조숙한 여학생을 만족스럽게 표현해냈다. 엉뚱하지만 매력적인 양 선생 역의 임강희와 체육선생 박봉대 역의 임철형의 연기도 적절했다.

    뮤지컬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성인남녀의 사랑이야기와 비교하면 기억마저 아련한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을 뮤지컬에서 만난다는 사실은 의외일 수 있다. 첫사랑은 아름다운 추억만으로 끝난다는 당초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다. 온통 착하고 맑기만 한 이야기들이 큰 사건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내 마음의 풍금’은 강렬한 자극을 원하는 관객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세대를 초월한 관객들이 다 같이 웃음 짓고 감동할 수 있는 창작 뮤지컬이 등장했다는 사실에는 함께 박수를 보낼 수 있지 않을까?(9월11일까지, 호암아트홀, 문의 02-751-9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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