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4

2008.02.26

부시 방북 북 -미 정상회담 열리나

8월 베이징올림픽 전후 예상… 조율 위한 라이스 사전 방북설 솔솔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8-02-20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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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로 중국을 배신하지 않겠다.”

    1월30일 왕자루이(王家瑞)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특사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 소개한 김 위원장의 발언을 좀더 들어보자.

    “조(朝)·중(中) 우의는 중국 공산당과 조선 노동당, 그리고 두 나라의 선배 지도자들이 물려준 보귀한 재산이다. 어떻게 우리가 중국을 배신하거나 저버리겠는가.”

    시계침을 거꾸로 돌려보자. 올 1월 초 중국은 쌀 밀가루 콩 옥수수의 북한 수출을 사실상 금지했다. 이 조처는 중국 내 식품가격 안정이 명목이었으나, 실질적인 결과로 보면 북한 길들이기용이었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1월1일 발표한 신년사에서 ‘인민생활 우선주의’와 ‘먹는 문제 우선 해결’을 강조했다. 강성대국을 앞세워 10년을 노력했음에도 아직 먹는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다.



    올해 북한의 춘궁기는 지난해 8월의 대홍수 탓에 예년보다 이른 2월 말부터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함경도 일원에서는 벌써부터 식량 걱정이 태산이다. 이런 와중에 중국이 곡물 수출 중단으로 북한을 옥죈 것이다. 왜 중국은 ‘때를 맞춰’ 어깃장을 놓았을까?

    김정일, 중국 초청에 “올림픽 성공을 빈다” 원론적 답변

    시계침을 앞으로 돌려보자. 8월8일 오후 8시8분8초(중국인은 ‘8’이라는 숫자가 재물과 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에 베이징올림픽의 막이 오른다. 중국은 개막식 행사에 맞춰 ‘정상 외교’를 준비 중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후진타오 주석의 개막식 초청을 수락했으며,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도 9만1000석 규모의 베이징올림픽 스타디움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미국의 타임 스케줄도 부시 대통령이 동아시아로 움직이는 8월8일 전후로 맞춰졌다는 분석이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 신고를 성실히 마무리한다면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부 장관이 북한을 방문하게 된다. 라이스 장관의 방북은 북한으로서도 무척이나 바라는 바다. ‘8월8일’을 겨냥한 미국과 중국의 속내는 다르지만, ‘공’은 북한으로 넘어가 있는 셈이다.

    베이징올림픽 개막에 맞춰 이명박-김정일-부시-후진타오가 만나면 한반도는 격변에 돌입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중국과 미국의 속내는 다르다. 중국은 북한이 미국 쪽으로 기우는 것을 꺼린다. 물론 북한이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방북한 2000년 10월의 실기(失機)를 되풀이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북한은 베이징에서의 ‘빅쇼(big show)’와 관련해 ‘지켜보자’는 태도다. 후 주석은 1월30일 왕 부장을 통해 김 위원장을 베이징올림픽에 초청했다. 김 위원장은 “베이징올림픽의 원만한 성공을 빈다”고 원론적으로 답했다. 베이징 외교가에선 김 위원장의 이 대답을 거절로 해석한다.

    이 당선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다음 날 평양에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뉴욕필)가 연주하는 미국 국가가 울려퍼진다. 뉴욕필의 평양 공연은 미-중의 ‘핑퐁 외교’를 연상시킨다. 중국의 미국 탁구팀 초청(1971년 4월10일)은 헨리 키신저 특사의 중국 방문(1972년 2월21일)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중 관계 정상화라는 극적인 열매를 맺었다.

    그렇다면 ‘오케스트라 외교’는 핑퐁 외교의 전철을 밟을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은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관계 정상화에 방점을 찍고 있으나 “문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하는 리비아가 아니라, 핵을 갖고도 미국과 잘 지내는 인도와 파키스탄을 주시할 가능성”(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이다. 요컨대 북-미, 북-중 관계가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온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의 정상이 종전 선언에 서명하는 이벤트는 ‘압록강도 놀랄’ 사건이다. 종전 선언은 당사자인 미국의 동의가 필수불가결한데, 미국은 노무현 정부 임기 내의 종전 선언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북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미국 인사들의 발언은 노무현 정부의 해석, 혹은 바람과는 타임 스케줄이 달랐던 셈이다. 요컨대 미국의 시계침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8월8일 전후로 맞춰져 있었다.

    남-북-미-중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빅쇼’의 성사 가능성을 미뤄볼 수 있는 가늠자는 라이스 장관의 방북이다. 라이스 장관은 2월25일 이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할 예정인데, 이튿날 평양으로 건너가 뉴욕필 공연을 관람하리라는 관측이 언론 지면에 오르내렸다.

    뉴욕필 평양 공연으로 북-미 핑퐁외교

    김정일과 라이스의 만남은 북-미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사실상 연락사무소 구실을 하는 미국 외교관이 평양 고려호텔에 상주하고 있는데, 둘의 면담 결과에 따라 이 사무실은 정식 연락사무소 또는 대표부로 승격된다. 평양과 워싱턴에 각각 성조기, 인공기가 휘날리게 되는 셈이다.

