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8

2008.08.12

북적대던 항구 간 데 없고 고적한 마을에 詩心만 가득

토사 축적 등으로 90년대 완전 폐항 … 많은 시인들 이곳 소재로 시 남겨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08-06 09: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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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적대던 항구 간 데 없고 고적한 마을에 詩心만 가득

    전북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의 오래된 방앗간.

    이산하 곳곳에 비경과 절경이 차고 넘쳐서 이제는 ‘체험학습’이니 ‘문화관광’이니 하는 소리를 넘어서 ‘디카 출사처’니 ‘드라이브 코스’ 같은 소리도 숱하게 들린다. 저 임진강에서 남녘의 섬까지 이 잡듯 속속들이 뒤져낸 끝물이니 이 작은 산하가 지리부도에 나와 있는 모양보다는 훨씬 넓고 깊게 확장된 것은 좋으나 그 모양새가 ‘천혜의 비경’을 탐사하는 형국으로 그친다면, 산하는 산하로되 다만 그것은 무기질의 대상이 될 뿐이다. 속 깊이 사랑하지 않고서 어찌 산하 속으로 스며들 수 있겠는가.

    그런 비경이나 절경들이 아닌 곳으로 문득 다니고 싶은, 아니 천하 제일 풍광을 찾아나선 길이라 할지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잠시 고속도로를 벗어나 한가롭게 들러보고 싶은 소읍이나 면소재지들이 부러 갸륵해지는 것은 그런 곳들이 대체로 인근의 소문난 관광지로부터 가까운 듯하면서 멀찍이 소외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정주 시인 줄포초등학교 시절 여선생 향한 연정 시로 써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숱한 고속도로와 그에 준하는 왕복 4차선의 맹렬한 속도는 그 사이의 작은 읍과 면을 다만 지리부도 속의 공허한 낱말로 유폐시켜버린다. 호남고속도로가 가로지르는 정읍시 태인면, 대진고속도로가 쭉 뻗어내리는 산청군 단성면, 중앙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예천군 감천면, 경부·중부고속도로에 더하여 청원-상주 고속도로까지 위세를 더한 청원군 문의면 등에 가면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그곳에서 숨이 멎는 듯하면서 잠시 아득해진다. 물론 그 작은 면소재지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고 장날이면 오전 한때나마 북적거리는 풍경이 없지 않으나 날이 갈수록 더욱 퇴락해지는 인상 또한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대낮에도 문 닫은 가게들이 늘어간다.

    줄포(전북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 한자로는 茁浦라고 쓴다. 茁은 자전에 ‘풀이 돋아나는 모양, 싹이 트는 모양, 동물이 자라는 모양, 풀 이름’ 등으로 나와 있다. 고졸(古拙)한 마을 이름이다. 한때는 그 이름처럼 은성한 때가 있었다. 원래 건선면이었는데 1875년 항만이 구축되면서 원래 이름인 줄래포를 바탕으로 줄포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목포나 군산보다 일찍 개항한 줄포는 조기의 3대 어장 가운데 하나인 칠산어장이 있어 20세기 중엽까지 큰 항만으로 발전하였다. 김제·만경평야의 쌀이 일본으로 수탈당하는 출구가 줄포이기도 했다. 김제평야 일대에서 가장 큰 쌀 생산지였던 죽산면에는 식량 수탈의 거점지로 기능하던 하시모토 농장 같은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줄포면도 사정이 비슷하였다. 목포, 군산과 더불어 큰 항만이었기 때문에 일인이 많았다. 중국에서 건너온 상인도 있었다. 부안군 내에 유일하게 은행(조선식산은행 줄포지점)이 있었고, 군청은 부안에 있었으나 치안을 총괄하는 경찰서는 줄포에 있었다. 시인 서정주와 한국 바둑을 반석 위에 세운 조남철 9단이 줄포초등학교(당시에는 줄포공립보통학교)를 다녔고, 그래서 서정주는 코흘리개 꼬마 시절에 어여쁜 일인 여선생을 향한 풋과일 연정을 시 줄포 2에 쓴 바 있다.

    사내 열두 살이면/ 피는 꽃이나 맑은 햇살이나 좋은 여자의 얼굴이/ 눈에 그냥 비치는 게 아니라/ 그 가슴에까지 울리어 오기 비롯는 나이.

    그런 나이에 일인 여선생이 있었고 소년 서정주가 쓴 ‘촌사람들이 지게에 땔나무를 그득히 지고/ 아침 안개 속에서 나와 장에서 팔고는/ 다시 그 안개 속으로 아득히 사라져가는’이라는 시를 그 여선생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묘한 아이’라고 칭찬을 해주자 그때부터 첫사랑이 되었다. 이듬해 여선생은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꼬마 서정주는 일제 화장 크림 두 갑과 ‘깜장’ 목양말 한 켤레를 이별의 선물로 사서 준다. 그리고 송별!

    이튿날 합승차가 줄포를 뜰 때에는/ 한 반의 서너 명 친구들과 함께/ 그 가는 길 한가운데 가 주저앉아 있었네./ 그렇지만 그 차는 비껴 떠나고/ 이별이란 새 맛 하나를/ 나는 새로 배웠네.

    외지인 관광객은 변산반도나 고창 선운사로 뺏겨

    북적대던 항구 간 데 없고 고적한 마을에 詩心만 가득

    시인의 감정을 간질이는 줄포리는 시간이 정지된 듯 고색창연하다.

    줄포는, 시인의 기억처럼, 그런 줄포가 서서히 되고 말았다. 토사가 축적되어 더 이상 줄포가 항구 기능을 할 수 없게 되고 1958년에 어업조항과 부두노조가 곰소항으로 옮겨갔으며 90년대에 완전히 폐항되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세상으로 열린 창이 되는가 싶었으나 외지의 관광객들은 줄포에 이르기 전에 변산반도 쪽으로 빠지거나 아예 줄포를 지나쳐 고창 선운사로 질주해버린다. 어쩌다가 들른 사람들도 오랫동안 이곳 사람들이 줄포만이라고 부른 갯벌을 향해 “야, 곰소만이다!” 하고 소리친다. 오일장이 서면 옛 기억이 몸에 밴 인근 동리 사람들이 줄포를 찾는다.

    누구라도 이곳에 오면 시인이 된다. 인근의 내소사, 개암사, 선운사가 그윽하고 격포, 변산, 채석강에 모항, 곰소항이 즐비하고 반계 유형원 유적지에 곳곳의 동학 표지석과 아랫마을 사포리의 만정 김소희 생가와 미당시문학관 등이 있어 고개를 좌우로 조금만 돌리면 ‘문화관광 명소’들이지만, 담배 한 모금 피울 요량으로, 아니면 칭얼대는 애들에게 음료수라도 사줄 요량으로 줄포면으로 들어서면 누구라도 시인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시인 송수권은 시 줄포마을 사람들에서 ‘옛날, 할아버지 살던 줄포마을은 그렇지, 한틀 지게를 엎어놓으면 꼭 맞는 말일지도 몰라.(중략) 보름 사릿물이 오늘 때쯤은 지네발로 두 대궁지가 달싹달싹 일어서는 것이 눈에 역력하더란다’는 판소리 옛 가락으로 동학 이후의 풍경을 그린 바 있다. 강원도 양양에서 오랫동안 시업(詩業)을 이룬 이상국도 이곳에 와서 줄포에서라는 시를 썼다. ‘되잖은 시 몇 편으로 얼굴을 가리고/ 몰래 만나는 여자도 없이 살았다고/ 지는 해를 바라보고 섰는데/ 변산반도 겨울바람이/ 병신같이 울지 말라고/ 물 묻은 손으로 뺨을 후려친다// 나는 너무 일찍 서쪽으로 온 모양이다.’

    그리고 김명인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한 시인은 줄포에 와서 줄포 여자의 소리를 듣는다.

    낡은 유행가 좇아가느라 나 거기 주저앉았다/ 희망이 숨차느냐고 놀고 먹은 지 벌써 이태째,/ 포장 친 간이주점에서 보면 바다는/ 넘을 고개도 없는데 보리 고랑 가득 펴고 있다// 남녘엔 봄 지나가고, 몇 년 만의 외출이냐고/ 한 가족이 아직은 시릴 모래톱에 맨발을 적신다/ 짧은 봄날에는 채 못 피우는 꽃봉오리도 많다/ 시절이 저 여자에게 유독 가혹했을 것이다// 접시에 담겨서도 꼼지락거리는/ 잘린 낙지발 중년이 입 안에서 쩍쩍거릴 때/ 목포에서는 한창 잘나갔지요, 거름을 파고들었던/ 홍어찜이 이제야 콧속을 탁 쏜다// 여기도 예전의 줄포 아니라요, 어느새 경계 넘어버린/ 세월에도 변하지 않는 것 입맛이라고/ 저 여자, 버릇처럼 손장단으로 이길 수도 없을 붉은/ 봄꽃 피워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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