    라이스 장관은 미국의 타임 스케줄대로라면 늦어도 상반기엔 북한을 방문해야 한다. 북-미 관계는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달리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 북핵 및 식량 문제, 문화교류 등과 관련해 통 큰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역설적으로 북-미 관계의 호전은 중국 연출의 빅쇼가 무산됨을 뜻한다.

    북한 경제의 중국 예속화를 목표로 동북공정을 진행해온 중국은 북핵 문제 해결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한다. 식량은 중국이 든 ‘전가의 보도’다. 그렇다면 식량을 무기로 한 중국의 압박에 대해 북한은 왜 “배신하지 않겠다”는 수사(修辭)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였을까?

    북한은 중국이나 한국을 지렛대 삼아 미국과의 협상에 나서왔다. 북한이 중국 쪽으로 기울면 한국의 입지가 그만큼 좁아진다. 남북한 간 내교(內交)가 실종된 상황에서 북한과 미국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은 실(失)이 크다. 그래서 한국이 배제된 상태에서 북미간 합의가 이뤄지는 모습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당선인의 대북정책은 한미동맹 강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전문가들은 차기 정부가 남북간 내교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북한이 통미봉남(通美封南·미국과 통하고 한국을 봉쇄한다)에 나서면 한국은 김영삼 정부 때처럼 한반도 문제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 미국이 ‘한국’과 ‘북한’을 별개의 국가로 다루면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고, ‘기존 핵 무기를 용인하는’ 수준에서 북핵 문제를 봉합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북-미, 북-중 관계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이 당선인 측은 너무 느긋해 보인다. 한미동맹만 강화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이다.

    후 주석은 지난해 10월29일 류윈산(劉雲山) 중국공산당 선전부장 방북 때 김 위원장에게 방중 초청장을 보냈다. 김 위원장의 3월 방중설이 베이징에서 흘러나온 것도 이 초청장에서 비롯됐다. 북한이 후 주석의 바람대로 중국 쪽에 붙는다면 미국의 8월8일 시나리오는 ‘닭 쫓던 개’ 꼴이 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10월16일 북한을 방문한 농 득 마잉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에게 ‘도이모이’를 배우겠다고 밝혔다. 도이모이는 ‘개혁’ ‘쇄신’이라는 뜻으로, 베트남의 개방정책을 가리킨다. 10월27일 북한 김영일 내각총리가 베트남을 방문한 것은 김 위원장의 베트남 답방의 정지 작업이었다.

    김 위원장은 중국을 거쳐 육로로 베트남을 방문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국내 언론에선 주목하지 않았으나,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이 반세기 만에 중국을 방문한 것은 일대 사건이다. 베트남과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처지가 비슷하다. 북한은 쌀 수출국인 베트남에게서 식량을 지원받을 수도 있다.

    중국으로선 북한이 미국과 손잡고 베트남식 개방에 나서는 게 최악의 시나리오다.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고스란히 미국에 넘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류 선전부장이 들고 간 후 주석의 초청 ‘커우신(口信)’에 북한이 미적거린 이유는 북-미 관계가 중국의 바람과는 다른 쪽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8월 빅쇼를 준비하는 중국과 미국의 속내는 어떻게 다를까? 앞서 언급했듯, 미국은 베이징에서의 이벤트를 원하지 않는다. 부시 대통령이 올림픽 개막식을 관람한 뒤 평양을 직접 방문하는 시나리오가 미국의 복안이다. 이 구상이 실현된다면 중국은 북한과 미국에게 뒤통수를 맞는 셈이다.

    김 위원장은 베트남 방문 여부를 결론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태도를 지켜본 뒤 결정하겠다는 의도다. 북한이 베트남 모델을 따르려면 미국의 지원이 필수불가결하다. 한국은 물론, 일본과 유럽연합(EU)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아시아개발은행(ADB)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북-미, 북-중 숨가쁜 행보 … 서울은 여유? 게으름?

    ‘지금’ 북한과 미국이 물밑에서 벌이는 협상은 광범위하다. △식량 지원 △중유 지원 △넌-루거 프로그램(옛 소련이 붕괴된 이후 우크라이나 등의 핵 무기, 물질, 연구진을 평화적으로 해체한 핵 폐기의 전범)에 따른 북핵 기술자에 대한 교육 △라이스 장관 방북 성과물에 대한 협의 △뉴욕필 방북에 따른 사전 점검 △사회문화 교류 협의 △6자회담 재개와 1차 결과물(플루토늄 문제) 협의 등이다.

    김 위원장은 중국의 베이징올림픽 초청을 일단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절대로 중국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발언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고 베트남 모델을 받아들이더라도 “중국을 배신하거나 저버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김 위원장의 다음 행보가 자못 궁금하다.

    김 위원장의 결정은 2월이 가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내려질 것으로 봐야 한다. 북-미, 북-중 관계가 숨가쁘게 돌아감에도 서울의 행보는 지나치게 여유로운 듯하다. 외교든 내교든 레버리지 구실을 못했을 경우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온고지신(溫故知新)해봐야 할 때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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